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심과 상관없는 스토리, 어려운 용어
국어 잘해야만 풀 수 있어 선행 부채질
학교 생활 등 ‘생활 속 수학’ 필요해
올해 초등학교 전 학년 수학 교과서에 스토리텔링(이야기하기) 방식이 도입됐다. 2013년 초1~2 수학 교과서를 개편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에 3~4학년, 올해 5~6학년 교과서까지 모두 개편됐다. 숫자와 부호가 아닌 그림과 이야기로 수학을 친근하고 재미있게 가르치겠다는 것이 스토리텔링 수학 교과서의 도입 의도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이라는 형식에만 치중해 억지로 이야기를 끼워 맞추다 보니 오히려 수학에 대한 흥미를 잃게 하고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스토리텔링 수학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을 짚어봤다.
이제 가나다 배웠는데 독해하라고?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1단원. 1부터 9까지 숫자 세는 법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교과서가 개편되면서 추가된 스토리텔링 내용은 이렇다.
외계인이 우주선을 타고 우리가 사는 지구로 와서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학교에 들어가니 선생님께서 자·가위·풀·색종이·클립과 같은 준비물을 바구니에 담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외계인이 옆 친구와 부딪혀 바구니를 엎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직 수를 알지 못하는 외계인이 옆 바구니에 있는 준비물을 보며 나무 막대에 눈금을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자는 1개니까 눈금 1개, 가위는 2개니까 눈금 2개, 풀은 3개이니까 눈금 3개, 색종이는 4장이니까 눈금 4개, 클립은 5개니까 눈금 5개를 표시했습니다. 이제 외계인은 나무 막대에 표시된 눈금을 보면서 준비물을 바구니에 담으려고 합니다. 외계인은 엎어진 준비물을 잘 담을 수 있을까요?
위 내용에 대해 온정덕 경인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문제 풀이와 관계없는 스토리를 장황하게 늘어놔 아이들이 핵심 정보에 집중하기 힘들다”고 평했다. 어휘의 수준도 지적했다. “눈금, 외계인, 우주선, 클립 등은 저학년 학생의 경우 ‘모두가 다 안다’고 생각하기 힘든 수준의 용어”라고 말했다. 국어 시간에는 ㄱ, ㄴ, ㄷ을 익히고 있는데 수학 시간에는 350개 글자로 된 문장을 이해한 뒤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다.박경미 홍익대 수학교육과 교수는 “수학 교과서가 수준 이상의 어휘 능력을 요구한다”며 “사교육에 더 의지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학부모들의 불만도 크다. 초1 아들을 둔 학부모 심진영(40·인천 부평구)씨는 “아이가 한글을 못 떼고 학교에 들어갔다. 국어 시간에는 기초 한글부터 찬찬히 가르쳐주니까 괜찮은데 수학 시간에는 적응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 단원 스토리텔링, 교실에선 사족
스토리텔링 수학 교과서는 매 단원 시작 부분에 6~7쪽 분량의 그림이 들어있다. 그림을 보며 교사와 학생이 수학적 개념을 활용한 이야기를 창작하면서 단원에 대한 흥미를 높이라는 의도다. 몇몇 단원엔 그림과 이야기가 함께 수록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단원엔 그림만 있다.
많은 교사들은 “단원의 도입 부분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오히려 수학 수업의 집중력을 깰 때가 많다”고 주장한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수석교사는 “한 단원을 보통 8~10차시에 걸쳐 수업하는데 매 수업마다 이전에 만든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고 뒤를 이어 창작을 해야 한다”며 “이야기 만들다 정작 수학 수업은 시작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대부분 교사들은 “스토리텔링을 해야 하는 그림은 건너뛰고, 바로 개념 설명과 계산 연습을 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한 교수는 익명을 원하며 “교과서에 과도하게 스토리텔링을 끼워 넣은 측면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집필진 사이에서도 ‘학년과 단원에 따라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며 “당시 교과부(현 교육부) 지침에 ‘모든 학년, 모든 교과에 스토리텔링을 접목하라’고 돼 있어 그 요구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자연스러운 실생활 에피소드 많아야
강문봉 경인교대 수학교육과 교수는 “스토리텔링 수학 교과서는 수학적 사고력 향상과 동떨어져 있다”며 “스토리 전달에 집중하다 보면 학생들은 수학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만 기억하게 돼 수학 교육의 본질이 빠져버리게 된다”고 말했다. 또 “수학 교과서에 필요한 건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수학적 상황 제시”라고 지적했다.
학생들의 일상 생활이 고스란히 담겼다. 2학년 교과서에는 천문학·음악·컴퓨터 등 실제 학교에서 참가하는 동아리 활동이 예시로 실렸다. 그래프를 통해 각 동아리별 남녀 학생 수를 제시하고 ‘이번 답사에 여학생 5명과 남학생 6명이 결석한다. 참가할 남녀 학생 수를 구하라’는 게 덧셈과 뺄셈 문제다.
미국은 체험을 통해 수의 개념을 가르친다. 미국식 외국인학교인 청라달튼스쿨의 심옥령 초등학교 교장은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교구를 가지고 놀게 하고 교사가 적절한 학습 과제를 주면, 금방 덧셈의 개념을 깨닫고, 곱셈의 원리까지 터득해간다”며 “교구를 가지고 노는 경험을 통해, 구구단을 외우지 않고도 곱셈과 나눗셈을 할 수 있게 가르친다”고 설명했다.
류희찬 한국교원대 수학교육과 교수는 “현대 사회가 갈수록 복잡해지면서 비판적 융합적 사고력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어서 수학에도 스토리텔링 교육이 필요하다는 취지에는 동의한다”면서도 “새 교과서의 경우 교육방식이 급히 도입되면서 스토리텔링의 기본 취지를 살리지 못해 안타깝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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