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8일 수요일

아인슈타인 5대 수수께끼

상대성이론, 광양자가설 등으로 20세기 과학계를 대표하는 알버트 아인슈타인. 그를 빼놓고는 현대물리학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인슈타인의 존재는 크고도 뚜렷하다. 그에 얽힌 5가지 궁금한 점을 '과학 아사히'에서 전재한다.​

1. 어릴 때는 왜 열등생이었나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은 1879년 3월 14일 남부 독일 울름에서 태어났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족들에게 걱정을 안겨 주었다. 우선 태어난 아기의 뒷머리가 너무 커서 부모들이 혹 기형아가 아닐까 걱정할 정도였다. 뒷머리는 태어난지 2~3주 되자 조금씩 들어갔으나 이번에는 너무 살이 찌기 시작해 다시 걱정거리였다. 몇시간이라도 혼자 노는 이 아이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아 벙어리가 되는게 아닐까하는 우려를 사기도 했다.

이런 아인슈타인도 태어난 지 2년 6개월이 된 무렵부터는 웬만큼 정상의 모습을 찾았다. 다만 자신이 말한 이야기를 무조건 혼자 되풀이해보는 이상한 습관이 7세 때까지 계속됐다. 그때 이미 '내성적 사고력'이 싹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또 하나 유아기의 특징으로 갑자기 화를 벌컥내는 발작증세가 있었다. 이 신경질은 할아버지인 코흐에게서 물려받았다는 말이 있다. 바이올린 교사에게 의자를 던지거나 여동생 마야에게 볼링공을 던진 일도 있고 어린이용 괭이로 마야의 머리에 구멍을 내기까지 했다. 훗날 아인슈타인이 평화운동 등에서 때때로 보인 신경질적 자세도 이 성격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비록 아인슈타인이 어머니에게서 예술적 재능을, 아버지에게서 수학적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말해지지만, 어린이 아인슈타인에 대한 교사들의 평가는 한결같이 나빴다. 아인슈타인 스스로도 이런 교사들에게 좋은 인상을 가진 일이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16세까지 그를 가르친 바이올린 가정교사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것 이상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독학으로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연습했다"고 타계 5년 전에 회상한 바 있다.

공립 국민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그는 구구단을 외울 수 있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런 반사신경은 철저히 둔했으므로 엄한 교사에게 손바닥을 맞는 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계산에 시간이 많이 걸렸고 그렇게 계산하고서도 틀린 답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수학적 사고력을 키우고 있다는 조짐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김나지움에서는 권고퇴학 당해

아인슈타인은 9살 때 뮌헨의 명문 루이트포르트 김나지움(독일 고등학교의 일종. 수학연한은 9년)에 진학했다. 김나지움에서는 당시 그리스 라틴어를 중심으로 하는 인문주의 교육을 주로 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교과과정은 언어 기억력이 없는 아인슈타인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라틴어는 수우미양가의 '양' 정도였지만 그리스어는 '가'를 받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조잡한 리포트에 화가 난 그리스어 교사가 "너는 제구실을 하는 인물은 못될 것 같다"는 예언을 한 일조차 있었다.

이같이 획일적인 교육과 프로이센적 군사교련에 혐오감을 느끼던 아인슈타인은 제7학년 때 학급담임으로 문제의 그리스어 교사를 만나는데, 그에게 퇴학을 권고당하게 된다.

"저는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아인슈타인에게 그 교사는 "하지만 너의 존재가 나에 대한 학급 전체의 존경심을 잃게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이 김나지움을 중퇴한 사정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전기사업경영에 실패, 이탈리아로 이주해 있었다. 비록 열등생으로 낙인은 찍혔지만 루이트포르트 김나지움이 아인슈타인에게 준 좋은 영향에 대해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 생활 마지막 1년 반 동안 받았던 요스트 크리스트저 '자연과학의 기초'에 의한 강의는 물리학을 수학의 일부분이 아니라 독립된 실험 과목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진취적인 교과과정이었다. 또 학교장이었던 수학 교육개혁자 아도르프 지켄베르거의 '수학기초교본'(전3권)은 아마도 아인슈타인이 훗날 언급한 '12살 때 만난 유클리드 기하학의 바이블'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 취리히 공과대학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1년 동안 다닌 스위스 아라우 주립학교에서는 물리학의 아우구스트 투프슈미트, 지질학의 프리트리히 뮤르베르크, 수학의 하인리히 간터, 인생의 교사가 된 역사학의 요스트 빈텔러 등의 교사진을 만났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수확이다.

아인슈타인은 "사고(思考)란 놀라움에서 비롯되는 끊임없는 비약"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 놀라움의 체험도와 그에 따른 사고의 내면화가 일반 사람보다 돋보였다. 그는 4,5살 때 아버지로부터 작은 나침반을 받았는데, 그 바늘이 항상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데 놀라움을 느꼈다. "자연에는 무엇인가 숨겨진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고 하니, 역시 예사 꼬마는 아니었던 셈이다.

12세 때 마주한 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책에서는 삼각형의 각 정점에서 내린 3개의 수직선이 한 점에서 교차된다고 하는 정리의 명석함에 경탄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가장 잘했던 놀이는 카드로 집짓기. 14층까지 쌓아올릴 수 있었다. 그의 끈질긴 인내력과 세심한 주의력이 겉보기에는 둔중하기만 한 소년의 내부에서 놀라운 사고력의 세계를 축성해나간 것이다.

14세 때의 모습. 루이트로르트 김나지움에 다니던 시절이다.

2. 특허국 직원이 어떻게 상대성 이론을 내놓을 수 있었나

아인슈타인은 재수 끝에 취리히 공과대학 제6학과 A(VI-A)의 학생이 되었다. VI-A는 수학계의 학생을 뜻하는데, 뒷날 아내가 된 밀레바 마리치가 홍일점이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00년 7월, 동기생 5명은 함께 디플롬(중등교육자격 인정시험)인 졸업시험에 도전, 밀레바를 뺀 4명이 합격했다. 밀레바는 그 다음 해에도 도전했으나 실패, 공부를 포기하고 말았다.

당시 아인슈타인의 소박한 꿈은 고등학교 교사가 되는 것. 그 경우 일단 대학의 조교로 남았다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전출되어 가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었다. 예를 들어 아라우 주립학교에 있었던 물리학의 투프슈미트는 취리히 공과대학 이론물리학 H.F.베버교수의 조교였다.

그런데 디플롬 합격자 4명 중 아인슈타인만이 조교로 채용되지 못했다.

분명 디플롬의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6점 만점 중 아인슈타인은 총평균 4.91점으로 불합격된 밀레바보다 약간 높은 정도였고 합격자 가운데서는 가장 낮은 점수였다. 다른 3명은 수학전공자로 이론 물리학 전공인 아인슈타인과는 몇몇 시험과목이 달랐으나 모두 5점대는 확보하고 있었다. 본래 아인슈타인이 들어가고 싶어했던 베버 교수의 조교 자리는 기계공학 전공의 카를 시르트가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아인슈타인은 취직의 출발점에서 갑작스레 모교 밖으로 쫓겨나는 아픈 경험을 겪어야 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 취리히 공과대학에서는 수학은 화려한 교수진을 갖춘 반면 물리부문은 이론물리학에 베버교수, 실험물리학은 장 페르네 교수가 각기 한 사람씩 있었을 뿐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베버교수의 강의에 대해 "다음 강의가 기다려진다"고 밀레바에게 보내는 편지에 쓸 정도로 열성이었으나, 고전적인 열역학 중심으로 현대물리학을 수용하지 않는 풍토에 점차 낙담해갔다. 그래도 아인슈타인은 모든 강의와 실험을 수강하고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이 베버교수를 '프로페소르'(교수)라 부르지 않고 '헤어 베버'(베버씨)라 불렀던 것이 교수의 신경을 건드렸다고도 한다. 여기에 페르네 교수의 물리학 실습 입문에 출석을 게을리했고 최저점 '1'을 받아 견책처분을 받은 일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이 교수로부터는 "물리 공부를 그만두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아인슈타인은 훗날 자신이 좋은 학생은 아니었다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좋은 학생이란 먼저 이해가 빠르고 강의 내용에 전력으로 집중하며 그 내용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능력까지 필요한데, 자신은 자립심이 지나치게 강한 반면 이 3가지 조건에는 미흡했다는 것이다.

교단에의 꿈 무산되고 실업자생활

반년 후까지도 무직자였던 아인슈타인은 각지의 교수에게 조교 채용 의뢰서를 보냈다. "조만간 나는 북해에서 이탈리아 남단까지, 모든 물리학자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 되겠지요."(1904년 4월4일자 밀레바에게 보낸 편지)

최근 그 의뢰서 중 하나가 왕복엽서 그대로 경매에 나왔다. '왕복엽서'라는 아인슈타인의 몰상식한 방식이 지금에 와서는 재미있게 보인다.
그 사이 빈터투르 공업고등학교의 임시교사나 샤프하우젠 교육보육소의 임시직으로 일하기도 하면서 학교 친구 그로스만의 아버지 도움으로 스위스연방 특허국에 이력서를 낸 것이 1901년 12월의 일이었다. 이듬해 2월에는 베른으로 옮겨 소식을 기다리며 가정교사 일을 계속했다.

6월16일 스위스연방특허국은 아인슈타인을 기술전문직 3급견습, 연봉 3천8백 프랑으로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2년 가까운 불안정한 생활이 이로써 끝난 것이다. 당시의 장관은 프리트리히 할러. 국토 측량 분야에서 초대장관으로 부임해온 그는, 이틀에 걸친 엄한 구두시험과 필기시험을 거쳐 새 전기사업 분야의 특허신청에 대응하는 능력을 아인슈타인에게 기대한 것이다.

만년의 아인슈타인은 1902년부터 1909년까지 7년간을 특허국에서 보낸 것을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다. 생활의 불안에서 해방되어 특허의 실무처리 체험을 한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허국 장관 할러의 교육은 매우 엄했다. 아인슈타인과 또 한사람의 신참은 들어가자마자 문장 표현에서부터 기술적 사항까지 개인지도를 받아야 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당신은 물리학자지만 제도(製圖)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공업제도와 측량의 강의를 좀더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고용되기 어렵다"고 독려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2년 이상이나 견습기간을 거쳐야 했다. 할러는 매우 우수한 방법론자로 특허심사에 관해서 철저하게 가르쳤다.

"심사할 때는 발명자의 생각이 한 군데라도 틀린 데가 없는지 생각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은 발명자의 사고과정에 끌려들어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대학에 남지 않고 실무에 임한 것이 질낮은 논문제조에 쫓기지 않고 좋아하는 문제에 몰두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학문에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으면, 특별히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실무를 해내면서 생활 속에서 충분히 연구활동이 가능하다"는 단언이다.

아인슈타인은 예상 밖으로 실무에 빨리 적응했다. 밝은 유머를 가지고 직장의 의무를 '구둣방일', 직장을 '속세의 절간', 직장사람들을 '특허 따내기의 하인들'이라고 부르면서 지냈는데, 이를 통해 하루 8시간 노동이 지루하기만한 '단순노동'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그가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할러장관의 엄격한 고과표 앞에서는 실적 밖에 통용되지 않았음은 명확했다. 아인슈타인은 직장인으로서 거기에서 합격점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예를 들어 '기적의 해'라 불리는 1905년의 3대논문(광양자가설, 브라운 운동이론, 특수상대성이론) 발표와 같은 위업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인슈타인보다 21세 젊은 오스트리아 태생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 볼프강 파우리가 말하기 시작해 널리 퍼진 "직장 일은 관심 밖이었고, 근무시간 중에도 물리 연구를 하고 있었다"는 말은 할러장관이나 직장환경에서 볼 때 근거가 없는 듯하다.

성공의 비결은 하루 3등분법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하루를 정확히 3등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근무에 8시간, 잡일과 과학연구에 8시간, 수면에 8시간을 할애했다. 잠자는 8시간은 종종 원고집필에 바쳐졌다. 어떤 친구가 공무원으로서 성공하는 비결을 묻자 아인슈타인은 다음의 수학 방정식으로 대답했다 한다.

A=x+y+z

여기서 A는 성공, x는 일, y는 놀이, z는 침묵이다.

이 침묵에 주목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일터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계산을 하는 일은 없었지만 일하는 짬짬이 침묵할 때 자유롭게 '사고실험'을 전개하지는 않았을까.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이 1922년 일본 교토대학에서 있었던 강연에서 등장한다.

그것은 1907년에 슈타르크의 의뢰로 상대성이론의 총론에 매달려 있던 무렵의 이야기다. 아인슈타인은 관성과 에너지의 관계는 분명 설명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관성과 무게와의 관계, 중력장 에너지와의 관계가 설명되어지지 않는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베른의 특허국에서 한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가지 아이디어가 용솟음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유 속으로 떨어졌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무게를 느낄 수 없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간단한 아이디어는 나에게 실로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 감격에 의해 나는 중력이론(일반상대성이론)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하루 3등분법에 충실하기 위해 외모 등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양복은 10년을 입었고 직장에는 언제나 작은 자수가 있는 초록색 겉옷 차림으로 나타났다. 토요일에는 그물바구니와 지갑을 들고 시장에서 쇼핑을 한 다음, 직장에 나가 업무에 착수하곤 했다.

1906년에는 2급 전문관으로 승진했고 연봉도 4천5백 프랑으로 올랐다. 자택에서 정기적으로 열었던 '아카데미 올림피아'라는 서클, 우수한 직장 선배들의 이해에 힘입어 아인슈타인의 지적인 세계는 만개할 수 있었다.

3. 왜 첫 결혼에 실패했는가

아인슈타인의 지적 개화기에 첫부인 밀레바 마리치가 끼쳤던 공로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최근 공개된 결혼 전 두 사람의 사랑의 편지를 보면 이들이 사랑을 고백하면서 서로의 학문을 확인하고 있었음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1905년의 3대 과학논문(광양자가설, 브라운 운동이론, 특수상대성이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은 매순간마다 자신의 연구의 진전상황을 보고하고 서둘러 밀레바의 반응을 구하고 있다.

밀레바는 세르비아 농가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인슈타인보다 3년 4개월 연상인 그녀는 고관절탈골로 다리가 부자유했다. 어려서부터 수학과 독일어, 프랑스어 등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양친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교육이 꽃피던 스위스에서 딸이 학업을 닦는데 동의했다.

취리히 공과대학의 동급생이 된 두 사람은 함께 놀고 함께 공부하는 사이가 된다. 이들은 헤름호르츠 맥스웰 보르츠만 헤르츠 등의 저서를 함께 읽었고 1899년에는 이미 운동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해(후에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의 원제가 된다) 편지로 논의학기 시작하고 있다.

당시의 밀레바는 쾌활했고 아직 우울 증세는 나타내지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흑발과 목소리는 아인슈타인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또 그녀가 아인슈타인이 스스로에게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수학적 직관력이 뛰어났던 점도 매력의 하나였다 한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대학졸업 후 직장을 구하지 못했는데도, 게다가 아인슈타인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사람이 맺어진 것은 1904년 봄의 일이었다. 이듬해 1월에는 첫딸 리제가 태어났음이 최근 확실해지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스위스연방 특허국에 취직하기 전의 일이다. 이 아이는 밀레바의 친정에서 데려가 양자로 삼았다고 전해지지만 이후 소식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인슈타인 집안의 허락이 내려져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혼한 것은 1903년 1월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장남 한스 알버트(훗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토목학 교수가 됨)가 1901년에, 차남 에두아르트(예술가를 지망했으나 정신분열증으로 입원사함)가 1910년에 태어났다. 장남이 태어난 베른시의 방은 상가를 면한 좁은 계단을 올라 2층에 있다. 지금은 '아인슈타인 하우스'로서 작은 박물관이 되어 있다.

여기서는 아라우 주립학교 시절의 동급생이나 그 형제들이 모여 매우 지적인 독서회 '아카데미 올림피아'가 종종 열렸다. 이들은 밀레바를 안주인으로 하여 마하 흄 푸앵카레 플라톤 미르 스피노자 헬름호르츠 등을 주제로 열띤 토의를 나누었다.

'성격 차이', '아내의 우울증'으로 이혼

1905년의 3대논문을 쓴 '기적의 5주일'은 밀레바의 물심양면의 도움 덕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밀레바가 없었다면 아무리 천재 아인슈타인이라도 그같은 집중력을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열광적으로 써대는 남편의 원고를 점검하고, 라이프치히의 물리학 연보 편집국에 투고하는 일을 도왔다. 일이 모두 끝났을 때 아인슈타인은 거의 병이 든 상태였다.

이런 두 사람이 왜 이혼을 하게 됐을까?

두 사람의 이혼사유에 대해서는 '성격 차이', 밀레바의 우울증' 등 여러 해석이 있다. 여기서는 두 사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필립 프랭크 교수('아인슈타인: 그의 생애와 시대'의 저자)의 회고를 참고해보기로 하자.

"아인슈타인보다 나이가 많았던 부인은 대부분의 세르비아 학생들처럼 자유로운 사상을 가졌고 진보적이었다. 또한 본성적으로 마음을 터놓지 않는 데가 있어 주변 사람들과 즐거운 접촉을 가질 능력은 많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흥겨운 대화를 즐기는 소탈한 성격이었지만, 그의 부인은 이와는 다른 성격이었다. 이러한 그의 개성이 띠로 부인을 불안하게 했다. 부인의 성격 가운데는 어딘가 퉁명스럽고 엄격한 데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이 부인과의 생활이 반드시 행복과 평온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의 아들 한스 알버트 아인슈타인 교수는 수년 전의 인터뷰에서 프랭크 교수의 이 주장에 반박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들 부부간의 문제의 일단을 읽을 수도 있을 듯하다.

"엄격? 가혹? 나로서는 이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온갖 불운을 다 겪은 사람으로서 전혀 가혹한 데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사랑을 받지는 못하면서 줄 수만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 본질적으로 지성이 결여된 사람일 겁니다."

어찌됐건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와 학계에서 그의 지위가 높아진 시기, 그리고 밀레바가 우울증에 빠지기 시작한 때는 일치하고 있다. 파국은 1914년 봄, 아인슈타인이 취리히 공과대학 교수에서 베를린으로 초빙되고 나서 곧 생겼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베를린 대학 교수 겸 이론물리학연구소장,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는데, 유태인식 대가족주의에는 밀레바의 마음이 쉴 만한 곳이 없었다. 이들은 곧 별거했고 밀레바는 아이들들 데리고 취리히로 돌아가 버렸다.

이 사이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부터 어렴풋한 연정을 품어온 3년 연상의 사촌누이 엘자 레벤탈을 다시 만나, 1916년 경에는 이미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1919년 6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헤어진 처자식의 위자료와 양육비로는 이미 그가 받으리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있던 노벨상의 상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1921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이 결정됐다는 전보는 1922년 11월 12일 밤 상하이에 머물던 그에게 도착했다. 상금 총액은 12만1천5백72크로네. 당시 기준으로 3만2천달러 상당의 이 돈은 이듬해 밀레바 모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첫부인 밀레바, 장남 한스와 함께 한 아인슈타인.

4. 왜 노벨상 수상이유는 상대성이론이 아닌가

아인슈타인이 1921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을 때 누구나 저 유명한 상대성이론으로 이 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노벨상은 광양자가설, 즉 빛이 에너지 입자로서, 그것이 물질에 닿으면 빛의 진동수에 비례하는 에너지가 상대편에 주어진다는 획기적인 가설에 주어졌다. 빛이 물질에 닿으면 전자가 뛰쳐나온다는 '광전효과'는 이전부터 알려져 왔으나 그 현상이 이 가설에 의해 처음으로 설명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른바 1905년의 3대 과학논문 중의 하나다.

수상 당시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의 보충설명에 따르면 "앞으로 확인되는 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을 당신의 상대성이론이나 중력이론은 고려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라는 것이다.

'현실'기여 위주의 노벨상 선정과정

1919년의 영국 일식관측대가 중력장을 통과하는 빛은 구부러진다는 사실을 밝혀냈음에도 불구하고 왜 상대성 이론에는 수상이유가 없다고 판단됐을까.

일반적으로 노벨상의 수상 대상은 그때까지 구체적인 발명이나 발견, 과학관측장치의 개발 등 명시적인 것이 우선시돼 왔다. 순수한 이론적 공헌만으로는 웬만해서는 수상대상이 되지 못했고, 무언가 구체적인 것에 연관이 맺어진 연후에야 심사대상에 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상대성이론도 아직 그같은 실적이 미흡하다고 평가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노벨상 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1911년과 1915년을 제외하고 1910년부터 1922년까지 매년 후보에 올랐다. 다만 해마다 후보가 되는 분과의 이름이 조금씩 달라졌다. 여기서 과학사연구가 파이스의 연구를 중심으로 아인슈타인이 후보로 올랐던 연대와 분과이름, 당시의 다른 후보자와 수상자를 알아보자.

1910년 '이론적 내지 수리물리학적인 성격의 연구' 군스트란드, 플랑크, 푸앵카레, 판 델 와르스(수상)
1912년 '이론물리학' 헤비사이드, 로렌츠, 마하, 플랑크, 달렌(수상)
1913년 '이론물리학' 로렌츠, 네른스트, 플랑크, 카메링 온네스(수상)
1914년 '꽤 사변적인 성격을 가진 업적, 이론물리학' 에트베스, 마하, 플랑크, 폰 라우에(수상)
1916년 '분자물리학' 디바이, 크누센, 레망, 네른스트(수상자 없음)
1917년 '양자가설에 대한 플랑크의 큰 업적의 연구' 보어, 디바이, 네른스트, 플랑크, 좀머페르트(수상연기)
1918년 '양자물리학' 보어, 파쉔, 플랑크, 좀머페르트(수상연기, 1917년의 상이 버클러에게)
1919년 '이론물리학' 크누센, 레망, 플랑크, 슈타르크(수상, 1918년의 상이 플랑크에게)
1920년 '수리물리학' 보어, 좀머페르트, 기욤(수상)
1921년 '수리물리학' 보어, 좀머페르트(수상연기)
1922년 아인슈타인은 분과 등록하지 않음.(1921년 상이 아인슈타인에게, 1922년 상이 보어에게)

처음 아인슈타인을 노벨상 후보로 추천한 것은 1909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물리화학자 오스트발트였다. 그는 1910년 1912년 1913년 등 연이어 아인슈타인을 추천했다. 그때마다 특수상대성이론을 '에너지 원리 이래 가장 위대한 원리'라 하여 코페르니쿠스나 다윈의 업적에 비유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좀더 실험적 검증이 필요하다"며 여기에 "로렌츠가 그 가설에 대해 아인슈타인보다 주의가 깊다"고 반응하고 있다.

아인슈타인 추천자는 해가 갈수록 늘어났다. 1919년에는 취리히의 피에르 바이스가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전면적으로 평가해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위원회에 보냈다. 그러나 위원회는 "그의 업적은 매우 칭찬할만하나 새로운 실험적 장애에 부닥치고 있다"고 평하는데 그쳤다.

1919년이 되자 드디어 독일 물리학계의 거장 플랑크가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해 "뉴턴을 뛰어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며 강력하게 추천했다. 1920년에는 보어가 "이 상대성 이론에서 우리는 물리학 연구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 비약이 가능해졌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위원회의 요청을 받고 보충기록을 남긴 아레니우스는 "적색편이의 실험은 이론과 모순돼 있고 1919년의 일식관측 데이터는 여러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고 기술했다. 또 수성의 근일점 이동 문제에 대해서도 아레니우스가 오해했음은 명백했다.

1922년에는 플랑크와 좀머페르트가 아인슈타인 및 보어에게 노벨상을 줄 것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이렇게 하여 앞의 위원회 견해를 전제로 수상이 결정됐는데, 이 수상식의 초빙연설에서 아레니우스는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란은 인식론의 문제에 속하고 파리의 유명한 철학자 베르그송이 이 이론에 도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때까지도 승복하지 않는 자세를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할 수 없었던 이유는 심사위원들중에 이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29년, 독일 물리학계의 거장 막스 플랑크로부터 플랑크메달을 수여받는 아인슈타인

5. 왜 평생 양자론을 반대했는가

"양자역학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지만 원리(原理)에 대한 이론은 아니다"라는 아인슈타인의 견해는 평생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은 이론 물리학의 기본 이론이 될 수 없다"는 단정은, 대개 아인슈타인이 '화석화'된 증거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시각은 아인슈타인의 의도를 너무 쉽게 오해할 소지를 남겨준다.

아인슈타인은 "지금의 양자역학은 앞으로 출현할 이론의 실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정전기학이 전자기학의 맥스웰 방정식에서, 열역학이 통계역학에서 유도된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자역학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개량함으로써 새로운 이론이 발견된다는 등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전기(前期)양자론 시대에서도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과 양자론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직감하고 있었다. 1917년의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광양자에 대해 에너지 E=hv, 운동량 p=hv/c(h는 프랑크 상수, v는 빛의 진동수, c는 광속)를 맞추고 있다. 이 광양자론에서는 이론에 따라 빛에서 물질로 에너지가 이행할 경우 그것이 일으키는 운동이 열역학의 요청과 일치할 때만 이론이 맞는다고 주장한다. 열역학을 언급하면서 굳이 상대성이론을 가져다대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 여기서도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과의 사이에 깊은 골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을 읽을 수 있다.

"소중한 것은 진리를 얻으려는 노력"

오늘날까지도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결혼' 문제는 지난한 과제가 되어 있다. 실재론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이 반실재론자로서의 양자역학자와 화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실재의 간접적 묘사 그 자체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의 프로그램, 즉 특이점 없이 한 쌍의 편미분 방정식을 만족하는 장(場)에 의해 물리적 실재를 묘사하려는 프로그램을, 자신의 과제로 삼은 것이다. 한쌍의 편미분 방정식을 만족하는 장은 인과적으로 기술될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예를 들면 원자핵을 도는 전자의 에너지는 어느 일정한 띄엄띄엄한 값밖에 얻을 수 없고 자유롭게 얻을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방정식의 수를 많게 하여 미지의 장의 변수를 과잉결정하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 경우 이론파악까지도 엄밀히 인과적일 것, 중력과 전자기력은 통합되어야 할 것, 소립자는 장의 일반방정식의 특별해(解)로서 출현하는 것이 될 것, 여기에 양자가설도 장의 일반방정식의 결과로서 얻어질 것 등을 요청한 것이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만년에 추구한 통일장이론의 구상이었다고 생각된다.

아인슈타인은 타계 1개월 전에 짧은 자전스케치를 했다. 그 말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중력이론이 완성되고 이제 40년이 지났다. 이 세월은 중력장이론을 일반화하여 물리학 전체를 위한 하나의 기반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장(field) 이론을 얻기 위한 노력에 바쳐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목표를 위해 연구를 계속했다. 나는 전망있을 듯했던 몇가지 수식을 뒷날 버렸다. 그러나 최근 10년동안 자연스러우면서도 전망있을 듯한 한가지 이론을 근근히 유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도 이 이론이 물리학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이 이론이 갖가지 비선형의 장이론에 어떻게 적용되는가라는, 지금 시점에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듯한 수학적 곤란함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의 장이론에서 물질과 방사의 원자론적 구조나 양자현상의 설명이 가능할지는 나에게조차 의심스러웠다. 대개의 물리학자라면 주저없이 확신에 가득차 '그것은 무리'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자의 문제는 다른 방법으로 원리적으로 해결되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어찌됐건 우리에게는 아직 레싱의 위로의 말이 남겨져 있다. 진리를 얻으려는 노력은 진리를 확실히 소유하는 것보다 귀중하다.

기묘한 운명의 길 걷는 아인슈타인의 두뇌

아인슈타인의 두뇌는 일반인과 어떻게 다른가. 20세기 물리학계를 대표하는 '천재 중의 천재' 아인슈타인의 두뇌는 살아생전 못지않게 죽은 뒤에도 의학계와 일반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일반에 알려진 바처럼 아인슈타인은 1955년 미국 프린스턴 병원에서 대동맥류 파열로 세상을 떠났다. 그뒤 그의 두뇌가 실험용으로 보관돼 있다는 '소문'은 심심치않게 들려왔는데, 이는 한 전기작가의 글에서부터 비롯됐다. 로널드 클라크의 전기 '아인슈타인, 생애와 시대'가 그것으로, 이중에서 '아인슈타인은 생전에 자신의 두뇌를 연구용으로 쓰라고 주장했다"는 대목이다.

1978년 이 글에서 실마리를 얻은 당시 '뉴저지 먼슬리'의 편집자 스티븐 레비가 아인슈타인의 두뇌를 추적, 이 두뇌를 보관하고 있던 '평범한'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를 찾아냈다. 하비는 아인슈타인이 타계하던 당시 부검 현장에서 따로 절개한 그의 두뇌를 커다란 사과 주스병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두뇌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다시 한번 끓어오른 것은 1985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 신경해부학자 마리안 다이아몬드가 발표한 "아인슈타인의 두뇌를 연구한 결과 일반인보다 글리어 세포가 73%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보고가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

마리안 다이아몬드와 그의 남편이자 UCLA 정신과 교수인 아놀드 샤이벨은 아인슈타인의 두뇌가 보관돼 있다는 레비의 기사를 접하고 토머스 하비를 찾아가 어렵사리 아인슈타인의 세포 조각을 나눠 받았다.

다이아몬드와 샤이벨은 신경해부학 중에서도 인간의 특정 능력과 뇌의 구조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연구해왔다. 다아이몬드는 지난 20년간 '풍요로운 환경'과 '빈약한 환경'이 쥐의 두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연구했는데, 실험 결과 통계적으로 놀이기구나 같은 또래의 쥐들이 많은 환경에서 사는 쥐의 두뇌는 약 10%까지 커지며 두뇌피질이 두꺼워지고 두뇌조각의 신경세포당 글리어 세포의 수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그러나 이 부부는 막상 매스컴에 보도된 이들의 연구결과에 대해 뒤에 상당 부분이 왜곡돼 있다고 밝혔다. 즉 이는 아인슈타인의 두뇌조각과 일반인 11명의 두뇌를 비교해본 결과에 불과하므로 '73%'라는 수치는 정확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이 연구가 확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50명의 두뇌 샘플이 필요하다는 것.

게다가 아인슈타인이 일반인보다 많은 글리어 세포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중 어떤 부분이 그의 지적인 능력에 영향을 미쳤는지, 또 글리어 세포가 많다는 점이 그의 천재성과 해부학적으로 어떤 연관을 갖는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1백여년에 걸친 연구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 세포의 양이나 질과 지적인 능력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

이 보도에 고무받은 미국의 과학지 '디스커버'는 같은 해 5월 다시 토머스 하비를 찾았다. 이들은 '과연 아인슈타인의 두뇌를 보관한다는 것은 누구의 뜻에 따른 것인가'는 의문을 제기했는데, 오토 나탄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재산관리인의 말을 인용,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두뇌가 연구대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나탄은 1955년 4월 '뉴욕타임스'기자에게 "아인슈타인의 신체기관 중 일부를 연구를 위해 보존한다는 결정은 아인슈타인의 아들, 한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내렸으며, 그는 이것이 부친의 바람을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한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버클리대에서 토목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3년 사망했다.

또 하나의 의문점은 왜 이 두뇌가 '별볼일 없는'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에게 보관돼 있는가하는 점이다. 하비는 아인슈타인의 두뇌를 찾아오는 경우(1956년 6월에는 '뉴욕 포스트' 기자에게, 1978년에는 스티븐 레비에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1년내에 연구성과를 내놓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편 프린스턴 병원의 한 대변인은 이와 관련, 연구계획을 둘러싼 윤리적 논쟁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한 사람의 두뇌를 조각내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일은 아무리 '인류과학의 발전'을 내세운다 해도 윤리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두뇌는 앞으로도 '미완의 연구과제'로 남아있을 듯하다. 어찌됐건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토록 화제를 불러모으는 아인슈타인이 20세기의 '스타'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과학동아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