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춤도 좋아해… 지금도 공연 볼 때면 무대 뛰어 올라 춤추고 싶어"
첼리스트 정명화(71)는 생애 단 한 번 첼로를 그만두려 한 적이 있다. 가장 순탄하고 행복했던 시기에 위기가 닥쳤다. 1970년대 후반 기자였던 남편(구삼열 월드임브레이스 대표)이 AP통신 로마지국으로 발령받아 이탈리아에서 지내던 시기였다. 맛있는 것도 많고, 유럽으로 연주 다니기에도 최적의 장소였다. 열정이 넘쳐 연습을 맹렬하게 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실력이 느는 것 같지 않았다. 식구들에게 "나 이제 첼로 안 한다"고 선언했다. 첼로만 그만두면 할 일이 너무나 많을 것 같았다. 그러고나서 이틀, 막상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오히려 "첼로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만 점점 강해졌다.
"두 딸이 '엄마는 첼로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못 이기는 척 다시 활을 잡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이틀이었다. 위기를 넘기고서야 알았다. 위로 올라가지 않고 옆으로 넓어지는 때가 있다는 것을."
정명화와 동생 경화·명훈 삼남매의 '정(鄭)트리오'는 수십년 전만 해도 적빈(赤貧)의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배출한 세계 정상급 예술인이다. 60년째 첼로를 안고 세계를 누비며 살아온 정명화의 요즘 무대는 별빛 쏟아지는 시골 마을이다. 그는 수년째 전국을 돌며 군(郡) 단위 마을까지 찾아가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오는 12일까지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에서 열리는 계촌클래식축제(주최 현대차정몽구재단)에서 계촌초교 전교생 42명 전원이 참여하는 별빛오케스트라를 지도한다. 대중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클래식을 퍼뜨리고 있는 '한국 첼로의 대모(代母)'를 지난 7일 서울 구기동 자택에서 만났다.
"두 딸이 '엄마는 첼로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못 이기는 척 다시 활을 잡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이틀이었다. 위기를 넘기고서야 알았다. 위로 올라가지 않고 옆으로 넓어지는 때가 있다는 것을."
정명화와 동생 경화·명훈 삼남매의 '정(鄭)트리오'는 수십년 전만 해도 적빈(赤貧)의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배출한 세계 정상급 예술인이다. 60년째 첼로를 안고 세계를 누비며 살아온 정명화의 요즘 무대는 별빛 쏟아지는 시골 마을이다. 그는 수년째 전국을 돌며 군(郡) 단위 마을까지 찾아가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오는 12일까지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에서 열리는 계촌클래식축제(주최 현대차정몽구재단)에서 계촌초교 전교생 42명 전원이 참여하는 별빛오케스트라를 지도한다. 대중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클래식을 퍼뜨리고 있는 '한국 첼로의 대모(代母)'를 지난 7일 서울 구기동 자택에서 만났다.
-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 자택에서 첼리스트 정명화가 ‘60년 애인’인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를 쓰다듬고 있다. / 이태경 기자
정명화는 첼로를 늦게 시작한 편이다. 그는 "나의 분신인 첼로를 만난 날은 1955년 2월 25일"이라고 했다.
―오래전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할 만큼 특별한 추억이 있나.
"초등학교 3~4학년 때 신나게 놀다 보니 성적이 중간이었다. 공부를 안 해도 늘 100점 받는 건 수학뿐이었고 역사와 지리 점수는 엉망이었다. 성적이 부족하니 어머니가 원하던 이화여중에 들어가려면 콩쿠르(이화경향콩쿠르)에서 1등을 해야 했다. 입시가 다가와 콩쿠르(성악 부문)는 물론이고 공부에도 매진했더니, 성적으로도 합격하고 콩쿠르도 1등 했다. 기쁨에 넘친 어머니가 합격 발표 다음 날 사주신 것이 첼로였다."
그날부터 따지자면, 정명화는 어언 60년째 첼로와 열애 중이다. 배우기 시작한 지 2년 3개월 만에 전국중고등학생콩쿠르에서 전 종목 특상을 받았다. 1961년 뉴욕 줄리아드스쿨을 졸업하고 1971년 제네바국제음악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며 널리 알려졌다. 당시 반주자는 동생 명훈씨였다.
―다른 악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내가 가장 꿈꿨던 악기는 나의 목소리였다. 노래하는 걸 참 좋아했고 칭찬도 많이 받았다. 메조소프라노였지. 첼로를 시작하고도 2년 정도 노래 레슨을 같이 받았다. 그런데 변성기가 오면서 목소리가 안 나왔다. 안 되나 보다 싶어 그만뒀는데, 그 시기만 잘 넘기면 되는 거였더라. 아쉬웠지만 이미 첼로에 깊이 빠져버린 뒤였다. 춤도 좋아한다. 학생들 레슨할 때 춤을 추듯 몸으로 표현해서 알려준다. 지금도 객석에서 오페라 '카르멘'을 듣다 보면 무대로 뛰어올라가 카르멘처럼 춤추고 싶다. 아, 잘 할 수 있는데."
―뛰어난 클래식 음악가는 타고나야 하나.
"음악은 귀와 끼다. 듣는 귀를 타고나야 좋은 소리를 구분할 수 있다. 끼가 있어야 그 소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 최고가 되느냐는 그 바탕에 어느 정도의 노력을 쏟아붓는가에 달렸다."
―본인은 어느 쪽인가.
"귀는 어머니, 끼는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어머니는 귀가 매우 발달해서 재능 있는 소리를 바로 알아들으셨다. 아버지는 가만히 있다가도 '박연폭포~' 하며 구성진 가락을 뽑으셨는데, 옆에서 들으면 다들 감탄할 정도였다."
- 2004년 9월 4일 어머니 이원숙(왼쪽에서 셋째)씨의 86세 생일을 맞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어머니에게 바치는 음악회를 마친 정트리오가 청중에게 인사하고 있다. / 이명원 기자
바이올린은 화끈하고, 첼로는 뜨끈하다. 이 점은 바이올리니스트인 경화씨와 명화씨의 성격이나 연주 스타일과도 일치한다. 경화씨는 폭포고, 명화씨는 호수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다 자택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경화씨는 강아지 목줄을 잡고 있던 손까지 동원해 양팔을 크게 흔들며 인사했다. 그에게 따라붙는 별명인 호랑이나 마녀 같은 격정이 작은 몸짓에서도 묻어나왔다. 반면 명화씨는 큰 몸동작이 없이 부드럽고 우아하다. 답변 중에도 허리가 꼿꼿했다. 첼로를 다리 사이에 껴안고 있는 자세 그대로다.
―연주자는 성격도 자신의 악기를 닮는다던데.
"높고 뾰족하고 찌르는 소리에 익숙해서인지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파르르 한다. 자기들끼리 잘 모이기 어렵다. 첼리스트들끼리는 만나면 푸근하고 잘 어울린다. 다른 악기를 감싸주는 소리를 내다 보니 절로 그렇게 됐나 보다."
정명화의 첼로는 1978년 미국 뉴욕에서 구매한 스트라디바리우스다. 당시 구매가가 20만달러. 어머니 이원숙씨의 선물이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이탈리아 명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1644~1737)가 만든 현악기를 일컫는다. 악기 관리 상태나 전(前) 주인의 명성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경매에 나오면 최소 수십억원대다. 바이올린은 1600만달러(180억원), 비올라는 4500만달러(510억원) 수준이 최고가다.
정명화는 첼로를 위해 여름에는 제습기, 겨울에는 가습기를 동원해 습기 관리를 한다.
―첼리스트는 비행기 탈 때 표를 한 장 더 사서 첼로를 태운다던데, 정말 그런가.
"바이올린은 좌석 위 짐칸에 넣으면 되지만 첼로는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표를 사서 앉혀야 한다. 남편과 동행하는 여행에서, 좌석 3개를 샀다가 한 자리가 떨어져 있으면 남편을 보낸다. 어떤 경우에도 첼로가 내 옆이다."
첼로가 정식 승객인 양 좌석을 차지한 풍경은 일반 승객에게 신기하고 낯설다. "이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친 나머지, 첼리스트 스티븐 이설리스는 아예 답변이 새겨진 티셔츠를 주문 제작해서 여행 때마다 입고 탄다. 티셔츠에는 유머 넘치는 답변이 새겨져 있다. '첼로입니다, 기타 아니고요. 네, 표 하나 정식으로 산 겁니다. 아니요, 그렇다고 플루티스트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정명화는 첼로를 데리고 타다 웃지 못할 일도 겪었다. 약 20년 전, 첼로를 옆에 앉히고 이륙을 기다리는데 예정 시간 30분이 지나도록 비행기가 뜰 줄 몰랐다. 화가 나려는데 기내 방송이 나왔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좌석 표와 승객 수를 아무리 맞춰도 한 명이 부족해서 체크하다 늦었습니다. 승객 중에 첼로가 있어서 생긴 착오였습니다. 이제 곧 이륙하겠습니다.' 방송을 들은 명화씨는 얼굴이 빨개졌다고 했다.
인생에서, 일상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독주자로서 정트리오라는 유명세가 굴레는 아니었나.
"한 번 했더니 어딜 가나 정트리오 연주를 해달라고 해서, 각자 커리어에 조금 방해가 되긴 했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트리오라고 하면 대중음악에서 주로 하던 거라 오해받지 않을까 우려도 있었다. 트리오는 1년에 1달만 하는 걸로 원칙을 정하니 독주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남매라고 해도, 예술가로서 질투나 경쟁심이 없을 수 없었을 텐데.
"어머니의 교육 철학 중 첫째가 '비교하지 않는다'였다.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활동하다 보니 외롭고 힘든 데다 주위에는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우리끼리 뭉쳐야 했다. 질투나 경쟁심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정명화는 "잘 비판할 줄 아는 것이 예술가를 동생으로 둬서 좋은 점"이라고 했다. "연주회에서 틀리면 본인이 더 잘 안다. 예민하다 보니 실제보다 10배, 20배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연주 끝나고 곧바로 '이거저거 틀렸더라'고 지적하면 불난 집에 부채질해서 온 동네로 불을 번지게 하는 격이다. 하루 이틀 지나 슬쩍 얘기해주는 게 좋다. 그런 마음을 서로 알고 있으니, 비판할 때 도움이 된다."
가족 얘기에 이르자 어머니 이원숙 여사(2011년 작고)에 대한 회고로 이어졌다. 명소(2007년 작고) 명근(73) 명화(71) 경화(67) 명철(1999년 작고) 명훈(62) 명규(60) 등 7남매를 키운 이원숙 여사는 지금도 회자되는 '예술 교육의 선구자'다. 1918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하고, 동덕여고와 이대 가정과에서 교편을 잡았던 이 여사는 7남매의 교육을 위해 참기름 장사부터 시작했다. 냉면을 팔고 양복점도 했다. 양송이 수출업으로 크게 성공할 무렵 명화씨에게 사준 것이 스트라디바리우스였다. ―어머니에게 배운 것 중 생활에 실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점이다. 7남매가 되다 보니 어머니가 일일이 봐줄 수 없었다. 어느 아이에게 어머니가 특히 필요한 시기가 되면 그 아이에게만 집중했다. 나머지 6명은 각자 알아서 지내야 한다. 그다음에 다른 아이에게 순서가 돌아갔다. 잘 살려면 인생 전체의 우선순위를 알아야 하고, 눈 뜬 당일의 우선순위를 파악해서 그것부터 잘해야 한다. 저의 변함없는 우선순위는 첼로 연습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것부터 한다. 나머지 일정은 거기에 맞춘다."
좋은 소리는 한 번 들어도 평생 가슴에―꼭 클래식을 배우고 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클래식을 듣는 귀가 트이면 마음이 트인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의 인생은 다르다. 많은 지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저 소리가 좋다, 저 음정이 끌린다고 귀에 잡히기 시작하면 벌써 절반 이상 도달한 것이다. 클래식은 나이가 들면 더 좋아진다. 일찍 귀가 트이면 그만큼 오래 삶을 풍요롭게 즐기게 된다."
―이벤트성 음악회 한두 번에 클래식이 가깝게 느껴질 수 있을까.
"뉴욕 줄리아드스쿨에서 사사하던 선생님이 워낙 바빠 레슨을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받았다. 그나마도 몇 음절 켜주고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그 소리가 내 마음에 영원히 새겨졌다. 특별한 소리는 가슴에 남는다. 작은 마을의 나이 드신 분들도 다 아시더라. 슈베르트 이름은 몰라도 선율은 가슴으로 알아본다. 귀를 타고났는데 접할 기회가 없어서 몰랐을 수도 있다."
―클래식 영재가 많아졌다. 50년 전에 비해 무엇이 바뀌었나.
"요즘 학생은 다들 테크닉이 좋다. 그런데 색깔이 없다. 유튜브에 전 세계 아티스트의 연주가 모두 올라와 있다. 그걸 흉내 내다가 자기 소리를 잃어버린다. 작곡가는 창조를 하지만 연주자는 재창조를 한다. 나만의 표현으로 재창조를 어떻게 하느냐가 연주자의 생명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터뷰 중 잠시 엿본 대가(大家)의 두뇌 역시 수학이 지휘하는 순열과 조합의 세계였다. 국내 최대 클래식음악축제인 대관령국제음악제(14일~8월3일) 예술감독이기도 한 정명화는 '망가진 일정 새로 짜기'가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고 했다. 한 연주자가 갑자기 불참하게 되면, 2주에 걸친 음악제 일정을 다시 짜야 한다. 수백 가지 경우의 수가 생기는 고난도의 수학이다. 참여 연주자들의 나이, 레퍼토리, 연주시간, 객석점유율, 해당 연주자의 앞뒤 일정 등을 모두 고려해 재배치해야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머리를 쥐어뜯을 상황인데 정명화는 "재밌어, 너무너무 재밌어"라고 말했다.
"첼로 연주도 똑같다. 오른손의 활을 어느 지점에서 어느 정도의 힘으로 켤 것인가, 왼손을 좀 더 내려가서 짚을까, 올라올까, 힘을 어디에서 줬다 뺄까 등등 여러 경우와 확률을 순간적으로 조합해서 최상의 음을 만들어 낸다."
"아무리 공부를 안 해도 수학은 늘 100점이었다"는 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뭔가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고 싶나.
"첼로를 하되, 더 일찍 시작하고 싶다. 요요마는 다섯 살에 시작했으니, (내가 시작했던) 열한 살에는 이미 지독하게 활이 몸에 밴 나이였다. 나도 그 시절치고는 일찍 시작한 편이지만 그래도 좀 더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을걸."
―은퇴를 생각하고 있나.
"연주자로서는 은퇴할 날이 가까워졌다. 첼리스트는 허리 디스크가 고질병이다. 다리 사이에 첼로를 감싸고 정확하게 활을 그으려면 약간 비뚜름하게 힘을 줘야 해서 몸이 어긋난다. 피아노가 그 점에서는 제일 좋다. 똑바로 앉아서 하면 되니 아흔까지 끄떡없다."
―나이가 들면서 달라진 것은.
"순간에 몰입해야 느낌이 모인다는 강박을 버렸다. 예전엔 연습에 한번 들어가면 전화도 받지 않고 화장실도 안 갔다. 지금은 조금 연습하다 딴 일 하다 다시 연습해도 집중이 잘 된다. 언제든 끌어모을 수 있는 유연함이 생겼다. 예전보다 아는 게 많아져서 만족감을 갖기 힘들어지는데도 옛날 내 음반을 듣다가 '어, 이거 꽤 잘했는데'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나 자신을 이 나이에 재발견한다."
오후 6시 30분 칠순 대가(大家)는 저녁 약속에 맞춰 일어섰다. 커다란 물방울무늬가 선명한 블라우스로 바꿔 입으니 환갑 아래로 보였다. 비결을 물었더니 세월은 속일 수 없다는 듯 눈가의 주름을 가리켰다.
"그나마 드보르자크 때문인가… 같은 음악만 오십 년 넘게 연주했더니 시간이 어느쯤에서 멎었나 보네, 하하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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