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0일 목요일

새 입자 ‘힉스’ 아닐 땐 되레 더 중요한 발견


거대강입자충돌기 안에서 거의 빛의 속도로 가속하던 양성자들이 무더기로 서로 맞부딪힐 때 무수한 입자 신호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림은, 충돌 순간에 엄청난 고에너지 상태가 만들어지고 ‘어떤 새로운 입자’가 생성됐다가 두 개의 제트(Z) 보존(약한 핵력을 매개하는 입자)으로 붕괴하고 다시 이들이 각각 2개의 전자(녹색선과 녹색막대기)와 2개의 뮤온 입자(적색선)로 붕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붕괴의 경로를 일으키는 것은 힉스 입자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림은 2012년 CMS 검출장치에 기록된 질량중심에너지 8테라전저볼트(TeV)의 양성자-양성자 충돌 사건의 예. 출처/ CERN, CMS

[사이언스온]

‘심증’은 그야말로 굳건해 보였다. 새로 발견한 입자가 오랫동안 찾아왔던 힉스 입자(Higgs boson) 바로 그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듯했고, 설사 그렇게 한마디 덧붙여도 아주 막나간 얘기라고는 말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만큼 완전한 물증이 없을 뿐 ‘상당한 물증과 굳은 심증’은 있는 듯했다. 그런데도 7월4일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거대강입자충돌기(LHC)에서 힉스 입자를 찾고 있는 입자물리학의 두 실험그룹이 내놓은 공식 발표문은 ’힉스 입자에 부합하는(consistent) 새 입자를 발견했다’고만 표현했다.

그러나 이날 발표회장 안팎의 분위기는 이런 발표 내용을 앞질렀다. 두 실험그룹이 거대강입자충돌기의 무수한 양성자-양성자 충돌 데이터를 관측하고 분석해 발표한 자리에서 이론물리학자인 피터 힉스 박사는 “내 생애에 믿기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며 감회에 젖었다. 힉스 박사는 우주 만물의 물질과 기본 힘을 설명하려면 힉스 입자라는 가설적 입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이론을 제시한 물리학의 대가이니, 그의 말은 이번 발표를 ‘사실상 힉스 입자 발견’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내의 한 물리학자도 “사실상 힉스 입자를 발견했다고 선언한 것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라고도 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결과는 크나큰 발견을 기대했다가 허탈감만을 준 지난해 12월의 발표 때와는 크게 달랐다. 당시에도 거대 강입자 가속기에서 연구하는 두 실험그룹인 시엠에스(CMS)와 아틀라스(ATLAS)가 힉스 입자가 존재할 수 있는 고에너지의 질량 구간을 제시해 ‘힉스 사냥’의 포위망을 크게 좁혔지만, 당시의 데이터와 분석결과가 지닌 통계학적 확실성은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통계적 확실성을 보여주는 개념인 ‘시그마’의 수준으로 얘기하자면, 당시에는 2, 3시그마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이번 발표는 무려 5시그마 수준으로 매우 높은 확실성을 갖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발표문의 여러 대목에서 ‘5시그마 수준의 신호를 관측했다’는 말이 강조됐다. 1시그마는 데이터에서 통계학적 요동이 상당히 큰 수준을 뜻하고 3시그마는 어떤 현상이 관측됐다고 말하는 수준을 뜻하는 데 견줘, 5시그마는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확실성을 뜻한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이번 발표에서 ‘힉스 입자 발견’ 얘기가 나올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발표는 ‘마침내 힉스 입자를 발견했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입자를 발견했다” 또는 조금 더 해석을 덧붙여 “힉스 입자와 부합하는(consistent) 새 입자를 발견했다”는 데 그쳤다. 왜 높은 통계학적 확실성을 갖춘 자료를 손에 들고서도 두 실험그룹은 ‘힉스 입자 발견’의 선언을 나중으로 미루었을까?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시엠에스 실험그룹은 이번에 한글판 보도자료도 내었다. 그 자료를 읽어보면, 힉스 입자 발견의 ‘심증’을 매우 굳게 하지만 또한 힉스 입자 발견을 선언하기 힘들게 한 실험결과의 의미와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시엠에스 실험그룹의 한국 대표인 박인규 서울시립대 교수와 이론물리학자인 박성찬 성균관대 교수한테 왜 ‘힉스 입자’가 아니라 ‘힉스 입자로 보이는 새로운 입자’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들어보았다.
◊… “만물에 질량을 부여한다?” 힉스 궁금증 문답
◊… 힉스 어떻게 찾았을까? (박성찬 교수 블로그)


“중요한 용의자를 잡았다, 그러나…”

박인규 교수는 이런 비유를 썼다.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용의자를 검거한 겁니다. 그렇다고 그가 곧바로 범인으로 입증된 건 아닙니다. 용의자가 범인의 인상착의와 비슷한지, 알리바이가 있는지 등을 따져봐야지요. 지금 발견한 것은 새로운 입자입니다. 그것이 표준모형이 예측하는 힉스 입자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 또는 표준모형이 예측한 입자와는 다른 입자인지, 이런 것을 따져봐야 합니다.”

실제로 이번 두 실험그룹의 관측결과에서 이전에 관측되지 않았던 새로운 입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매우 튼튼한 데이터의 근거를 갖추고 있다. 서로 다른 두 실험그룹에서, 그리고 각자 실험그룹 안에 있는 여러 검출장치들에서 125~126 기가전자볼트의 질량을 지니는 어떤 입자의 존재가 새롭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시엠에스 실험그룹은 “126.5 기가전자볼트의 질량 구간 부근에서”, 아틀란스 실험그룹은 “125 기가전자볼트의 질량 구간 부근에서” 이 새로운 입자의 존재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힉스 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때에 예측되는 입자 붕괴의 ‘배경사건’의 양을 훌쩍 뛰어넘는 ‘잉여사건’이 실측 데이터에서 나타났으며(아래 그림), 이런 입자 붕괴의 경로를 추적해보면 125, 126 기가전자볼트의 질량을 지니는 어떤 입자가 존재했음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경사건만으로 통계적인 요동에 의해서 이 정도 또는 그 이상의 특별한 일이 나타나는 것은 300만 번 중 1번 정도로 희박하다”고 하니, 그런 5시그마 수준의 신호들은 새로운 입자의 존재를 확연히 보여주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발견된 입자가 바로 힉스 입자 그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 박인규 교수는 새로 발견된 입자가 힉스 입자로 지목되기 전에 규명되어야 하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 양성자와 양성자가 충돌해 생긴 엄청난 고에너지 상태에서 힉스 입자가 생성되었다가 곧바로 다른 여러 입자 종들로 붕괴하는데,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에서는 이 때에 힉스 입자는 고유한 입자 종별 붕괴비율(붕괴율)에 따라 붕괴한다고 예측하고 있다. 즉, 힉스 입자는 광자(감마선) 2개로 붕괴하거나, 먼저 제트(Z) 보존 입자로 붕괴했다가 다시 4개의 전자 또는 뮤온 입자로 붕괴하는 식이다. 또한 거기에는 입자 종별로 일정한 비율이 있다. 이런 붕괴의 길(붕괴경로/붕괴채널) 가운데 다섯 가지 경로가 이번 거대강입자충돌기 실험의 검출장치에서 탐색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시엠에스 실험그룹의 관측결과의 경우에, 두 가지 붕괴경로(광자로 붕괴하는 경로와 제트 보존으로 붕괴하는 경로)에서는 힉스 입자의 붕괴율 특성이 관측되었지만 다른 세 가지 붕괴경로(더블유 보존으로 붕괴하는 경로, 바툼쿼크로 붕괴하는 경로, 타우로 붕괴하는 경로)에서는 힉스 입자의 붕괴율이 제대로 관측되지 않았다 (이 세 가지 붕괴경로에서는 여러 잡음 신호들이 많거나 원래 검출하기가 아주 힘든 중성미자(2차붕괴로 생성)가 나타나기 때문에 붕괴율의 실측이 쉽지 않다고 한다). 박 교수는 “새로운 입자가 표준모형에서 제시하는 힉스 입자임이 입증되려면 표준모형이 예측하는 붕괴율이 실제 일어나는지 관측되어야 한다”며 “다른 세 가지 경로에서도 힉스 붕괴율이 나타나는지는 앞으로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힉스 입자라면 당연히 지녀야 한다고 표준모형이 예측되는 또다른 성질도 확연하게 관측되어야만, 새로운 입자가 힉스 입자인지 아닌지가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성질 중 하나가 ‘스핀’이다. 스핀은 양자역학에서 입자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각운동량의 값을 말하는데, 예컨대 전자는 2분의 1 스핀을 지니며 광자는 1의 스핀을 지닌다. 박인규 교수는 “표준모형에서 힉스 입자는 스핀 값이 0인 것으로 예측되는데, 이번 시엠에스 실험에서는 새로 발견된 입자가 (힘을 매개하는) 보존이라는 것, 그리고 스핀이 1이 아닌 것으로는 나타났지만 스핀 값이 0인지는 확인되지 못했다”며 “과연 새로운 입자의 스핀 값이 0인지 확인하려면 힉스 입자가 붕괴한 이후에 생성되는 입자 종들이 어떤 방향으로 날아가는지 그 검출된 각도들을 계산해서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부분도 역시 아직은 분명한 결론을 얻지 못했다.

그는 “이밖에 스핀 값이 0인 힉스 입자라면 반전성(parity)이라는 대칭성의 성질도 지녀야 하는데 아직 이런 부분도 확실히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입자가 힉스 입자로 입증됐다고 말하기는 이르다”고 말했다.

“새 입자가 힉스이건 아니건 파급력 클 것

새로운 입자는 지금으로선 대체로 표준모형이 예측하는 힉스 입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이다. 이 때문에 이 입자가 과연 우주 만물이 질량을 지니게 된 근원을 설명할 수 있는 힉스 입자인가 아닌가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과연 ‘신의 입자’로 불리는 힉스 입자는 마침내 발견될 것인가?” 하는 관심사이다.

그렇지만 입자물리학자들은 새로운 입자가 힉스 입자이냐 아니냐를 넘어서서, 사상 최대의 고에너지 실험장치인 거대강입자 충돌기에서 지금까지 관측되지 않았던 새로운 입자가 발견됐다는 사실 자체에 더 크게 흥분하고 있는 것 같다. 박인규 교수는 “거대강입자충돌기가 올해 말까지 가동하면 현재 얻는 충돌 데이터보다 3배나 더 많은 엄청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며 “그렇게 되면 새 입자가 표준모형이 말하는 힉스 입자의 성질을 온전히 지니고 있는지, 아니며 표준모형이 예측하지 못한 다른 성질을 지니는지, 또는 전혀 다른 입자인지에 관해 지금보다 더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일 표준모형이 예측한 힉스 입자의 성질이 확인된다면, 그야말로 이론으로 예측한 가상 입자를 실제로 발견함으로써, 이론물리학이 이룬 표준모형의 승리를 자축하게 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몰랐던 힉스 입자의 세부적인 성질을 더 파악함으로써 표준모형의 이론체계를 훨씬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표준모형의 예측과는 다른 힉스 입자의 성질이 드러난다면, 더 나아가 표준모형에서 쉽게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성질의 입자로 판정된다면, 실제의 우주 만물의 물질과 기본 힘의 상호작용은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이 설명하듯이 그리 단순하지 않으며 훨씬 더 까다롭고 복잡한 체계임을 드러낼 수도 있다. 박인규 교수는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물리학의 시대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면, ‘새로운 입자’는 힉스 입자로 입증될 때에만 중대한 발견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힉스 입증이 실패할 때에 훨씬 더 큰 파장을 물리학계에 던져줄 것이다. 새로운 입자가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건 이미 ‘흥분의 순간’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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