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싫었던 '인어공주'… 헌신적 .. 이해 못 해
물거품으로 흩어질 줄 알면서도 전부를
주는 것이 사랑
행복한 결말의 디즈니 영화보다 안데르센 원작을 한 줄씩 읽으리
어린 나는 안데르센이 싫었다.
그가 쓴 동화 '인어공주'의 결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병이 났다.
사람을 사랑하게 된 공주, 그 사랑을 위해 어여쁜 목소리를 마녀에게 주고 다리와 바꾸는 공주, 언니들이 구해다 준 칼을 왕자의 가슴에 꽂기만 하면 다시 행복한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칼을 버리는 공주 아리엘. 그 지고지순한 헌신의 결말이 헛된 물거품으로 흩어지는 것이라니! 환상적인 스토리는 매혹적이었으나 사랑의 깊음을 헤아리기엔 내가 어렸다.
그보다 한층 더 싫었던 동화가 있었으니 '해와 달이 된 오누이'였다. 그야말로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지라 미워할 원작자조차 없었는데 이건 읽기보다는 이야기로 여러 번 들었다. 할머니, 엄마, 아버지, 고모…. 특히 할머니는 옆집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되듯 생생하게 구연을 하곤 했다. 이야기꾼의 취향이나 기분, 심지어 날씨에 따라 그 디테일 역시 조금씩 달라졌으나 엽기적이고 잔혹한 핵심 내용은 빠지는 날이 없었다. …시장에 떡을 팔러 갔다 돌아오던 엄마는 어둑한 산길에서 말하는 호랑이를 만난다. 그 말인즉슨 '팔 하나 떼어주면 안 잡아먹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이야기다.
호랑이는 매번 저만치 앞서 기다린다. …다리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팔다리를 차례차례 떼어주고 몸뚱이만 데굴데굴 굴러 돌아오다 끝내는 그마저 호랑이 밥이 되어버린다. 차라리 한 번에나 잡아먹든가. 여기서라도 좀 끝이 나면 좋겠는데 이 사이코패스 같은 호랑이는 오누이마저 잡아먹으려고 집까지 찾아들고 우여곡절 끝에 오누이는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뒤따라 올라가던 호랑이가 떨어져 죽으면서 흩뿌린 피가 묻어 수수는 붉은 반점을 갖게 되었다나. 아아! 이 무슨 누아르풍의 동화란 말인가. 이후로 불그스레한 수수팥떡은 나의 혐오식품이 되어버렸다.
결국엔 잡아먹진 않겠다는 제 말마저 삼켜버리는 호랑이는 얼마나 비열하고 치사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떡장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어스름 저녁에 호랑이가 출몰하는 산길을 왜 기어이 돌아온단 말인가. 바보 아닌가? 인생에는 팔과 다리를 하나씩 떼어주면서도 넘어야 하는 가파른 고개가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나이였다.
어쨌거나 내 오랜 소원을 풀어주겠다는 듯 디즈니사는 1989년 영화 '인어공주'를 만들면서 해피엔드로 결말을 바꾸었다. 후련했던가? 그렇지 않았다. 사랑의 마음이란 물거품으로 흩어질 줄 알면서도 제 전부를 주는 기이함이란 걸 알게 된 나이였다. 다시 두 개의 버전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안데르센의 원작을 차분히 한 줄씩 읽어보겠다. 수수팥떡을 꼭꼭 씹어 먹으며.
참 모를 일인 게 느닷없이, 정말 느닷없이 이 이야기가 떠오를 때가 있다. 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내가 자라나 떡장수의 시간을 지나고 있을 때. 누군가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똑똑 따먹은, 고개 하나 넘을 때마다 먼저 와 기다리던 호랑이가 나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걸 깨우치고 보니 내가 당신의 호랑이였소, 고백해야 할 사람은 이미 곁에 없을 때. 어린아이와 떡장수 엄마와 호랑이, 그 셋이 또한 하나임을 알게 되었을 때. 결국은 인생, 그것이 호랑이임을 시간이 가르쳐주었을 때.
모란까지 피어버린 조숙한 계절. 이 기운 끌어모아 남은 한 해 버티라는 듯 생기로 충만한 오월이 절정을 지나고 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로 이어지는 오월은 가히 사랑의 달이라 부를 만하다. 선물을 주고받고 모처럼 화려한 식당에 둘러앉기도 했을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짐작보다 훨씬 물렁물렁해서 가끔은 이런 형식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계의 더 깊은 곳을 응시해보아야 할 시간이기도 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그는 나에게, 나는 그에게 누구인가.
조선닷컴그가 쓴 동화 '인어공주'의 결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병이 났다.
사람을 사랑하게 된 공주, 그 사랑을 위해 어여쁜 목소리를 마녀에게 주고 다리와 바꾸는 공주, 언니들이 구해다 준 칼을 왕자의 가슴에 꽂기만 하면 다시 행복한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칼을 버리는 공주 아리엘. 그 지고지순한 헌신의 결말이 헛된 물거품으로 흩어지는 것이라니! 환상적인 스토리는 매혹적이었으나 사랑의 깊음을 헤아리기엔 내가 어렸다.
그보다 한층 더 싫었던 동화가 있었으니 '해와 달이 된 오누이'였다. 그야말로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지라 미워할 원작자조차 없었는데 이건 읽기보다는 이야기로 여러 번 들었다. 할머니, 엄마, 아버지, 고모…. 특히 할머니는 옆집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되듯 생생하게 구연을 하곤 했다. 이야기꾼의 취향이나 기분, 심지어 날씨에 따라 그 디테일 역시 조금씩 달라졌으나 엽기적이고 잔혹한 핵심 내용은 빠지는 날이 없었다. …시장에 떡을 팔러 갔다 돌아오던 엄마는 어둑한 산길에서 말하는 호랑이를 만난다. 그 말인즉슨 '팔 하나 떼어주면 안 잡아먹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이야기다.
호랑이는 매번 저만치 앞서 기다린다. …다리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팔다리를 차례차례 떼어주고 몸뚱이만 데굴데굴 굴러 돌아오다 끝내는 그마저 호랑이 밥이 되어버린다. 차라리 한 번에나 잡아먹든가. 여기서라도 좀 끝이 나면 좋겠는데 이 사이코패스 같은 호랑이는 오누이마저 잡아먹으려고 집까지 찾아들고 우여곡절 끝에 오누이는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뒤따라 올라가던 호랑이가 떨어져 죽으면서 흩뿌린 피가 묻어 수수는 붉은 반점을 갖게 되었다나. 아아! 이 무슨 누아르풍의 동화란 말인가. 이후로 불그스레한 수수팥떡은 나의 혐오식품이 되어버렸다.
결국엔 잡아먹진 않겠다는 제 말마저 삼켜버리는 호랑이는 얼마나 비열하고 치사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떡장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어스름 저녁에 호랑이가 출몰하는 산길을 왜 기어이 돌아온단 말인가. 바보 아닌가? 인생에는 팔과 다리를 하나씩 떼어주면서도 넘어야 하는 가파른 고개가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나이였다.
어쨌거나 내 오랜 소원을 풀어주겠다는 듯 디즈니사는 1989년 영화 '인어공주'를 만들면서 해피엔드로 결말을 바꾸었다. 후련했던가? 그렇지 않았다. 사랑의 마음이란 물거품으로 흩어질 줄 알면서도 제 전부를 주는 기이함이란 걸 알게 된 나이였다. 다시 두 개의 버전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안데르센의 원작을 차분히 한 줄씩 읽어보겠다. 수수팥떡을 꼭꼭 씹어 먹으며.
참 모를 일인 게 느닷없이, 정말 느닷없이 이 이야기가 떠오를 때가 있다. 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내가 자라나 떡장수의 시간을 지나고 있을 때. 누군가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똑똑 따먹은, 고개 하나 넘을 때마다 먼저 와 기다리던 호랑이가 나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걸 깨우치고 보니 내가 당신의 호랑이였소, 고백해야 할 사람은 이미 곁에 없을 때. 어린아이와 떡장수 엄마와 호랑이, 그 셋이 또한 하나임을 알게 되었을 때. 결국은 인생, 그것이 호랑이임을 시간이 가르쳐주었을 때.
모란까지 피어버린 조숙한 계절. 이 기운 끌어모아 남은 한 해 버티라는 듯 생기로 충만한 오월이 절정을 지나고 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로 이어지는 오월은 가히 사랑의 달이라 부를 만하다. 선물을 주고받고 모처럼 화려한 식당에 둘러앉기도 했을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짐작보다 훨씬 물렁물렁해서 가끔은 이런 형식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계의 더 깊은 곳을 응시해보아야 할 시간이기도 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그는 나에게, 나는 그에게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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