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7일 수요일

"한국 과학, 눈앞 성과보다 사람 키우는데 집중을"

[세계최대 기초과학 연구회 獨 막스플랑크 스트라트만 이사장]

- 과학도 사람의 일
人材 잘 뽑고 자율성 보장땐 훨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

- 과학이 獨 통합에 기여
동독에 많은 연구소 설립, 경쟁력 갖춘 도시들 키워

105년 역사를 지닌 세계 최대의 기초과학 연구집단 '막스플랑크 연구회(Max Planck Gesellschaft)'는 독일을 과학기술 강국으로 만든 주춧돌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등 현대과학의 핵심이론들이 막스플랑크 연구회와 그 전신(前身)인 카이저 빌헬름학회에서 완성됐다. 3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노벨상 사관학교'이기도 하다.

기초학문만을 다루는 거대(巨大) 집단이 100년 넘게 세계 최고를 지켜온 원동력은 뭘까. 독일 뮌헨에서 만난 마르틴 스트라트만 막스플랑크 연구회 이사장은 "과학은 사람이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스트라트만 이사장은 재료의 부식(腐蝕)을 연구하는 '부식화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막스플랑크 강철연구소 소장을 맡으며 한국의 포스코와 오랜 기간 공동연구를 진행한 지한파(知韓派)이기도 하다.

―막스플랑크 연구회는 성격이 다른 80개가 넘는 연구소들이 모여 있다. 잡음 없이 이끌 수 있는 철학이 있는가.

"'지원하지만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우리의 역할은 과학의 최전선에서 과학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기초과학은 돈을 주고, 자율성을 보장하면 획기적인 연구성과가 나온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구성원들이 세계 최고의 과학자여야 한다는 점이다."

독일의 기초과학 연구집단 ‘막스플랑크 연구회’의 마르틴 스트라트만 이사장은 “빨리빨리 앞으로 가려고만 하지 말고 충분한 시간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국의 기초과학이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 독일의 기초과학 연구집단 ‘막스플랑크 연구회’의 마르틴 스트라트만 이사장은 “빨리빨리 앞으로 가려고만 하지 말고 충분한 시간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국의 기초과학이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막스플랑크 연구회 제공
―독일은 지속적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늘렸다. 심지어 유럽발 금융위기 시절에도 기초과학 예산이 늘었다.

"어느 정치인이나 관료도 우리 연구회에 딱 한 가지만 주문한다. '최고 수준의 과학자를 데려다가 최고의 연구를 하라'는 것이다. 그게 독일이 과학으로 선진국의 위치를 유지하는 이유다. 독일사회 구성원들은 기초과학과 과학 교육에 대한 투자가 궁극적으로 경제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기초과학이 정말 돈이 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분명히 돈이 된다.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원천기술과 특허를 보유하고 있고, 기업은 이를 사용해 오늘의 독일을 만들었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것들은 미래 산업을 만들어낼 것이다. 교육 기능도 중요하다. 최고의 학자들에게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매년 수천명 배출된다. 독일의 산업 경쟁력 역시 우리 연구회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통독(統獨) 이후 사회통합 과정에서 연구회의 역할이 컸다고 들었다.

"동·서독은 경제 규모의 차이가 컸다. 통일 이후 연구회는 동독 지역에 수십개의 연구소를 세워 대학, 기업, 인재를 키웠다.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은 이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도시로 성장했다."

―한국의 통일에도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독일과 한국은 상황이 좀 다르다. 동독은 동구권의 과학기술을 이끈 맹주였고 서독보다 앞선 분야도 있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 역시 동독이 키워낸 과학자 아닌가. 반면 북한은 현재 과학자를 만나기도 힘들고, 어떤 연구를 어떤 수준에서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동·서독은 통일 직전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남·북한도 통일에 대비하려면 서로를 알아야 한다."

―막스플랑크 연구회는 박사과정 학생의 50%, 박사후연구원의 75%가 외국인이다. 전 세계에서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는 비결은 뭔가.

"우리가 세계 최고라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처우, 장비, 자율성 등 모든 측면에서 가장 좋은 조건이다. 또 독일어만 고집해서는 해외 인재를 유치하기 힘들다. 현재 과학의 세계에서 공용어는 영어다. 우리는 내부 연락과 의사소통은 물론 계약조차 영어로 한다.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도 많다. 한국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한국의 기초과학연구원(IBS)은 막스플랑크 연구회를 모델로 세워졌다. IBS가 최고 수준의 연구를 하기 위해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과학을 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의 과학기술은 초점이 주제(과제)에만 맞춰져 있다. 사람을 뽑은 다음에도 항상 제안서를 요구하고 심사하고, 평가한다. 매년 계획을 새로 수립하고 빨리빨리 앞으로 가려고만 한다. 하지만 장담하는데 사람만 잘 뽑고, 시간과 자율성을 보장하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위험해 보이지만, 기초과학은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발전한다."

☞막스플랑크 연구회

1911년 설립된 카이저 빌헬름 학회를 1948년 확대·재설립한 독일의 기초과학 총괄 기구. 양자역학의 개념을 주창한 물리학자 막스플랑크(1858~1947)의 이름을 땄다. 독일 전역과 미국, 이탈리아, 브라질, 한국 등에 83개의 연구소를 운영한다. 연간 3조원의 연구비를 지원하며 2만명의 과학자와 학생들이 매년 1만3000편의 논문을 쏟아낸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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