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많이 하던 놀이가 있다. 동전 앞뒷면 맞추기 놀이다. 동전을 위로 던진 뒤 손바닥에 동전이 떨어지면 상대방이 못보게 숨기고 묻는다. “앞면이게, 뒷면이게?” 지금의 컴퓨터를 동전에 비유하자면 손바닥 위의 동전이다. 손바닥 위에 떨어진 동전은 이미 앞면 혹은 뒷면, 0 또는 1로 결정돼 있다. 반면 양자 컴퓨터는 허공에 떠있는 동전이다. 앞면일 수도 있고 뒷면일 수도 있다. 손바닥에 가까이 내려온 동전을 자세히 보니 앞면이 나올 확률이 70%정도, 뒷면이 나올 확률이 30% 정도로 보인다. 양자 역시 마찬가지다. 0인지 1인지가 결정돼 있는 게 아니라 확률로 존재한다. 이런 양자의 성질을 ‘양자의 중첩’이라 한다"
- 김재완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
○ 디지털의 위협이던 양자 중첩, 새로운 기대주로
컴퓨터의 역사에서 양자 중첩이 처음부터 환영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과거부터 공학자들의 목표는 ‘초소형화’였다. 그러나 그릇이 너무 작아지다 보니 양자역학의 세계로 들어왔고, 불확정성 원리를 만나게 됐다. 이는 컴퓨터가 0과 1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0과 1의 정성적 차이를 이용하는 디지털 컴퓨터에서 이런 성질은 치명적인 실패다.
하지만 1982년 리처드 파인만이 양자컴퓨터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면서, 과학계는 ‘양자물리학의 성질을 잘 이용하면 양자병렬성을 가진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컴퓨터는 0과 1을 비트의 단위로 저장하고, 양자컴퓨터는 양자비트 혹은 큐비트(qubit)를 단위로 한다. 양자컴퓨터의 큐비트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상태가 확실히 구분 가능하면서도 두 가지 상태를 양자역학적으로 중첩할 수 있는 물리계다. 대표적인 것이 ‘빛의 편광’이다. 빛은 진행 방향에 수직이 되는 평면 안에서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수직으로 진동한다. 그 중 전기장의 진동방향을 편광방향이라 한다.
수평 편광을 0, 수직 편광을 1이라고 하면, 45° 편광은 0이기도 하고 1이기도 한 상태가 될 수 있다. 중첩이다. 이 외에도 전자의 스핀(↑/↓), 원자핵의 스핀(↑/↓), 중성 원자나 이온의 바닥상태/들뜬상태, 초전도체 소자의 자속(↑/↓) 등도 큐비트로 사용된다.
큐비트의 확인: 한국과학기술원(KIST) 양자연구센터에 있는 큐비트 상태 확인 장치다. 마지막 양자 상태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은 양자컴퓨터가 갖춰야 할 조건 중 하나다. - (주)동아사이언스 제공
○ 중첩현상이 만드는 양자병렬성
양자의 중첩은 0~1 사이의 수를 표현할 수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디지털 비트 8개는 1바이트라 하고, 00000000부터 11111111까지 28, 즉 256가지 경우의 수를 나타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256개의 수는 한번에 하나씩 256번에 걸쳐서 차례로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반면 0과 1이 중첩된 양자비트 한 개는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첩된 큐비트 8개는 00000000부터 11111111까지 256가지를 한꺼번에 나타낸다. n개의 큐비트가 나타낼 수 있는 상태의 수는 2n개로, 지수함수(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이를 양자컴퓨터의 병렬성이라 한다.
그렇다면 디지털 컴퓨터의 ‘멀티코어 프로세서’의 병렬성하고는 무엇이 다를까. 이들은 여러 연산을 한번에 진행하기 위해 하나의 칩에 여러 개의 CPU가 들어가 있다. 이들은 컴퓨터 자원이 8배 늘어나면 이론적으로 최대 8배 빨라질 수 있다.
반면, 양자컴퓨터의 병렬성은 지수함수적으로 커지기 때문에, 컴퓨터 자원이 8배 늘어나면 최대 256배까지 빨라진다. 큐비트 수가 100개인 양자컴퓨터는 비트 수가 2100개. 즉, 약 1030비트 디지털 컴퓨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 양자컴퓨터를 이끌 주역은 아직….
디지털 컴퓨터의 하드웨어는 실리콘을 위주로 한 반도체가 대세이지만, 양자컴퓨터의 하드웨어를 어떤 식으로 만들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양자컴퓨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연산을 하기 위해서는 양자상태를 한 곳에 격리시킬 필요가 있다. 격리하는 방법으로는 진공 속에 띄워놓거나 분자 속에 혹은 고체 속에 가둬놓거나, 양자우물을 이용하는 것 등이 있다. 최근 양자 구현에 가장 많이 쓰이는 물리계는 초전도체, 광자, 이온덫(이온트랩) 등이다.
초전도체의 경우엔 격리된 자속 또는 전하를 이용하고, 이온트랩은 전기를 띤 이온을 공중에 떠있는 상태로 격리시킨다. 광자의 경우는 날아다니는 도중에 연산을 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가진다.
광자의 경우 중첩상태를 오래 유지시켜 제어가 쉽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서로 상호작용이 없어 연산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온트랩 역시 중첩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지만, 일정 개수 이상의 큐비트를 구현하고 제어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어떤 것이 실제로 양자컴퓨터 개발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과학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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