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4일 금요일

'영재학교'가 '영재성' 발목 잡는다

뉴시스

글자도 모르는 아이가 몇 번 읽어줬을 뿐인 동화책의 그림을 보며 내용을 줄줄 읊을 때, 가르치지도 않은 영어 동요를 곧잘 따라 부를 때, 고사리손에 쥐여준 색연필로 그림을 척척 그려낼 때, 피아노나 발레 학원 선생님에게 아이가 소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부모는 한 번쯤 생각한다.

‘내 아이가 혹시 영재?’

영재(英才). 개념은 모호하다. 사전적 의미는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나 시대마다, 사회마다 정의하는 것이 다르다. ‘스탠퍼드-비네’ 아이큐(IQ) 검사법을 만든 미국 심리학자 루이스 터먼은 IQ 135 이상이어야 한다고 했고, 세계적인 영재교육 석학 조지프 렌줄리 미국 국립 영재연구소장은 ‘평균 이상의 지능’과 ‘높은 창의성’ ‘높은 과제 집착력’을 꼽았다.

영재가 타고나는 것인지, 계발되는지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최근에는 대체로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선천적인 능력뿐 아니라 특별한 교육을 통해서도 능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시각이다.

◇초·중·고 1.81%가 영재교육 받아

국내에서는 2002년 영재교육진흥종합계획이 마련된 뒤 현재 3차(2013~2017) 계획까지 발표됐다. 영재교육진흥법은 영재교육 대상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타고난 잠재력을 계발하기 위해 특별한 교육이 필요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선발 방식은 IQ에서 다면평가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과거 암기 위주의 지식을 측정하거나 지필 검사 위주로 선발했다면 지금은 문제 해결력과 과제 집착력, 산출물 평가 등을 통해 다단계로 평가한다. 초·중등 영재교육기관이 ‘관찰 추천제’를 폭넓게 도입하는 것도 큰 변화 중 하나다.

교육부에 따르면, 국내 영재교육기관은 고등학교급인 영재학교(7개)와 과학고(20개)가 있다.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영재교육원(교육청 부설 260개, 대학 부설 81개)과 영재학급(2156개)까지 합하면 모두 2524개에 달한다. 영재학교·과학고는 정부가 주도해 운영하고 있다. 영재교육원은 교육청과 대학이, 영재학급은 각급 학교가 책임진다.

영재교육 대상자는 초등학생 5만7765명, 중학생 3만7109명, 고등학생 1만4656명 등이다. 전체 학생 수와 비교하면 차례로 2.14%, 2.35%, 0.82%에 해당한다. 국내에서 영재교육을 받는 전체 학생은 10만9530명으로 1.81% 수준이다.

◇“사교육 온상…영재교육이 ‘영재성’ 잃게 해”

“영재교육원이 아이의 잠재능력이나 창의성을 키워주기보다는 영재고나 과학고를 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되고 있습니다.”

학부형 박부흥씨의 중학교 1학년생 자녀는 과학을 좋아한다. 초등학교 4학년 영재학급을 거쳐 현재 대학 부설 과학영재원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박씨는 “영재원 아이들의 대부분은 이미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한 상태”라며 “그래서 수업시간에 차라리 수학 문제를 풀게 하는 게 낫다는 엄마들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중 1 정도면 수학·과학은 고교 과정을 이미 마치고, 각종 경시대회와 올림피아드 출전을 목표로 문제를 풀고 또 풀어야 하는 실정”이라며 “21세기 창의적인 과학인재 대신 문제 푸는 기계로 만들고 있다”고 토로했다. ‘영재학교’가 ‘입시 관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정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선임연구위원은 “창의성을 키우는 교육보다 명문대 입시를 위한 학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영재성을 살리는 교육은 사실상 이뤄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박재원 아름다운배움 부설 행복한공부연구소장은 “영재고와 과학고가 고교 입시를 부활시켰다”며 “교육을 초토화했다”고 맹비난했다. 과연 과장일까.

고2 학부모 김명희(가명)씨는 중1 기말 때 반에서 1등, 전교에서 11등을 한 자녀가 공부를 놓아버린 뒤 침대에만 누워있다”고 울먹였다. 그는 “모든 학원을 끊고 병원도 다녀봤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며 “검사 결과 IQ는 상위 0.1%인데 의욕과 동기부여가 최하위로 나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고1 학부모 윤수민(가명)씨는 “다음 주가 시험인데 아이가 게임만 하려고 한다. 공부에 흥미를 잃어 전교 상위권이던 성적도 점차 떨어졌다”며 “아이가 ‘초등학교 때 엄마 손에 이끌려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공부만 했다. 바보같이 살았다’고 하는데 가슴이 찢어졌다. 지금은 엄마 말은 아예 듣지도 않고 욕만 한다. ‘방을 따로 얻어서 혼자 살고 싶다’고 하는데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영재’를 향한 관심과 부러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지만, 경제적 풍요로움은 영재에 대한 갈증과 욕망을 부추겼다. 특히 ‘영재학교=명문대’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영재학교가 사교육의 온상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교육 역시 ‘영재성’을 발현하고, ‘창의성’을 키우는 것에서 멀어져 다음 단계 진학을 위한 과정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애초 목적도 변질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영재학교 4곳 졸업생 1829명 중 154명(8.7%)은 의예 계열 대학에 진학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과학고의 경우 올해 기준으로 5명 중 1명(19.3%)꼴로 의대에 입학했다. 과학기술 분야 인재 양성을 목표로 설립됐지만, 과학영재 육성보다 명문대로 가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선발 아닌 발굴…연속성 있는 교육 해야”

전문가들은 진짜 영재교육을 위해선 ‘선발’보다 ‘발굴’을 해야 하고, 연속성 있는 교육 시스템으로 영재성을 발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희현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연구센터 연구원은 “지금까지가 영재교육의 양적 팽창 시기라면 이제부터는 분야별 영재를 어떻게 선발하고 관리할지를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기”라고 밝혔다. 이어 “매년 학생을 선발하는 시스템에서 영역별 영재를 현장에서 발굴해 지속해서 교육·관리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영재와 (초)고도영재를 이원화해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한 현직 교사는 “신뢰성 있는 과정 평가 중심 영재선발 협의체를 만들어 공교육 내에서 1차 전형을 해야 한다”며 “다면적 융합적 요소가 반영된 영재성 평가, 1년 이상 관찰과 과정 중심 평가, 사교육 선행학습 관련 조사 등을 중심으로 평가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뉴시스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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