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30일 화요일

뿌리는 식물의 '숨겨진 반쪽'… 땅위 잎·줄기와 무게 엇비슷

나무 뿌리가 바빠지게 생겼다. 얼었던 땅이 스르르 녹아 싱그러운 수액(樹液)이 치오른다. 겨우내 메말랐던 나뭇가지가 촉촉해진다. 맞다. 깊은 샘은 마르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뿌리는 식물 밑동을 땅에다 굳게 박아 바람에 넘어지지 않게 한다. 또한 '식물의 입'으로 물과 무기양분을 빨아들인다. 사막 식물은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깊게 많은 뿌리를 내리지만 수생 식물은 숫제 뿌리가 없다시피 하다. 콩나물도 물이 넉넉하면 곁뿌리가 적지만, 물이 없으면 잔뿌리를 수북이 내린다.

어쨌거나 여느 생물도 혹독한 환경에 처하면 이겨내고 벗어나기 위해 애써 변한다. 적응(適應)이요 진화(進化)다. 예부터 젊어 고생은 사서 하라 했다. 갖은 애를 써서 호된 고난을 버티는 것은 곧 '진화 중'인 셈이고, 그런 사람에게선 인간다운 맛과 향이 듬뿍 난다.

'뿌리 깊은 나무 가뭄 안 탄다'는 말도 있다. 무엇이나 근원이 깊고 튼튼하면 어떤 시련도 견뎌낼 수 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이 다 근본이 있다. 개인의 본바탕과 집안 내력, 국가와 민족 전통 등도 근원(根源)이 있는 법이다. 오죽하면 '물 한 모금을 마실 때도 그 시원(始原)을 생각하라(飮水思源·음수사원)'고 했겠는가.

땅 위에 드러난 식물의 잎줄기와 땅 속에 내린 뿌리 생체량(生體量)의 규모가 거의 맞먹는다. 지상에 있는 한 포기 풀과 한 그루 나무를 모조리 잘라 각각 무게를 달고, 지하의 원뿌리·잔뿌리를 몽땅 파내 재보면 둘의 무게가 엇비슷하다는 말이다. 잔잔한 강이나 호수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가 그 나무의 뿌리와 맞먹는다고 생각해보라. 그래서 식물 뿌리를 '숨겨진 반쪽'이라 하는 것이다.

이목지신(移木之信)이란 말도 있다. 위정자는 나무 한 그루 옮기면서도 백성에 대한 약속을 지킨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나무를 옮겨 심으면 적응에 3년쯤 걸린다고 한다. 보통 큰 나무를 이식하고 나면 걸쭉한 막걸리를 뿌리 둘레에 듬뿍 흩뿌린다. 그리고 그때 원래 자라던 땅의 모토(母土)를 가져와 흩어준다. 지금껏 죽이 맞아 잘 지냈던 토양세균(土壤細菌)과 더불어 새 땅에서 잘 지내게 해주는 것이다. 나무뿌리도 낯을 가린다고 해야 할까. 옮겨 심느라 몽탕몽탕 잘려 생채기 나고 곪아 터진 뿌리에 새살이 나게 해주는 것이 토양세균들의 몫이다. 토양세균이 분비하는 항생 물질이 식물 뿌리를 돌본다. 여기에 막걸리를 뿌려주면 세균들이 푸지고 실하게 그 수를 불린다.

다시 말하면 푸나무(초목)는 흙의 세균 없이 살지 못한다. 세상에 공짜 없는 법. 기름진 흙 속의 수많은 세균과 곰팡이는 불용성(不溶性)인 무기영양소를 이온(ion)화시켜 양분 흡수를 거든다. 반대로 미생물은 식물로부터 탄수화물 등을 얻는다. 이렇게 식물과 토양 미생물이 도우며 함께 산다. 그래서 뿌리 곁에는 딴 곳보다 갑절이나 많은 미생물이 득실득실거린다.

애타게 기다렸던 새봄 기운이 새록새록 느껴진다. 주자십회훈(朱子十悔訓)에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후회한다(春不耕種秋後悔·춘불경종추후회)고 했다. 회한(悔恨) 없는 삶을 살 수는 없을까. 땅을 가꾸고 일구는 흙일은 본능적인 것이다. 텃밭은 나의 수도장(修道場)이다. 물씬 풍기는 풋풋한 흙 냄새 실컷 맡고, 살포시 흙살 뒤집어 써 심성(心性)까지 맑게 해주는 봄밭에다 뭇 씨앗을 정성껏 심으리라.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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