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다’는 참 좋은 말이다. 움직임이나 흔들림이 없이 잔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쓰이는 형용사다. 이에 비해 비슷한 말 ‘조용하다’는 주로 사람의 행태를 형용한다. 떠드는 사람에게 조용하라고 명령할 수는 있어도 고요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맞지 않다. 이게 두 단어의 가장 큰 차이다.
그런데 고요하다는 말은 점차 잊히고 있다. 세상이 고요하지 않기 때문이고, 고요한 것이 점차 사라져가기 때문일 것이다. 인적이 없는 산사, 사람이 없는 것 같은 도서관, 온 세상이 흰 눈에 묻힌 밤, 새 소리만이 정적을 깨는 한여름의 호젓한 산길, 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초등학교의 아련한 풍금소리... 이런 모습과 풍경을 우리는 점차 잃고 있거나 기억 속에서나 만나고 있는 게 아닌가.
23일이면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는 처서다. 이제부터는 진짜 가을인 것이다. 처서의 한자 '處暑' 중 處에는 쉰다, 머무른다는 뜻이 있다. 그치다, 그만두다라는 뜻인 息(식)과 의미가 같다. 그러나 식서라는 말보다는 처서가 더 의젓하고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 글자가 좀 더 고요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한낮에는 여전히 폭염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렇게 유례없는 폭염이 사람들을 못살게 괴롭히는 일은 앞으로 여름마다 더 심해질 것이다. 이제는 기상이변라고 말할 것도 없다. 우려되던 전력대란의 고비를 넘은 것만도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냉방시설이나 수단이 없던 시절에 옛사람들이 이용한 것은 부채나 삼베옷 죽부인 따위였고, 자유롭게 등목이나 계곡 피서까지 할 수 있다면 호사였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말하는 ‘消暑八事(소서팔사)’, 8가지 피서법은 다음과 같다.
1) 깨끗한 대자리에서 바둑 두기
2) 소나무 단(壇)에서 활쏘기
3) 빈 누각에서 투호놀이
4) 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네뛰기
5) 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
6) 동쪽 숲 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
7) 비 오는 날 시 짓기
8) 달 밝은 밤 발 씻기
그러나 다산의 소서팔사는 엄밀히 따지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피서법이라기보다 한여름에 자신이 경험했던 즐거운 일 8가지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선인들은 어떤 수단을 이용해 더위를 이기기보다 정신적인 노력과 자세로 더위를 잊으려 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피서(避暑)가 아니라 망서(忘暑)다.
나이가 많은 분들은 요즘도 “고요하게 걸어라”라는 말을 하신다. 더위를 쫓는 걸음걸이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모든 행동거지와 삶의 습관, 태도를 고요하게 하는 것이 더위를 이기는 방법이면서 인격을 수양하는 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노자도 “몸을 움직이면 추위를 이기고 가만히 있으면 더위를 이긴다”(躁勝寒 靜勝暑)고 했다.
공부도, 학문도 고요해야만 할 수 있다. 제갈량은 많은 글을 남기지 않았지만 아들에게 준 ‘계자서(誡子書)’는 깊이 새겨야 할 글이다. “군자는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 덕을 기른다.”,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게 할 수 없고, 고요하지 않으면 멀리 나아갈 수 없다.” “무릇 배움은 모름지기 고요해야 한다.” 여기에서 바로 저 유명한 淡泊以明志 寧靜以致遠(담박이명지 영정이치원)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넓힐 수 없고 고요하지 않으면 학문을 이룰 수 없다. 고요하고 깊은 사색과 명상, 연구를 통해서만 학문과 인격이 자랄 수 있다. 잠시도 몸을 그냥 두지 않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고요하게’라는 말은 하늘의 별을 따오라는 주문과 같을지 몰라도 잘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도 지하철에서 본 젊은이들은 남자애건 여자애건 쉴 새 없이 무의식적으로 발을 까불고, 떨어대고 있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열심히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하고 있다. 눈총을 주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예전엔 그렇게 하면 복 달아난다고 어른들한테 혼났는데. 우리나라에 솜틀집 아이들이 언제 이렇게 많이 늘어난 걸까? 하기야 이렇게 말을 해도 솜틀집이 무엇이며 그게 발을 떠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는 아이들이 더 많겠지만.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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