유리·냉기·소리·청결·시간·빛… 여섯가지 핵심어로 역사 설명
4000년전 장신구였던 유리… 인쇄술 보급되면서 안경으로
오늘날엔 광섬유 케이블로 변신 거듭하며 발전 이끌어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스티븐 존슨 지음|강주헌 옮김|324쪽|프런티어|1만6000원
먼 미래 '로봇 역사학자'가 지난 시대를 서술한다면 전혀 다른 곳에 방점을 찍을 것이다. 로마제국 몰락이나 신대륙 발견처럼 인간이 쓴 역사에서 크게 취급하는 대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18세기 체스 게임을 흉내 내던 기계식 장난감 같은 로봇 발전의 단초가 더 의미가 있다. 미국 브라운대 출신 과학 저술가인 스티븐 존슨은 이 로봇 역사학자처럼 낯선 시선으로 역사 보기를 제안한다.
유리(glass) 입장에서 볼 때 지금 인간이 사는 세상은 유리가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2600만년 전 아프리카 리비아사막에서 알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지표 온도가 섭씨 500도 이상 올라가 모래 속에 있던 이산화규소 알갱이들이 대거 녹아내렸다. 인간은 1만년 전 이 사막에서 햇빛에 투명하게 반짝이는 단층을 보았다. 지금 우리가 유리라고 부르는 물질이다.
4000년 전 이집트 지배자들은 유리 장신구를 몸에 달았다. 14세기 베네치아 상인들은 화려한 꽃병 등 유리 사치품을 만들었다. 혁신은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출판물이 쏟아지자 일반 백성들은 자기 눈이 가까운 곳을 잘 보지 못하는 원시(遠視)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전에는 수도사들이나 라틴어 성경을 읽을 때 볼록 유리 덩어리를 사용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보급이 안경의 폭발적 수요를 가져온 것이다.
이후 유리의 변신은 눈부시다. 20세기 초 유리를 길게 늘여 실처럼 긴 섬유를 뽑아냈다. 유리섬유는 강철보다 강했다. 단열재와 헬멧, 컴퓨터 회로판을 비롯해 항공기 동체를 만들 때 사용된다. 유리섬유는 빛을 한 곳에 모은 레이저와 결합해 광섬유로 발전한다. 오늘날 전 지구를 연결하는 인터넷은 광섬유 케이블로 이어져 있다. 저자는 "월드와이드웹도 결국 유리실로 짜인 것"이라고 말한다.
- (왼쪽)인쇄된 책을 읽기 전까지 사람들은 자신이 가까운 곳을 잘 보지 못하는‘원시’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안경을 쓴 수도사의 모습을 묘사한 최초의 그림. 1342년 작품이다. (오른쪽)19세기까지도 물에 몸을 담그면 위생에 좋지 않다고 여겼다. 염소 처리법으로 오염된 물을 정화한 이후 위생 관념이 바뀐다. 물로 깨끗이 씻을 것을 강조한 1955년 미국 포스터. /프런티어 제공
저자는 자신의 관점을 '롱 줌(long zoom)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시선으로 유리를 비롯해 냉기(cold)·소리(sound)·청결(clean)·시간(time)·빛(light) 등 여섯 가지 핵심어로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의 역사를 설명한다. 냉기를 잡아두는 기술인 냉장고의 발명으로 인간은 신선한 식품을 오랜 기간 먹을 수 있게 됐다. 에어컨의 발명은 미국의 정치 지도를 바꿔 놓기도 했다. 민주당의 아성이었던 남부 지역 에어컨 달린 집에 보수 성향 은퇴자들이 몰려들면서 선거 판도가 바뀌었다.
변화와 혁신은 이를 주도한 이들도 전혀 예상 못한 분야의 변화까지 가져온다. 20세기 초 오염된 물을 정화하는 염소 처리법 발견으로 유아 사망률이 이전보다 74% 낮아진 것은 예측 가능한 변화였다. 하지만 이 덕분에 더운 여름날 수영장에서 늘씬한 몸매를 드러내는 비키니가 등장한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염소 처리법으로 깨끗한 물을 대량 공급할 수 있게 되면서 공공 수영장이 탄생했고, 여성들은 무릎과 어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관점을 달리하면 새로운 역사의 무늬를 만날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사물 뒤에 가라앉아 있는 역사의 침전물을 길어올리는 저자의 솜씨가 대단하다. 원제 'How We Got To now'.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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