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토요일

조선 유학은 혁명이고 건국이념 중국의 아류가 아니었다

유학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조선시대의 철 지난 풍속, 삼강오륜의 경직된 윤리규범을 상기시킨다. 우리 것이 좋다고 무조건 선양하는 것이 아닌 한 왜 다시 옛날 일을 거론하느냐는 것이 통념이다. 이것은 나를 포함해서 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어떤 여성에게라도 다음과 같이 질문하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은 조선시대에 여자로 태어나서 살고 싶은가?” 아마도 대다수 여성들이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이게 유학의 현주소다.


▲ 중국 난징의 공자상





왜 우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유학의 사유를 탐색하려는 것일까? 과거로의 지적 여정이 미래를 위한 자원이 아니라면, 더구나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보다 자신 있고 당당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과거의 유산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달라도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옛일을 돌아보게 하는 원초적 이유다. 역사의 구조와 논리는 반복되는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비슷한 실수를 되풀이한다. 더구나 일대 문명의 전환기, 역사의 극적인 터닝 포인트라고 한다면 이것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이제 바야흐로 정치·경제·문화의 세계적 중심축이 지난 세기의 대국 미국으로부터 중국으로 선회 중이라고 많은 사람이 전망하고 있다. 인민폐의 위력이 십여 년 사이 달러화를 능가할 것이라는 경제 전망은 물론이려니와 민주주의·자유주의에 기반한 서구식 정치 권위에 대해서도 동양의 전통사유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강력히 일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국의 유학사상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 유교 혹은 유학은 문화 보수주의 사상으로 간주된다. 이미 1966년 이후 문화혁명의 거센 회오리바람을 겪고, 1980년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경제)만 잘 잡으면 된다)’이 회자된 이후 자본주의 시장논리조차 주저 없이 활용해 온 중국 상황에서 볼 때, 유학은 여전히 보수적 가치와 신념을 견지한 사유 체계로 간주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구악(舊惡)의 상징이요, 봉건주의의 화신인 ‘공가점(孔家店)’을 타도하자던 젊은 홍위병들의 격렬한 유학 비판은 어쩌면 아직도 중국 지성인들의 뇌리를 자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의 신자유주의, 신좌파 등 첨예한 현대사유의 동향에서 볼 때 이들의 유학 전통은 어쩔 수 없이 보수적 좌표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규정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유학에 대한 중국의 사회적 관심과 안목은 예전과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2002년 11월 중국인민대학에서 공자연구원을 창설하면서 성대한 개막식을 개최한 적이 있다. 당시 개막식에는 중국공산당 핵심간부뿐만 아니라 해외의 수많은 유력인사들이 방문했고, 공산당 이론지의 하나인 광명일보(光明日報)를 통해 중화민족의 영원한 정신을 상징하는 유학사상을 극적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2003년 전국 500만명 이상의 중국 가정이 참여한 호남성의 ‘전국아동경전송독회(全國兒童經典誦讀會)’도 세간의 큰 관심을 불러 모았으며, 중국유교협회를 중심으로 전통적 교육공간인 서원을 재창건하고 활성화하려는 움직임도 일었다. 유교경전을 암송하고 이해하는 전통 교과목들이 정식으로 중국 교육계에 수용되면서 정부 차원을 넘어 민간에서도 적극적으로 유학에 접근하는 다양한 현상이 발생했다. 광명일보의 중화정신 선양에 뒤이어 2004년 중국청년보(中國靑年報)에서도 당대 지식인들의 ‘갑신문화선언’을 대서특필하면서 앞서와 유사한 주장을 피력했다. 선언문에서는 서양의 개인주의·이기주의·물신숭배·악성경쟁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할 만한 대안으로 중국전통의 윤리성·이타성·인격성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사상자원을 당연히 자신들의 유학사로부터 찾았다. 이 같은 중국의 최근 사회 분위기는 유학과 한참 거리가 먼 급진사회주의 또는 신자유주의 계열의 중국 지식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유학 전통을 돌아보게 만들고 서양과 대결할 만한 중국의 전통모델을 모색하도록 추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과연 어떤가? 2007년 공영방송 KBS는 아시아 문명기획 ‘인사이트 아시아’라는 다큐멘터리를 몇 차례 내보낸 적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유교, 2500년의 여행’이라는 작품인데 방송 이후 ‘유교, 아시아의 힘’(예담출판사·2007)이라는 책으로도 출간되어 주목을 받았다. 2012년에도 수많은 학회에서 조선시대, 유학, 공공성, 공동체, 전통윤리와 교육 등 조선의 유학사상 관련 주제어와 테마가 온갖 학술 심포지엄과 포럼, 강연회장의 공공연한 쟁점으로 부상되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한국 문화의 세계 전파, 국가경쟁력 강화 등을 등에 업고 한국의 전통사상,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을 새로 보기 위한 지적 욕망이 일고 있다고 간단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물음에 손쉬운 답변을 금방 내놓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상의 문제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 사회에서의 유교 재발견이란 현상은 인접한 중국의 최신 동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강대국 중국의 정치·경제적 부상과 그들의 전통사상에 대한 관심에 편승해서 우리 역시 덩달아서 조선시대의 유학사상을 치켜세우는 것은 아닌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서구 학문이 부흥하면 과거의 전통유산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싸잡아 비판하고, 이제 서구가 점차 쇠락하는 듯하면 다시 문명의 전환기를 맞아 중국과 조선의 전통사상을 재조명해야 한다며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세계제국이었던 중국과 우리와의 관계는, 서양과의 얼마 되지 않는 백여 년의 시간을 뒤로하고 오늘의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다시 귀환한, 천년 이상의 오래 묵은 과거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사상적 측면에서 볼 때 대(對)서양 전략과 방책보다 대중국 전략이 우리에게 보다 더 세심한 주의와 반성을 요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7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서 고려가 한창 몽골제국의 정치적·문화적 지배를 받고 있을 무렵, 고려인 사이에서 몽골식 이름 짓기가 일대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가령 고려 26대 왕인 충선왕은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딸이었던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어머니였다. 고려시대 실록 자료를 살펴보면 그가 자신이 몽골인의 피를 이어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면서 ‘익지보례화(益知禮普花)’라는 몽골식 이름을 애용했던 것을 여러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탑실리(普塔失里)’라는 이름의 충혜왕, ‘팔사마타아지(八思麻朶兒只)’라는 이름의 충목왕 등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친원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던 왕들뿐만 아니라 변방의 신흥 무장세력에서 발원해 새 왕조를 건립한 이성계 가문 역시 이러한 당시의 유행을 추종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조부, 부친도 모두 ‘패안첩목아(悖顔帖木兒)’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 등 몽골 이름으로 개명하는가 하면 여·몽연합군의 대일본원정에 참여한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삼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수백 년 전 여말선초 때도 몽골제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글로벌스탠더드) 열풍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몽골 이름을 짓고 몽골로 유학 가고 몽골인과 혼인하고 급기야 대제국 몽골의 관료가 되거나 대학교수가 되는 것은 당대 지식인이 품을 수 있는 최고의 꿈이자 성공의 요건이었다. 최근 세계 기준이 된 아메리칸 스타일에 대한 요즘의 우리 감각도 과거를 돌아보면 결코 낯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보면 우리는 되돌아온 중국과의 관계에서 유학이란 문제를 보다 예민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강대국에 접한 우리의 지적 상태를 이와 같이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사상의 고유성, 오리지낼러티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이념적 순정주의 혹은 근본주의에 대한 집착은 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오히려 모든 사유는 접점과 변경지대에서 보다 창조적으로 재생산되고 재전유(再專有)된다.

이 점에서 여말선초의 유학은 사유의 경계점, 사상의 임계점에서 만들어진 혼종적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유학은 한편으로는 중국 성리학(性理學, 주자학·朱子學)의 연장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만의 독특한 성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제국과의 대면은 사대적이고 굴욕적인 정치 상황을 연출케도 하지만 달리 보면 가장 보편적인 세계정신, 즉 당대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파급시키는 실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고려 말에 성장한 신흥 관료지식인들(사대부·士大夫)은 제국의 경험, 즉 원나라가 전파한 세계주의에 공명하면서 고려의 오래된 권문세족들을 논리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고 급기야 새로운 이상국가에 대한 그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조선 건국에 적극 가담한 사대부들은 중국의 새로운 유학(신유학), 즉 주자학을 수입해서 재가공한 뒤 구왕조를 무너뜨리는 이념적 무기로 활용한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중국 주자학과도 성격이 다른 조선 지식인들의 지적 성향과 욕구를 읽어낼 수 있다.

중국 송나라 사대부들은 당대(唐代)에서부터 발달해온 과거제(科擧制)를 배경으로 중앙관계에 진출한 학자 관료들이다. 특권적인 신분세습제가 붕괴되고 구귀족들의 정치권력이 무너진 중국의 당송 변혁기 이후 이들 사대부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중앙집권화된 중국의 정치질서에 공적인 관료로 선발되어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또한 지방에 일정한 자작농을 소유한 중소지주층으로서 향촌의 경제운영과 교육정책 등에 깊숙이 간여한 지방관으로서도 활약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왕조국가에서 황제를 비롯한 어떤 권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발언을 구사할 정도로 사대부로서의 지적 자부심과 자존감이 강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유교이념으로 무장한 일군의 사대부들이 스스로 정치 주체가 되어 왕조를 무너뜨리는 일에 집단적으로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다. 송대 이후 유교 지식인들은 중앙권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황제권을 비판하는 등 권력비판에는 적극적이었지만, 여말선초의 정도전·조준 등에서 보듯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 권력과 연합,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원제국에서 수입해온 주자학을 공유하면서도,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중국에서 발원한 주자학을 변형시켰던 것을 알 수 있다.

변방의 소국, 어찌 보면 조선이나 오늘의 우리는 강대국의 틈새에서 언제고 편안할 날이 없는 긴장의 연속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양이 뜨면 서양을 좇고 어느새 문명의 전환기가 도래해서 중국이 뜨면 중국을 다시 좇아야 하는 피곤한 지적 운명이 변경(邊境)에 처한 우리의 불가피한 사상적 행보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강대국의 사상동향, 지적 패권의 자장(磁場)에 놓인 우리의 처지를 단순하게 평가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앞서 보았듯이 어떤 사상적 충돌과 접촉도 동일한 사유의 결과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의 유학, 조선 주자학을 단순히 중국 주자학의 아류나 속류로 폄하하는 것 자체가 이미 특정한 의도와 논리를 반영한 편향된 평가의 산물이다.

다음 회에 말하겠지만, 중국의 유학은 한대(漢代)와 원대(元代)를 통해 드러나듯이 정부의 비호하에 관학(官學)으로 입성하면서부터 그 생명력을 잃고 당대의 정치권력에 복무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주자학은 기존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신국가를 건설하는 건국의 이념으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변신, 자기분열하면서 왕조사회의 최고권력(王權)을 겨누는 이념적 예봉으로 성장했다. 스스로 권력의 정점에 섰던 초기의 건국 사대부들, 그리고 권력의 칼에 맞선 조선시대 대다수 사대부들의 의식세계는 중국 지식인의 내면과는 상당히 달랐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조선 유학을 되돌아보는 것은, 반복되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과거의 실책을 반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지,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며 더구나 서구인도 아닌 우리 스스로의 자화상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 유학의 거울에 비친 오늘의 우리 모습을 반추하면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이, 과거로 지적 여행을 떠나는 우리의 목표인 셈이다.

지금 중국에서 유학의 재등장에 주목하는 새로운 사유의 탐색자들은 스스로 정치유학 혹은 제도유학을 자신들의 기치로 내걸고 있다. 이것은 과거 대만과 영미권의 유학 연구자들이 서양제국주의의 강력한 무력 앞에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들면서 심성의 문제로, 내면세계로 침잠했던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사상적 반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과연 유학의 정치적 변신 혹은 제도와의 강력한 결탁이 미래 세대의 새로운 전망, 그것도 서양근대사유에 대한 대안이 되리라고 낙관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점은 중국의 사상적 변방에 놓인 우리만이 던질 수 있는 심각한 물음이다. 다시 한번 세계제국으로 변신하려는 중국은 유학을 자신들의 신중국모델, 서양에 내놓을 만한 정치사회적 대안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우리 역시 불가피하게 중국의 사상조류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지만 이제 우리의 물음은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

유학에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이천 년도 더 지난 유학의 생명을 새롭게 복원시킬 수 있을까? 이미 정치화된 유학의 한계상황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정치와 유학의 접속을 단순한 시선으로 낙관할 수만은 없다. 조선유학 수백 년의 역사 속에는, 이미 중국 유학과 중국 주자학의 전개에서 펼쳐진 유학의 권력화, 학문의 관학화가 초래한 사상적 경색에 대한 뼈아픈 자성이 담겨 있다. 유학은 오직 자기 스스로를 넘어섬으로써만이 새로운 시대에 부응할 만한 사상적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 이제 조선 유학의 첫 관문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수백 년의 지속적 사유실험을 통해 갱생해온 조선 유학의 정신사를 엿보게 될 것이다. 과거의 오래된 사유의 자산들을 들춰내 햇빛 아래 내어놓고 이제 그 진면모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적절한 시점이 도래했다. 특정한 강대국의 발호에 맞서,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적 사유경향에 저항하면서 자신을 재발견하는 조선 유학의 미로를 탐색해보자.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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