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5일 일요일

수학의 제후' 가우스, 19살에 수학 난제 풀어

컴퍼스와 자만 써서 정17각형 그려내


아르키메데스, 뉴턴과 함께 세계 3대 수학자로 불리는 가우스.

1796년 3월 30일, 이제 막 열아홉살에 접어든 가우스는 그때까지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일을 해냈다. 고대부터 수많은 수학자들이 증명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해 당시까지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후에 수학의 제후라고 불리게 된 가우스는 정17각형을 컴퍼스와 자만 이용해 그릴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질 수 있는 다각형의 변의 개수는 일정한 공식을 따른다는 것도 발견했다. 이 공식에 따르면, 1백60각형이나 1백70각형은 컴퍼스와 자만으로 그릴 수 있지만 82각형은 그렇지 못하다. 3백 이하 숫자에서는 38개의 다각형만이 이 공식으로 그려질 수 있다.

독일 브룬슈빅에서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난 가우스는 이미 세살 때 수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어느 토요일 날 저녁 아버지는 그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일꾼들에게 줄 주급 명세표를 만들고 있었다. 계산을 막 끝내려고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계산이 틀렸어요. 그건….” 세살배기 어린애가 가리키는 숫자를 혹시나 하고 다시 셈해보니, 과연 계산이 틀려있던 것이 아닌가. 말도 제대로 익히기 전에 가우스는 이미 셈하는 법을 깨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뛰어난 능력을 보았음에도 아버지는 가우스를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집안 형편이 워낙 어려웠으므로, 아들이 그냥 자신처럼 노동자로 살았으면 했다. 하지만 아들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채고 이 능력을 발휘시켜주고자 했던 어머니 덕분에 가우스는 7살에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를 맡은 담임 뷔트너는 쌀쌀하고 권위만 내세우는 선생으로, 자신의 학생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무식한지를 보여주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가우스가 10살 때던 어느 날, 뷔트너는 학생들에게 1에서 1백까지 더하라고 시켰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숫자로 온종일 씨름할 터이니 하루를 조용히 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가우스는 놀라운 발견을 한 것이었다. 1과 100, 2와 99, 이렇게 쌍을 짓게 되면, 동일한 숫자인 101이 50번 나오게 돼, 결국 101에 50을 곱하는 식으로 간단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발견했던 것.

24세에 걸작 ‘수론 연구’ 발간

제자의 능력에 감동을 받은 뷔트너는 자신의 조수였던 요한 바르텔에게 이 어린 소년과 같이 수학 문제를 다루게 했다. 바르텔과 가우스 사이에는 어느덧 우정이 싹텄고, 바르텔은 가우스를 브룬슈빅의 공작인 칼 벨헬름 페르디난트에게 소개시켰다. 공작의 후원으로 가우스는 카를린대와 괴팅겐대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수학 공부, 특히 수 이론에 매달릴 수 있었다. 대학에서 그는 소수 이론, 2항 정리 등으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 1799년 대수 기본 정리를 처음으로 증명,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정17각형 문제를 해결한 때도 바로 대학을 다니고 있던 이 시기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수학자 사회에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1801년 ‘수론 연구’를 발간하면서다. ‘모든 수학 작품 중 가장 위대한 기적’이라고도 소개되는 이 저서에서 가우스는 최대 공약수와 최소 공배수 개념, 소수 이론 등 수 이론을 집대성해 놓았다. 당시 이 책을 실제로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같은 해에 가우스는 다시 한번 세간의 이목을 받는데, 이번에는 천문학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1801년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피아치는 ‘케레스’라는 이름의 소행성을 발견했다. 얼마 후 케레스는 태양 뒤로 사라져버렸고, 아무도 그 위치를 다시 알아낼 수 없었다. 피아치는 케레스가 사라지기 전에 충분한 자료를 모으지 못해서 그 궤도를 계산할 수 없었다. 가우스는 몇가지 안되는 자료로 케레스의 궤도를 계산해냈는데, 그해 12월에 케레스가 정확히 가우스가 예측한 장소에서 관측됐다. 그가 사용한 계산법은 후에 ‘가우스-요르단 보외법’으로 알려진 방법과 최소 제곱법이었다.

가우스는 1807년 괴팅겐대 천문관측소장직을 맡게 된다. 소장 일을 맡은 지 2년 후, 가우스는 후일 자신의 천문학 대표저작이 된 ‘태양둘레를 원추곡선으로 돌고 있는 천체 운동 이론’을 출판했다. 이 저작에서 그는 미분 방정식 이론, 원추 곡선, 타원 궤도를 다뤘고, 행성과 유성 궤도를 계산하는 법을 정리해 수리 천문학을 세우는데 크게 공헌했다.

근대 정수론의 정립이 가우스의 최대 업적이지만, 그밖에도 가우스는 수학에서 최초라 불릴만한 정리들을 많이 이뤄놓았다. 그러나 그의 발견은 우선권 논쟁에 종종 휘말렸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런 발견을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학사에 획기적인 선을 긋는 비유클리드 기하학 존재를 확신하고도 가우스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할 것이 두려워 발표하지 않았다. 아르키메데스, 뉴턴에 이어 세계의 3대 수학자로 불리는 가우스는 자신이 죽은 후, 뇌를 학문 연구에 쓰도록 괴팅겐 대에 기증했다. 때문에 사람들은 1855년 2월 23일 이후로도 깊은 굴곡이 있는 그의 뇌만은 여전히 괴팅겐에서 만날 수 있다.


과학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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