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0일 목요일

대구의 友弦書樓



사람을 교육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두 가지 방법의 결합이 아닐까 싶다. 하나는 '독만권서(讀萬卷書)'이고, 다른 하나는 '행만리로(行萬里路)'이다. 만권의 책을 읽고 그다음에는 만리를 여행해 보는 것이다. 책을 안 보고 여행을 하면, 나와 세상 사이에 스파크가 덜 튄다. 나와 세상이 부딪쳐서 일어나는 스파크가 공부가 되고 내공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스파크 없으면 공부 안 된다. 우선 책을 많이 보아야 한다.

구한말에 나라가 망하는 조짐이 보이자 대구의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 선생은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세워 인재양성을 꾀하였다. 이일우는 구한말 대구 갑부였던 '이장가(李莊家)'의 후손이었다. 이 집안의 1400석 재산 가운데 반절은 주변 친척 자손들의 장학금으로 내놓고, 반절은 우현서루를 운영하는 데에 투입하였다. '나라가 없으면 지방 토호의 재력 따위는 한 줌 티끌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현서루는 단순한 책방이 아니라, 수천 권의 책이 구비된 사설 도서관이었다. 여러 사람이 와서 책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숙박시설도 갖춰진 도서관이 우현서루였다.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은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간에 공짜로 머무르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책을 제대로 보려면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진득하게 먹고 자면서 눌러앉아 있어야 한다. 대구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뜻있는 지사(志士)들이 우현서루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하루 평균 외부 방문객이 20명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우현서루는 애국지사들의 아카데미이자 살롱이었던 셈이다.

우현서루를 출입하며 인연을 맺었던 저명인사의 숫자가 150명 정도 되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던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 상해임시정부의 박은식, 초대 국무령 이동휘, 몽양 여운형 등등이 그들이었다. 우현서루는 6~7년 정도 운영되다가 1910년 무렵에 일제에 의하여 강제 폐쇄되었다. 이 집안의 후손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국군 중장을 지낸 이상정,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시인 이상화, '이조 건국의 연구'와 IOC 위원을 지낸 이상백, 우리나라 수렵의 제일인자로서 '세계명포수전'을 쓴 이상오 형제이다. 팔공산 비슬산의 정기가 뭉쳐 있는 대구에 누가 또다시 우현서루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의부(義富)는 없는가?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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