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6일 일요일

유럽의 부상 비결은 과학과 부(富)

15세기경 유럽은 다른 세계를 앞지르고 있었다. 비유럽 세계를 제압하고 500년 가까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유럽이 강국으로 등장한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날 유럽의 역사적 교훈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관심 속에서 점차 멀어지는 인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한국연구재단이 기획한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가 13일 서울 서초구 구민회관 강당에서 열렸다. 올해 마지막으로 열리는 석학강좌다.
이날 강연을 맡은 서울대 박지향 교수(서양사)는 유럽이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데에는 부에 대한 축적 의지, 그리고 항해술과 같은 과학혁명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의 강연을 요약 정리했다.
유럽은 다른 지역에 앞서 경제적 과학적 근대화가 시작돼
15세기가 접어들면서 유럽지역은 다른 세계를 제치고 세계 최대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유럽 내부의 국가들 간의 통제된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1500년 당시 유럽은 자주권을 가진 500여 국가들이 경쟁하는 춘추시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방법에 골몰하고 있었다. 부국강병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를 축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경제적인 근대화가 유럽에서 처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제도와 문화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들은 기존의 제도에 변화와 혁신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에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한 것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500여 개 국가들이 경쟁, 부국강병을 위해 외부로 눈 돌려
그들은 외부로 눈을 돌렸다. 그들에게 부국강병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는 해상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혁신을 뒷받침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과학과 기술이었다. 소위 근대과학혁명이 일어난 것도 이 당시의 일이다.
나침반이 발명되고 천문관측, 수학과 천문학의 발달로 유럽의 해상력을 강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선박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것은 카라벨이었다. 포르투갈이 만든 카라벨은 쾌속 범선으로 기존의 범선들은 바람을 이용해 항해했지만 이 범선은 맞바람을 안고서도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카라벨의 본래 용도는 포르투갈의 연안어선으로 이용되었으나 경쾌한 스피드와, 넓은 선체, 3개의 본마스트와 3장의 라틴세일을 장착한 이 선박은 헨리케 왕자의 항해사업으로 인하여 탐험항해용 주력 선박으로 선택되었다. 아프리카 서해안 항로개척과 희망봉 발견에 이르기까지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에 맞추어 견고함은 떨어지지만 겉면이 매끄럽고 넓은 선체를 건조할 수 있는 “카벨 이음”을 사용한 덕분에 길고 가벼우며 날씬한 선체를 가지고 있으며 3장의 삼각형 라틴세일 덕분에 바람을 거스르는 지그재그 항해가 가능해져 기존의 선박보다, 항해거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수학과 천문관측을 기반으로 한 항해술이 큰 역할을 해
대항해시대가 열린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항해가 마젤란 항해다. 1519년 9월 그는 다섯 척의 함선을 이끌고 신항로 개척 항해를 떠나다
어느 역사학자의 말마따나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유럽의 식탁 위의 풍경은 그야말로 단조로운 흑백이었다. 음식의 맛이라곤 싱겁거나 짜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던 유럽의 식탁이 지금처럼 다채로운 색깔과 그윽한 향기를 지닌 음식들로 가득 차게 된 계기는 바로 아시아 산 향신료의 도입이란 일대 사건이었다.
향신료는 원산지인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아랍 상인들을 거쳐 유럽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5세기 중반에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지중해 동부를 장악함으로써 유럽과 아시아 간의 육로무역이 단절되었다.
그 대안으로 대서양을 이용한 해상무역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동남아시아의 향료가 있는 제도까지 가는 뱃길을 개척하기 위해 바다로 나섰다. 실패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지만, 성공하면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해상무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선수를 친 쪽은 포르투갈이었다. 아프리카 서해안 탐사를 적극 지원한 엔리케 왕자(1394-1460)의 선구적인 노력의 결과로 1488년에는 바르톨로메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도착했고, 1498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에스파냐에서는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 도착함으로써 사실상 신대륙의 발견자가 되었다. 그리고 1519-1522년에 에스파냐에서는 사상 최초로 세계일주 원정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 중심에는 바로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있었다.
명나라 장화의 해상원정은 지속되지 않아
그러나 유럽에 앞서 중국의 해상력은 대단했다. 유럽보다 1세기 앞서 명나라시대 장화가 이룩한 항해는 유럽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대규모 항해였다. 317척의 배에 2만8000만 명의 선원을 동원했다 하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 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렇게 발달한 중국의 항해술은 정화가 인도에서 죽으면서 중단된다.
중국은 당시 분명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었다. 그런데 왜 유럽 나라들보다 뒤지게 되었을까? 유럽은 작은 여러 나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는 처지가 되니까 문명이 발달한 데 반해, 중국은 왕 한 명의 능력에 의해 전체가 좌우되다 보니까 왕의 능력에 따라 기복이 심하고 정책의 일관성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사상적인 이유도 있다. 서양에서는 현상이나 자연의 문제를 접근할 때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을 정복하려는 개념이 강한데 비해 동양은 조화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따라서 자연에 순응하는 개념이 많았다 .
서양 근대화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 혁명을 통해 왕정을 민주정으로 바꾸는 과정이 있었다. 이는 모든 사회나 정치가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쉽게 보면 왕보다는 나 개인이 먼저라는 개념이다.
서양의 개념에서 자연은 개척의 대상, 동양은 더불어 살 조화의 대상
동양은 정치적으로는 인간의 생각보다는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어긋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고, 자연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개념이 강했다.
당연히 왕도 민심을 잘 이끌고 자연 재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왕이 최고의 왕이라는 중국고전에서는 많이 이야기 한다. 왕이 잘못하면 가뭄이나 홍수가 난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렇다.
이러다 보니 자연의 물건을 인간에게 편하게 만들기 보다는 자연에서 얻어서 사용하고 다시 자연으로 보내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수학이나 기하학 같은 계산도 이미 서양에서 들어오기 전부터 발달되어 있었다. 이런 이론이 없다면 고층 탑이나 건물을 지을 수 없다..
그러나 단지 서양식의 관점에서 볼 때 근대화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의 관점에서는 이미 훨씬 전부터 진행되었던 것이 일정 시간을 중심으로  다른 문화가 전파되면서 관점이 많이 바뀌었을 뿐이다.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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