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녀 모두 미 명문대 출신 황경애식 자녀교육 |
넉넉지 않은 형편에, 세 아이를 모두 미국 명문대에 보낸 어머니가 있다. 비결을 물었다. |
꼭 거짓말 같다. 여기 삼 남매가 있다. 큰딸은 보스턴대학에 입학했다.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美 국무성에 취직했다. 둘째인 아들 또한 보스턴대학에서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이후 하버드 대학원을 거쳐 외교관이 됐다. 막내딸은 장학금으로 하버드대에 들어가 우등으로 졸업했다. 지금은 전 세계를 돌며 봉사활동에 푹 빠져 있다. 셋은 못하는 운동도 없고, 악기도 다 다루고, 친구도 많다. 이쯤 되면 이들의 어머니가 궁금하다. 주인공은 황경애(55) 씨. 무소불위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냐, 아니다. 싱글맘인 데다,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 살았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키웠습니까?” 아무래도 극성이 대단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예상은 빗나갔다. 공부하라는 소리를 단 한 번도 안 했단다. “그보단 공부하는 환경을 만들었어요. 애들은 시키면 하기 싫어해요. 그저 엄마를 보고 따라오게 하는 거예요. 공부하라고 닦달하기보다, 제가 먼저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준 거죠.” 도서관을 놀이터처럼 활용한 것도 그래서다. “특히 도서관에 자주 갔어요. 글도 모르는 애들을 데리고요. 그냥 거기서 노는 거예요. 그럼 애들이 책을 들고 거꾸로 막 읽어요. 흉내 내는 거죠. 집에 오면 그림책을 갖고 와서 자기가 막 읽어줘요. 글을 못 읽으니까 내용을 지어서요. 하하. 그렇게 책과 자연히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도서관뿐이랴. 미술관을 데려가고, 음악회에 같이 갔다. 그랬더니 “나도 저런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고,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스스로 하고 싶은 걸 얘기하기 시작했다. 팍팍했던 삶 세 자녀가 받은 장학금만 2백만 달러(약 22억원)다. 이런 사례는 미국에서도 기적이라 손꼽힌다. 물론 매번 잘하진 않았다. 빗나간 적도 있다. “반항할 때도 있었죠. 애들이 아버지 없이 자랐어요. 그러다 보니까 사춘기 때 그 설움을 저한테 다 뱉었죠. 공부는 뒷전이었어요. 나가서 놀기 바빴어요.” 황 씨는 경북 경주에서도 좀 더 들어간 깡촌 출신이다. 당시 공부를 썩 잘해 지방의 한 간호대를 졸업했고, 급기야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벌써 30년 전의 일. 그곳에서 세 아이의 아빠를 만났다. 좋은 사람 같았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애를 세 명이나 낳았으니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었겠어요. 공부에 대한 꿈을 접게 된 거죠. 대신 또 다른 꿈을 키웠어요. 아이들을 잘 키워보자는.” 황 씨 부부는 미국에서 목회를 했다. 청소년 목회를 하며, 술과 마약에 찌들어 교도소를 전전하는 아이들을 보살폈다. 보살피던 아이에게 칼을 맞을 뻔한 적도 있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애 아빠가 갑자기 집을 나갔어요. 국제 사기단에 크게 당한 거죠. 교회는 박살 났고요,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고요.” 그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기분이었다”고 했다. 세 아이는 모두 두 살 터울인데, 당시 막내의 나이가 10살. 황 씨는 38살이었다. 세 아이와 함께 남겨진 그에겐 5달러도 없었다. 가난이 닥쳤다. 모두가 비웃었지만, 꿈꾸다 “그래도, 그래도요. 실패자라는 낙오는 찍지 말아야겠다 싶었어요. 실패했을 때 좌절하면 영원히 실패자죠. 그런데 뚫고 나가든지, 뛰어넘으면 위기를 극복한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오랫동안 목회만 했던 그에겐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청소는 잘했고, 밥도 잘 지었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청소를 해주겠다, 직원들 밥도 해주겠다는 식으로 한 회사에 들어갔어요.” 머물고 있던 애틀랜타의 한 교민 방송국이었다. “워낙 작은 조직이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가족처럼 일했죠. 조직이 워낙 작으니, 한 사람이 비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대신해야 했어요. 어느 날은 작가가 펑크를 냈는데, 밥을 짓다 말고 제가 스크립트를 쓴 적이 있었어요. 하하. 글 쓰는 걸 워낙 좋아했었는데, 한 번 맡기더니 맘에 들었나 봐요. 하나씩, 하나씩 맡기기 시작하더라고요.” 낭중지추.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식당 아줌마’로 들어가 서브 작가가 됐고, 광고와 마케팅을 했고 프로그래밍까지 맡았다. 그렇게 1년 만에 부사장이 됐다. 이후 매일 3년간 토크쇼 생방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람이 난관에 부딪치면 잠재의식이 나오더라고요. 외국에 나가 있는 교민들의 향수를 제가 누구보다 잘 알았던 거예요. 그런 걸 자극해 반응이 좋았던 거죠.” 한때 방황하던 아이들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잔소리 한번 하지 않았어요. 애들은 속을 썩일 수밖에 없어요. 그때 샌드백 역할을 해야 해요. 샌드백은 맞으면 튕기지 않아요. 안의 무거운 모래가 반동을 흡수하잖아요. 제가 안 받아주면요? 애들이 튕겨 나가버리죠. 기다리면,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반항하던 아들이 어느 날 말했다. “공부하기 싫다고 하더라고요. 사업을 하겠대요. 그럼 가게에서 일해보라고 했어요. 그렇게 한 달 동안 액세서리 가게에서 일을 시켰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또 자기는 딴 꿈을 찾았대요. 가수가 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 가수해라, 그래서 오디션도 봤어요.” 결국 아들의 입에서 “공부가 젤 낫네”라는 말이 나왔다. 정해진 틀대로 직진을 한 게 아니라 지그재그로 걷도록 했다. 이것저것 다 해보게 하니까 스스로 정말 하고 싶은 한 가닥을 뽑아내더라. “공부하라는 소리 대신 ‘박물관 가자’, ‘공원 가자’, ‘스키 타러 가자’는 소리만 했더니 애들이 공부는 알아서 하고요. 더불어 역사, 생태, 운동과 같은 분야도 어느 정도 깨우치더라고요.” 물론 한창 일을 하던 시기엔 외할머니가 아이들을 대신 봐줬다. “그때 애들 옆에 있어주지 못한 게 지금도 미안하지만, 애들은 오히려 저를 위로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 탓 아니라고요.” 황 씨는 “아무래도 아주 어릴 때 항상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게 애착 형성에 크게 작용한 것 같다”고 했다.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거든요. 정서적으로 안정시키고, 자존감을 강하게 만든 거죠. 엄마가 옆에 있다는 건 든든하다는 거거든요. 든든한 지원자가 옆에 항상 있다는 걸 어릴 때부터 각인시켜준 거예요.” 그는 현재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자녀교육에 대한 강연을 한다. 총 40개국에서 2천5백 회 정도했다. “어느 지역이든, 엄마 맘은 다 같더라고요. 애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해요. 예술이라든가, 여행이라든가, 삶에서의 균형을 가지도록 도와줘야 한다고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여러 관심사를 두드려주라고요.” 황 씨는 “아이가 좋아하는 걸 찾을 때까지 응원하는 게 엄마의 역할”이라면서 “아이들이 큰 꿈을 꿀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 씨의 학창시절은 어땠을까. 그는 친구들에게 “허황된 꿈을 많이 꾼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TV도 귀하던 시절, 그것도 깡촌에서 “언젠가 TV에 나오겠다”는 말을 했고, “세계여행을 하겠다”, “백악관에 가보겠다”는 꿈을 얘기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땐 “미쳤다”는 소릴 들었지만, 지금은? 모두 이뤘다. 토크쇼 진행을 하며 TV에 나왔고, 강연을 위해 전 세계를 여행한다. 국무성에서 일하는 딸 덕택에 백악관에도 네 번이나 갔다. 그는 지금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아들을 미국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 “지금 이 얘기 들으면 기분이 어떠세요? 솔직히. 다들 미쳤다고 하겠지요? 하하.” ‘난 여태 뭐 했지?’ 황 씨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솔직히 잠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금 나와라 뚝딱도 아니고, 바라는 대로 다 이루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한데 답은 단순했다. 바라는 게 있으니까. ‘꿈’이 있으니까 이룰 수 있었던 거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잠시 접어뒀던 ‘나의 꿈’도 다시금 펼쳐보고 싶어졌다. 여성조선 |
2015년 7월 7일 화요일
꿈꾸는 엄마가 기적을 만든다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