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일 화요일

한 문제만 틀려도 안절부절 모범생 내 아이 인정중독?

올 2월 한영외고를 졸업한 김모(20)양은 손톱마다 피가 맺혀 있다. 자학의 상처다. 지난해 11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도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나는 놀 자격이 없다”며 손톱의 조피(큐티클) 부분 살을 뜯어댔다. 피가 나도 뜯고 또 뜯었다.

중학교 때까지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는 한영외고에 입학하면서 자신감이 무너져내렸다. 공부 잘하는 아이로 인정받던 그는 한영외고에서는 성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럴수록 더욱 공부에 집착했지만, 초조와 불안에 시달리면서 하는 공부는 효율적이지 않았다. 성적이 뚝뚝 떨어졌고, 결국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

김양은 인정중독증이다. 인정중독이란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에서 존재감을 찾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타인에게 인정을 받을 때 삶 전체가 행복하고 의미 있다고 느끼고, 반대로 인정받지 못하면 자신은 불행하고 살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 즉 자신이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삶이 아니라 타인이 좋다고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무석정신분석연구소 원장 이무석 박사는 “인정중독에 걸린 사람은 자신에게 가혹한 요구를 하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기 쉽고 완벽주의에 빠지기 쉽다”고 말했다.

인정중독 때문에 정신분석연구소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40년 가까이 정신분석 상담을 해온 이무석 원장은 “최근 들어 인정중독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었다. 예전에는 ‘빈둥지증후군’을 앓는 50~60대 여성이 주로 찾았다면, 최근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진다. 30대 중에도 인정중독으로 찾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정신분석연구소를 운영하는 정선주 원장은 소아정신과전문의다. 그 역시 최근 인정중독으로 고통받는 학생이 늘었다고 했다. “특목고나 명문대생 중에 인정중독이 많다. 명문대 출신의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의 경우 인정중독에 걸리기 쉽다.” 공부 잘하고, 성격 좋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모범생 중에 인정중독 잠재인자가 많다는 얘기다.

인간은 누구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 또 인정욕구는 꿈을 이루기 위한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인정욕구의 정도와 목적이다.

이무석 원장의 말이다. “인정욕구가 과도한 사람은 삶의 목적 자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데에 있다. 이런 사람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기 자신의 욕구를 억압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면 점점 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건 진정한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 욕구가 만족될 때 행복한 존재다. 인정에서 존재감을 찾는 사람은 어느 순간 무너져내릴 수 있다.”

인정중독의 양상과 원인은 다양하다. 양상은 나이대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사례를 보자.


사례 1. 초등학생 모범생 이모(13)군
증상 : 100점을 맞지 않으면 패닉상태가 된다. 98점을 맞은 뒤 본인이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고 생각해 집에 안 들어갔다. 최고가 되지 않으면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수면장애와 악몽이 잦았고, 불안감이 과도하다. 당연히 공부를 해도 집중이 안 됐다. 늘 잘한다는 칭찬만 받아서 누군가한테 혼나면 견디지 못하고,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양육 환경 : 아버지는 서울대, 어머니는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어머니는 아이가 본인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을 때에만 웃어 보였다. 엄마가 웃지 않으면 아이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사례 2. 대학원생(여·32)
증상 : 항상 웃고 화나도 다 참고 상대방에게 맞춰 주는 성향이다. 사람들에게 늘 좋은 모습만 보이며 이러한 모습으로 직장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긴밀하게 연락하는 친구가 없고, 직장 내에서도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동료가 없다. 타인의 시선에 매우 민감하여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보다는 타인에게 피상적으로 맞추는 성향이 강하다.

양육 환경 : 유년 시절 순한 아이로 재롱이 많고 착하며 애교가 많았다. 초등학교 6년 내내 우등상을 받았고 공부를 잘했다. 유년 시절부터 어머니와 관계에서 적절히 분화되지 못하고 어머니의 의견에 일방적으로 따르는 등 독립적인 자아가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례 3. 주부 김씨(60대)
증상 : 맏며느리로서 집안 대소사를 챙기며 성실히 살아왔다.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달달 볶았다. 1남2녀의 자녀를 키우면서 한 번도 아침밥을 굶긴 적 없고, 씀씀이 헤픈 남편을 대신해 경제권을 쥐고 알뜰살뜰 살아왔다. 세 자녀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좋은 엄마로 인정받는 것에서 존재감을 찾던 그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 ‘내 삶은 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살아온 생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양육 환경 : 유교적 가치관이 분명한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살았다.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포기하며 사는 것이 내재화됐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 ‘스마일 페이스 증후군’ 떨쳐버려야
인정중독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나 ‘스마일 페이스 증후군’과 겹치는 면이 있다. 늘 좋은 사람으로 비쳐지기 위해 일종의 위장을 하는 것이다. 이무석 원장은 “인정중독이 있는 사람은 인기가 많다”며 이렇게 말했다. “인정중독은 자신의 욕구는 뒷전이고 상대방의 요구와 욕구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착한 사람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 알 수 없는 우울감과 분노가 생긴다. 이런 얘기를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한테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실망할 거야’라고 생각하고 혼자서 삭이는 경우가 많다.”

인정중독은 여성이 많지만 남성도 예외가 아니다. 이영문 국립공주병원장은 “은퇴 이후의 남성들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은 인정해줄 대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면서 인정받으며 살아오다가 집에 돌아오면 자기가 없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 시대 아버지는 가정에 충실하지 않아 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 우울감을 겪으며 2차 알코올중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인정중독의 원인은 뭘까. 크게 두 가지다. 부모와 자식 간의 애착관계에서 비롯되고, 사회 구조적 문제가 인정중독을 강화한다. 정선주 원장은 “선행학습을 부추기는 한국의 교육제도도 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상담을 위해 찾아온 사람 중에 초등학교 6학년 모범생이 있었다.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슬럼프를 겪은 후 신경쇠약증에 걸렸다. 다른 아이들은 방학 동안 중학교 3학년까지 선행학습을 마쳤는데 자신만 추락하는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의 문제집 넘기는 소리가 공포스럽게 들리고 불안해서 공부에 집중을 못했다.”

전문가들은 인정중독의 가장 큰 원인은 부모의 양육태도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최고가 되지 않으면 칭찬해주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해 행동하고, 인정받을 만한 결과를 내지 못하면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이무석 원장은 “갑과 을의 사회구조가 인정중독증을 부추긴다”고 말했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서 무의식중에 ‘내 새끼는 갑이 돼야 해’라고 생각한다. 갑은 남들한테 인정받는 거다. 남들한테 인정받는 것의 가치를 높게 두는 사회, 그런 인간이 되라고 교육시키는 엄마가 인정중독을 강화한다.”

인정중독 진단법이 있을까? 인정중독은 양상과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일률적인 진단 잣대를 들이대기는 힘들다. 다만 공통분모가 되는 진단법은 있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절대적 대상의 존재 여부다. 절대적 대상은 전문용어로 ‘셀프 옵젝트(self object·자기 확신을 갖게 하는 대상)’라고 한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셀프 옵젝트가 없으면 자기 자신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 같다면 인정중독이다. 자아가 건강한 사람은 셀프 옵젝트가 없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인정해 주는 대상이 없어도 내 자존감과 행복도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국내에는 인정중독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지만 외국에는 수십 년 전부터 있었다. 선진국일수록, 빈부 격차가 클수록 인정중독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자기계발전문가인 웨인 다이어가 이와 관련된 책을 써 왔다. 웨인 다이어는 사회와 조직 속의 ‘개인’을 중시하는 의식혁명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피력했다. 국내에도 많이 나와 있는 그의 대표적인 책은 1976년에 출간된 ‘행복한 이기주의자’(21세기북스). 이후에 펴낸 ‘자유롭게’에도 비슷한 메시지를 담았다. 이들 책에서 웨인 다이어는 자기 자신 사랑하기, 타인의 눈치 보지 않기 등 조직과 사회에 억눌리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다.

2002년 국내에서 출간된 해리어트 브레이커가 쓴 ‘남 기쁘게 해주기 병’ 역시 인정중독과 관련 있다. 해리어트 브레이커는 이 책에서 “남을 기쁘게 해주려는 습관은 학습된 것”이라며 이렇게 썼다. “남을 기쁘게 해주려는 행동이 칭찬과 감사, 용인, 호감, 사랑을 통해 인정받는다면 그러한 습관은 긍정적으로 보강되거나 보상된다. 그러나 기쁘게 해주려는 습관이 비난, 거부, 애정의 보류, 처벌, 버림으로 중단되거나 피하도록 만든다면 부정적으로 보강된다.” 인정받기 위한 행동이 인정받지 못했을 경우 엇나갈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우울증, 신경쇠약, 피해망상 등 동반할 수도
종합해 보면,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지나칠 경우 우울증과 신경쇠약, 피해망상 등을 동반한 절망감에 빠질 수 있다. 인정받아야 행복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 저당 잡힌 인생을 사는 셈이다. 일시적 행복감을 느낄 수는 있어도 그 행복감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알 같다.

그렇다면 인정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인정중독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방치한 채로 세월이 흘러버리면 50대, 60대가 되어서 뒤늦게 ‘이건 내 팔자야…’ 하면서 신세 한탄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인정중독 치료는 단시간에 끝나지 않는다. 부모와의 고착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2~3년에 걸쳐 서서히 치유된다. 앞서 언급한 첫 번째 초등학생의 사례는 성공적으로 치료된 경우다. 수년이 지난 지금은 인정중독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게 됐다고 한다. 한때 서울대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아이는 경희대에 진학해 아주 만족스러운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주체적 삶을 살게 된 아이는 진짜 공부가 뭔지를 알게 됐고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장학금도 받았다. 남이 정해놓은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고, 남에게 인정받는 데에서 존재감을 찾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인정중독 예방법은 없을까. 양육태도에 있어서는 아이를 통해 보상받으려는 심리기제를 없애야 한다. 정선주 원장은 부모가 정해 놓은 성공의 틀에 아이들을 가두려 하는 양육태도는 인정중독 아이를 만든다고 경고했다. 그는 “서울대 출신 부모들은 그 길만이 성공이라고 본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그 길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빠르고 직업도 다양해졌다. 이제는 각자가 가진 고유성이 빛나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라고 말했다.

사회와 조직 속에서도 본연의 자아를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무석 원장은 세상으로만 뻗어있는 시선을 자기 내면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는 시간 말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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