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계수 개발한 지니는 누구
소득불평등 등 논문 800편 “인구가 국력!” 한때 무솔리니와 손잡아
2012년은 ‘지니계수’가 세상 빛을 본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올해는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 세계 여러 나라가 양극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니계수는 소득불평등의 척도로 수없이 인용됐다. 탄생 100년이 됐지만 올해처럼 지니계수가 많이 언급된 적도 없겠다 싶을 정도다.
지니계수를 발표한 사람은 이탈리아 사람 코르라도 지니(1884~1965). 당시 지니는 칼리아리대학 통계학과장이었다. 칼리아리는 사르데냐섬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칼리아리대학은 1606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교육기관이다. 1912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 그런데 왜 지니계수가 발표된 곳이 이탈리아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이탈리아는 산업화 및 도시화가 급속히 일어나 남북 간, 계층 간 빈부격차가 심하게 벌어지기 시작한 때였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지역별 인구, 소득, 사망률, 출생률 등의 각종 조사를 실시하고 통계를 작성했다. 이때 칼리아리대학 통계학과장 지니가 발군의 실력으로,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지니계수를 창안했다.
코르라도 지니는 누구인가. 지니는 북부 이탈리아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지니를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학자’로만 기억하지만 사실은 통계학, 인구학 등 경제·사회학 전반에 걸쳐 상당한 학문적 업적을 남긴 석학이다.
그는 볼로냐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그는 법학자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 지니는 수학, 통계학,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를 접했다. 이를 바탕으로 지니는 통계학과 경제학의 두 분야로 연구를 집중하게 됐다. 그는 이탈리아의 사회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로 통계학을 이용했다. 최초의 저작인 ‘통계학적 관점에서 본 성(性)’에서 그는 통계학적 방법론을 이용해 출생 시의 성비는 유전적 특성을 갖고 있음을 규명했다.
지니는 사회과학자이면서도 항상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잃지 않았다. 모든 학문적 노력은 현실문제와 연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1920년 통계학 저널인 메트론(Metron)을 창간했다. 지니는 죽을 때까지 이 잡지의 편집을 맡았다. 그는 아무리 뛰어난 논문이라 하더라도 통계조사 자료가 없으면 절대로 게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고, 이를 고수했다.
지니는 1910년 칼리아리대학의 통계학과장이 됐다. 지중해의 큰 섬 칼리아리에서 지니는 뛰어난 능력을 펼쳤고, 이탈리아가 처한 특수한 경제상황 속에서 1912년 지니계수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지니계수가 주목받은 이후 그는 이탈리아 정부의 경제보좌역 및 국제연맹의 경제고문 등을 맡아 각종 사회·경제 현안의 해결에 관여했다. 특히 1차대전 이후에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 물자 공급, 부와 소득의 측정, 경제정책 등 각종 현안을 해소하는 데 참여했다.
지니는 1923년 로마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사회학 강좌를 시작했고, 통계학부도 신설했다. 또 1929년에는 인구문제를 생물학, 경제학, 사회학, 환경 등과의 연관하에서 연구하는 인구통계연구소를 창립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당시에는 매우 선구적인 것이었으며 2차대전 종전 이후에는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들이 그가 만든 것과 유사한 연구소들을 설립했다.
한편 지니가 당시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자 그를 이용하려 접근한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다. 무솔리니는 정권을 장악한 뒤 1926년 국가의 각종 통계를 조사하는 중앙통계국을 만들고 지니를 의장에 앉혔다. 중앙통계국은 다른 행정기관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기관으로 다른 기관에서 작성하는 각종 통계자료들을 보고받아 무솔리니에게만 보고하는 기관이었다.
지니가 무솔리니와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지니가 주장한 인구이론 때문이다. 지니는 통계학에서 출발한 경제학자이기도 했지만 인구학자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지니의 인구론은 바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신유기체설이었다. 문명이 발달한 민족의 인구 변화는 생물유기체와 같이 청춘기·장년기·노년기 등 3단계를 보내며, 청춘기에는 인구증가율이 높고, 장년기·노년기로 접어들면 낮아져서 결국 사멸한다는 것. 그러므로 멸망하지 않으려면 다른 젊은 민족과 섞여 인구를 보충받아야 하며, 그러지 못하면 결국 다른 젊은 민족에 정복을 당하고 만다는 내용이었다. 지니는 또 한 나라의 인구가 늘어나고 평화적으로 다른 나라에 이민을 할 수 없게 되면 팽창전쟁을 통해 인구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무솔리니는 스스로를 고대로마제국의 카이사르에 비유하며 제3의 로마를 건설하겠다고 큰소리칠 때였다. 대중에게는 인구 감소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결국 지니와 무솔리니는 인구가 바로 국력이며 최적의 인구는 최대의 인구라는 신념을 공유하게 된다. 무솔리니는 인구 증가를 위해 대가족에 보조금을 지급했다. 지니는 처음에는 이러한 무솔리니의 정책에는 반대했다. 대신 그는 생활환경 개선이나 인종 간 통합을 중시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무솔리니의 정책을 지지하게 된다. 이를 두고 과연 지니의 학자적 양심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권력을 좇아 변절한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무솔리니는 또 국제적 경제공황과 늘어나는 인구대책의 하나로 북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을 벌여나갔다. 이 때문에 지니의 신유기체설이 파시스트 정권의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지니와 무솔리니의 밀월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지니가 운영하는 중앙통계국에 대한 다른 행정기관들의 불만이 자주 제기됐다. 이와 관련, 무솔리니가 중앙통계국의 활동에 개입하는 일이 잦아지자 지니는 1932년 의장직을 사임하고 학계에서만 활동하게 된다. 그는 공직 사퇴 이후에도 정열적으로 활동을 벌였으며 학계로부터도 후한 평가를 받았다.
2차대전 종전 직후 지니는 무솔리니와 한때나마 가졌던 협력관계 때문에 조사를 받고 1년간 월급도 받지 못하고 대학에서 쫓겨났지만 결국 무죄 판결을 받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공부벌레인 지니는 소득불평등, 인구학, 국부, 노동문제 등 경제학 전반에 걸쳐서 평생 800여편의 논문을 남긴 석학이다. ‘휴먼캐피털’이라는 말도 그가 처음 사용했으며, 노동의 성격도 강요된 것에서 점차 임시적인 성격으로 변모해 나가리라고 일찍이 예견했다. 그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의 대학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강의활동을 펼쳤다. 미국 하버드대를 비롯해 이탈리아 안팎에서 받은 명예박사학위도 적지 않다.
그는 일중독자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밤 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 연구를 한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자신이 연구하는 동안에는 제자들도 함께 남아 연구할 것을 강요했다. 이 때문에 그는 도대체 언제 두 딸을 낳아 키웠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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