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0일 목요일

'빨리빨리 교육' 지고, 심화·통합학습 뜬다

'선행학습 효과 없고 부담만'… 무용론 대두
교과부, 학교 내 선행학습 요소 규제 검토
"성취평가제 확대되면 깊이 중심 학습 늘 것"

교육 트렌드
#1.
'2학기 전 과정 선행' '내신 대비 선행학습 특강' '2학기 성적 반전 절호의 기회'…. 여름방학이 다가오면서 학원 밀집가를 중심으로 이 같은 문구를 담은 대형 현수막이 속속 내걸리고 있다. 공통점은 너나 할 것 없이 '선행학습'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지난 5일 오후, 교육 관련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법률'(이하 '선행규제법') 시안 발표 공청회를 개최했다. 선행규제법의 골자는 '모든 형태의 선행교육(학습) 유발 행위는 법적으로 규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올여름, 교육계에 때아닌 ‘선행(先行)’ 논란이 잇따르고 있다. 흥미로운 건 선행규제법 제정 여부와 관계 없이 교육 전문가를 중심으로 ‘선행학습 무용론(無用論)’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대안으로는 ‘심화(통합·융합)학습’이 무서운 속도로 떠오르고 있다.

◇‘선행학습’과 ‘예습’은 엄연히 달라

‘학교에서 배울 내용을 미리 공부하면 진도 따라가기가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학부모가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박재원 비상교육연구소장에 따르면 이런 논리는 철저하게 사교육 시장이 만들어낸 것이다. “흔히 예습과 선행학습을 많이들 혼동하는데 둘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예습은 다음(혹은 다다음) 수업에서 배울 내용을 미리 살펴보는 것처럼 실제 학교 수업과 연계된 경우를 일컫는 말입니다. 예습의 교육적 효과는 더 말할 나위가 없죠. 하지만 학기나 학년을 몇 단계씩 건너뛰어 미리 배우는 건 학습 효과와 무관합니다. 아이들의 학업 부담은 오히려 가중되기 십상이에요. 현재 진도는 진도대로 기억해야 하고, 미리 배운 건 또 그 나름대로 잊지 말아야 하니까요.”

박 소장은 “개인 차가 있긴 하지만 배운 내용을 복습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 때 가장 높은 학습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학부모가 선택하는 자녀의 선행학습은 ‘(부모 자신의) 심리적 우월감 충족’ 외엔 무의미하다는 분석이다. 선행학습은 사교육 업자 입장에서 ‘최고의 사업 아이템’이기도 하다. 잘하는 아이든 못하는 아이든 ‘모르는 내용’인 건 매한가지이므로 독창적 커리큘럼 개발을 위해 딱히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 김승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실장은 “공교육의 한계와 학생 간 실력 차를 감안할 때 무분별한 선행학습보다 보충·심화학습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야구장에서 앞줄 관중이 일어나면 뒷줄 관중도 덩달아 일어납니다. 앉아서 봐도 충분히 즐겁고 편안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지만 모두가 서 있는 상황에선 도리 없이 자신도 일어설 수밖에 없는 구조죠. 선행학습도 마찬가지예요. 선행규제법은 ‘불필요하고 불편하다는 걸 알면서도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야구장’ 같은 교육계의 현주소를 바꿔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교과부 “성취평가제가 판도 바꿀 것”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는 지난 5월부터 전국 시·도교육청별로 교육과정 운영평가 점검단을 꾸려 각급 학교 중간·기말고사에서 현행 교육과정을 앞서는 문항이 출제되는지 여부를 실사(實査)해 왔다. 신문규 교과부 사교육대책팀장은 “일부 학교에서 변별력 확보 등을 이유로 상위 교육과정에 포함되는 문제를 출제하거나 방과후 학교 수업 때 선행 과정을 운영하는 등 선행 사교육을 부추기는 사례가 보고됐다”며 “사교육에서 이뤄지는 선행학습은 법적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아 함부로 관여하기 어렵지만 일단 학교 내 선행학습 요소부터 규제해 선행 유발 요인 자체를 막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 실장에 따르면 국내 교육계에서 선행학습 열풍이 불어닥친 건 특수목적고 설립 붐이 일었던 지난 2000년 전후다. “당시 성적이 상위 20% 이내인 중학생을 중심으로 선행학습이 유행하고 그 여파가 중·하위권으로까지 확산되며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현재 외국어고 입시의 경우, (선행이 필요한) ‘평가’ 대신 ‘영어 내신’만 반영하고 자율형 공·사립고에서도 심화 위주 평가가 이뤄지면서 입시에서 선행학습의 실질적 효과가 미미해졌는데도 선행학습 관행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변화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박재원 소장은 “최근 사교육 시장에서도 선행학습 무용론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면서 학교 교육과정에 맞추되, 학생별 심화학습에 초점을 맞추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신 팀장은 “내신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도를 보인 학생에게 동일 등급을 매기는 성취평가제 도입이 확대되면 불필요한 선행학습의 부작용도 점차 수그러질 것”이라며 “특히 수학의 경우 ‘스토리텔링 수학’ ‘실생활연계형 수학’ 등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앞으로는 ‘빨리’가 아니라 ‘깊이’에 무게 중심을 둔 학습 비중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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