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작가 주변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풍성..당대엔 유명하지 않은 시골작가 정도였다고?
위대한 작가 주변에는 전설(傳說) 같은 이야기며 숱한 일화(逸話)가 따르기 마련이다. 셰익스피어도 예외는 아니다.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이 갖는 권위에 눌려 그의 작품을 성전처럼 여기고, 그를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는 사람이 많다. 전설과 성전 사이에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셰익스피어의 생애에 관해 올바른 정보를 유통하는 사람은 의외로 아주 적은 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생애, 잘못 알려진 이야기, 제대로 알려진 이야기를 하나하나 추적해 보자. 셰익스피어는 18세 때인 1582년 여덟 살 연상인 앤 하타웨이와 결혼한다. 결혼 후 6개월 만에 첫 딸 수잔나가 출생한 것으로 보아 ‘완벽하게 정상적인’ 결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앤의 친정은 셰익스피어 집안보다 약간 더 부유했다.
아버지 사업실패…불우한 소년시절
셰익스피어의 생가는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에 있다. ‘스트랫퍼드 강가의 에이번’이라는 뜻이다. 셰익스피어는 그곳에서 1564년에 출생해 1616년에 사망한 실존 인물이다. 이곳 교회에는 셰익스피어의 출생기록과 사망기록 원본이 남아있고 묘지도 있다. 농산물 도매, 양모업을 하던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인구 2000~3000명 정도인 이곳의 읍장이었는데, 1577년 사업에 실패한 뒤 아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년시절을 파란만장하게 만들었다.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는 앤의 생가도 있으니 들를 기회가 있으면 셰익스피어와 앤의 생가를 모두 방문하기를 권한다.
정설이다. 첫 딸을 낳은 지 2년 뒤에 함넷과 주디스, 남녀 이란성 쌍둥이가 태어난다. 아들은 11세 때 물놀이를 하다 익사해 셰익스피어의 직계후손은 딸 쪽으로만 이어진다. 추송웅(1941~1985)은 그의 문집 겸 사진집 《빨간 피터의 고백》에서 “중앙대 연극영화과 시절 교내 공연 ‘베니스의 상인’ 오디션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극복하지 못하여 대사 없는 나팔수역을 맡게 되자, ‘좋다. 셰익스피어도 마구간 말지기부터 시작했는데…’라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썼다.
1586년부터 7년 동안은 셰익스피어의 생애에 관해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학자들은 이 기간을 ‘잃어버린 날들(the lost years)’이라고 부른다. 셰익스피어는 1586년쯤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런던에 진출,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으로 보인다. 출발은 배우였고(출연 프로그램이 남아있다) 1603년에는 제임스 왕의 직속단체라는 지위를 획득하며 극장 건축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1608년 모친 메리의 사망 이후 고향으로 낙향한 뒤 대저택을 짓고 전원생활을 즐기며 평안한 만년을 보냈다.
벼락출세한 까마귀였다는 설?
셰익스피어가 ‘잃어버린 날들’ 동안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마구간 말지기란 당대 어떤 공연장에도 존재한 직종이다. 요즈음의 감각으로 보자면, 손님들이 타고 온 차를 관리하는 주차요원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당대의 동료 극작가들은 셰익스피어가 대학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질투심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다지 높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로버트 그린(Robert Green, 1558?~1592) 같은 이는 한 서한에서 셰익스피어를 ‘벼락출세한 까마귀’라며 노골적으로 폄하한다. 이 편지의 발송 시점이 1592년인 점으로 보아 셰익스피어가 ‘잃어버린 날들’ 동안 런던 연극계에 진출해 작가로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럽 전체를 기준으로 한다면 일리가 있는 설. 셰익스피어 당시에는 런던이라는 도시 자체가 유럽의 변방이었다. 셰익스피어는 당시 선진국이었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베니스의 상인’과 ‘베로나의 두 신사’를 썼다. ‘오델로’의 배경도 베니스,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도 역시 이탈리아 베로나다. 베로나에 가면 줄리엣의 집이라는 관광명소가 있고 줄리엣 동상도 있는데 물론 완벽한 픽션이다. 기록에 보이는 최초의 어전 공연은 1594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앞에서 리처드 버베지 등과 함께 배우로 참여해 희극 두 편을 공연했다고 돼 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어전 공연을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셰익스피어 당시의 윤리를 오늘날과 같은 시각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베니스의 상인’ 한 작품만 놓고 보더라도 포오샤가 자신에게 청혼하러 온 모로코 왕의 피부색을 대놓고 멸시하는 독백이 있고, 법률적으로는 잘못이 없는 샤일록에 대해 감정적 보복으로 보이는 판결을 내리는 대목이 있다. 인종차별, 유대인에 대한 적의 등이 드러나는 것이다. 당대의 성향을 반영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런 부분은 도덕적으로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선머슴 같은 말괄량이 아가씨를 아내로 맞아 한 걸음 더 나아간 희한한 행동으로 신부의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한다는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그 내용 때문에 오늘날의 페미니스트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고 있다.
부인에게 침대 하나만 상속?
이 설이 사회적 표면으로 떠오른 시기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다. 당시 유럽에서는 동성애자의 권리회복 투쟁(주로 법적인 문제와 관련된)이 만연했는데, 당시 동성연애자는 자신들의 정당함을 입증하는 방편으로 역사상의 숱한 위인들, 예컨대 알렉산더 대왕이라든가 시저, 소크라테스, 플라톤, 시인 사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심지어는 프랜시스 베이컨까지 호모였다고 주장했다.
셰익스피어도 이 목록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장식하고 있는데, 동성애자들이 내세운 근거는 그의 소네트(sonnet) 시편 중에 동성애자의 혐의가 짙은 구절이 많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시의 내용이 작가의 생애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인지도 의문이고, 상징과 비유로 가득찬 시를 단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아들은 1596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재산의 거의 전부를 장녀에게 물려줬다. 부인에게는 침대 하나만을 유증했을 뿐이다. 그렇다. 부인에게는 재산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셰익스피어 부부의 불화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독자 여러분의 판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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