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세에 인생 반전 악덕기업주서 자선사업가로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했다”
▲ 젊은 시절의 록펠러 photo 21세기북스
1909년 미국 제일의 부호가 재단설립 신청서를 연방정부에 제출했다. 구비서류는 완벽했지만 미 의회는 재단 설립인가를 미적거리며 3년이라는 시간을 끌었다. 미국 행정부 내에 이 부자의 행동을 미심쩍어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탓이었다.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 부호를 겨냥해 쏘아붙인 말은 모든 것을 함축한다. “그가 얼마나 선행을 하든지 간에 재산을 쌓기 위해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는 없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13년 5월, 5000만달러의 출연금으로 재단이 탄생했다. 재단의 이름은 록펠러재단(The Rockefeller Foundation). 존 록펠러(1839~1937)가 설립한 록펠러재단은 이후 지금까지 교육·의학·과학·문화·예술 등의 분야에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 사람 중에도 록펠러재단의 신세를 진 사람이 여러 명 된다. 대표적 인물이 백남준이다. 1960년대 후반 독일과 일본을 거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가난한 예술가 백남준. 독일에서 비디오아트라는 신천지를 개척한 백남준이 뉴욕에서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로 인정받은 배경에는 록펠러재단의 후원이 있었다.
‘톱 오브 더 록’
2013년은 록펠러재단이 세상의 빛을 본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록펠러재단은 5번대로 420번지에 있다.
뉴욕에 처음 온 사람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 맨해튼 34번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전망대. 그렇다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올라가 본 사람이 뉴욕의 전망을 즐기고 싶다면 어디로 갈까. 그곳은 49번가와 52번가 사이에 있는 ‘톱 오브 더 록(Top of the Rock)’.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보다도 높은 록펠러센터 옥상 전망대를 가리킨다. ‘록펠러’를 줄여서 ‘록’이라고 부른다. 록펠러센터는 전망대 외에도 야외 스케이트장, 크리스마스트리로 유명하다. 야외 스케이트장과 크리스마스트리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수없이 등장한 명소.
전망대로 가려면 23달러를 내고 입장권을 산 뒤 20여분 줄을 서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검색대를 통과한 관람객은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줄을 선다. 이 공간의 벽면에는 존 록펠러의 업적이 사진과 함께 기술되어 있다. 녹음된 설명이 흘러나온다. 관람객 대부분은 이 같은 록펠러의 업적 앞에서 무한한 경의를 표하게 된다. 세계 최고의 부자이면서 위대한 자선사업가로 불리는 록펠러의 위업 앞에서 달리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록펠러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평가받는다. 2008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재산이 1010억달러, 록펠러는 3183억달러. 그러나 록펠러만큼 극단적 평가가 뒤섞인 사람도 드물다.
록펠러의 뿌리는 종교개혁과 깊은 관계가 있다. 조상은 프랑스 위그노(Huguenot) 신도.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독일로 가서 그곳에 터잡고 살았다. 이어 1720년 다시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대서양을 건넜다. 록펠러는 1837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록펠러가 태어난 시점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 노예 소유를 당연시하던 시대였다.
록펠러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건 부모와 교회였다.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와 어머니 일리자 록펠러. 어머니는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가장이면서도 끊임없는, 별의별 탕아 짓을 하고 다닌 인간. 아버지는 온다 간다 말 없이 가출하기 일쑤였다. 성폭행 혐의를 받아 집안이 야반도주한 적도 있었다. 밖에서 젊은 애인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기도 했다.
1855년 록펠러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는 25살이나 어린 여자를 집에 데리고 들어와 살았다. 한 집안에서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이 함께 사는 중혼(重婚) 가정. 악행은 난잡한 사생활로 끝나지 않았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구제불능의 사기꾼이었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닥터’라고 칭했다. 아버지는 엉터리 약을 조제해 무지한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병통치약이라고 속여 돈을 챙겼다. 속칭 돌팔이 의사였다. 아버지의 악행 일지(日誌)는 끝이 없다.
“누구든 믿지 마라”
록펠러는 일찍부터 어머니의 지도감독 아래 비즈니스를 익혔다. 일곱 살 때 칠면조를 키워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돈놀이를 해 이자 수입으로 돈을 불렸다. 사기꾼 아버지였지만 아들에게는 경제관념을 철저하게 심어줬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공짜로 돈을 주는 법이 없었다. 어린 시절 그는 사탕을 파운드 단위로 사다놓고 동생들에게도 이윤을 남기고 팔 정도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누구든 믿지 마라’는 생각을 주입시켰다. 그 결과 록펠러는 사업을 하면서 한 번도 사기를 당한 일이 없었다. 은행을 불신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록펠러가 그런 아버지를 한 번도 원망해본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론 처노가 쓴 ‘부의 제국 록펠러’에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교육시킨 흥미진진한 사례가 나온다.
“존이 어렸을 때 아버지 빌은 그에게 자신이 받아줄 테니 높은 의자에서 뛰어내리라고 부추기곤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받아 안아줄 듯 팔을 내밀고 있다가 내려버렸고, 존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빌은 아들에게 다시 한번 가르침을 상기시켰다. ‘기억하라고 했지. 어느 누구도 완전히 믿어선 안돼. 이 아빠마저도 말이야.’”
록펠러는 사업가로 대성한 뒤에도 아버지의 수많은 악행과 기행을 숨기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물론 아버지의 갖은 기행을 파헤쳐낸 것은 기자들과 전기작가들이었다.
부모 다음으로 록펠러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교회였다. 교회는 록펠러에게 “항상 정당한 방법으로 최대한 벌어서 베풀 수 있는 만큼 베푸는 것이 신앙인의 의무”라는 개념을 심어주었다. 부의 축적은 교회로부터 받은 신이 내린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 록펠러는 성적은 보통이었다. 하지만 숫자에 밝았고 특히 암산을 잘했다. 1855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다시 직업학교에 들어가 상업의 기초를 배운 뒤 그는 일자리를 잡기 위해 하루 6시간씩 구직활동에 썼다.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나는 매일 일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일자리를 찾는 일 말이죠. 나는 매일 그 일에 내 모든 시간을 쏟았습니다.”
1855년 9월 26일 마침내 잡화운송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뻤다. 월급은 1월 1일부터 받기 시작했지만 그는 취직한 날인 9월 26일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는 9월 26일을 ‘일자리의 날’로 정하고 평생 생일 못지않게 중시했다. 잡화운송회사에서 그는 몸에 밴 근검절약과 부지런함으로 돈을 모았다. 이렇게 8년이 지난 뒤인 1863년 그는 목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돈으로 클리블랜드 정유공장에 공동 투자했다. 이 시점은 자동차시대가 본격 개막되기 훨씬 전. 보통 사람은 석유가 ‘검은 황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870년 스탠더드오일을 세웠고, 1872년 클리블랜드에 있는 경쟁사 26개 중 22개를 6주 만에 흡수합병했다.
자기절제의 표본
1877년 서른여덟 살이 되었을 때 록펠러는 미국 정유산업의 90%, 원유 채굴의 3분의 1을 장악했다. 그는 사업 확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편법과 불법은 밥 먹듯 해치웠다. 정치인과 언론인에게 뇌물을 주는 것을 당연시했고 경쟁자를 파멸시키기 위해 스파이를 예사로 고용하기도 했다. 경쟁사의 파이프라인 건설을 방해하기 위해 파이프라인 통과 가능한 지역의 토지를 사들인 뒤 매각하지 않고 버텼다. 이른바 ‘알박기’였다. 노조탄압도 예사로 자행했다. 1914년 러들러학살사건이 발생했다. 록펠러 소유의 탄광에서 광부 2만여명이 파업을 일으켰고 진압 과정에서 20여명이 사망한 게 러들러학살사건이다. 경쟁자와 노동자에게 록펠러는 탐욕스러운 악덕 기업가, 자본주의가 낳은 가장 악독한 기업가였다.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보면 록펠러는 마르크스가 말한 끊임없는 착취로 노동자 계급의 피를 빨아먹어 종국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계기를 제공하는, 자본주의를 망하게 하는 악덕 기업가이자 최악의 범죄자였다. 록펠러는 부를 축적하기 위한 자신의 행동을 ‘정당한 방법’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록펠러는 자신이 원한을 산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침대 곁에 항상 총을 두고 잠을 잤다. 물론 이것이 그가 악행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후회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1913년 현역에서 은퇴할 때 그의 재산은 10억달러였다.
돈을 쓸어담는 데는 절제를 몰랐던 록펠러였지만 생활에서는 자기 절제의 표본이었다. 그는 평생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늘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매일매일의 개인 회계 장부를 작성했다. 1센트의 출납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회계장부가 그의 일기였다. 그 많은 부를 갖고도 아내 외에는 다른 여자에 관심이 없었다. 아내 로라 스펠먼 역시 남편과 모든 게 비슷했다. 부부는 술이 나오는 파티나 행사에는 아예 가지 않았다. 수입의 10분의 1을 교회에 헌금한다는 십일조를 평생토록 지켰다.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다”
미국은 언론자유의 나라. 록펠러의 마각을 폭로한 것은 아이다 타벨(1857~1944)이라는 기자였다. 아이다 타벨은 스탠더드석유회사가 저지른 갖가지 만행을 심층 취재해 1902~1905년 잡지 ‘매클루어’에 ‘스탠더드석유회사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19회 장기연재했다. 탐사보도의 효시로 불리는 이 보도로 미국 사회는 거부 록펠러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
스크루지보다도 더 악독하게 축재를 하던 록펠러. 그런 그가 자선에 눈을 뜬 것은 55세 되던 1894년이었다. 의사로부터 1년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최종 검진을 위해 병원에 들어섰다. 침울한 상태에서 병원 로비에 들어섰을 때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건강하던 평소 같았으면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를 액자의 글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이 말이 얼음장 같았던 그의 가슴을 녹였다. 록펠러는 마음속으로 전율을 느꼈고, 어느덧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흥건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을 때 록펠러는 병원 원무과에서 입원비 문제로 소란이 벌어진 것을 목격했다. 돈이 없는 어느 어머니가 어린 딸을 입원시켜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록펠러는 비서를 시켜 입원비를 대납하게 했다. 물론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이 소녀가 목숨을 건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고 그때의 심정을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다.”
이날 이후 록펠러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새로 태어나는, 제2의 인생을 살게 된다. 비로소 나눔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 1897년부터 그의 자선은 본격화된다. 하지만 그의 악행을 더 많은 기간 지켜본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록펠러는 자선사업을 지속적으로 체계화할 생각으로 1913년 록펠러재단을 세웠다. 재단 헌장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널리 세계에서 인간의 안녕을 도모한다(Promote the well-being of mankind throughout the world)’, 록펠러 센터 1층 로비 벽면에는 헌장 내용이 붙어 있다.
미 최고의 명문가문으로
록펠러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1835~ 1919)와 함께 ‘과학적 기부’라는 개념을 만든 선구자로 평가된다. 록펠러는 고아원, 학교, 병원 등에 후원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선사업에 기업운영방식을 도입했고 이것이 효과를 발휘해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1889년에 시카고대를 설립하고, 1901년에 록펠러대를 세웠다. 시카고대와 록펠러대는 지금까지 각각 87명, 2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록펠러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스펠맨대학을 후원했다. 스펠맨대학은 남북전쟁 후 해방된 노예와 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건립된 학교였다. 비록 록펠러 자신이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 젊은날을 보냈지만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노예에 대한 연민이 이 학교를 후원하게 만들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휘트니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과 함께 뉴욕의 자랑이다. 그런데 뉴욕현대미술관이 1927년 록펠러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백남준이 존 케이지, 오노 요코 등과 함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전위예술운동의 하나인 플럭서스(Fluxus)운동을 할 때의 포스터들을 모두 소장하고 있는 곳이 뉴욕현대미술관이다.
록펠러는 앞서 언급한 대로 자기 절제의 대명사였다.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고 골프를 하지 않다가 60세에 처음으로 손을 댔다. 이후 골프에 빠져 하루 6시간 이상 골프를 즐겼다.
록펠러의 또 다른 행운은 자식을 잘 키웠다는 점이다. 록펠러 가문은 케네디 가문과 함께 미국 최고의 명문 가문으로 꼽힌다. 록펠러는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경제 관념 교육을 철저하게 했다. 용돈은 반드시 심부름이나 집안일을 해야만 줬다. 유명한 일화 한 토막. 파리 한 마리 잡으면 3센트, 음악 연습을 하면 1시간당 5센트, 연필을 깎으면 10센트 하는 식이었다.
이런 결과 외아들 록펠러 2세(1874~1960)는 아버지보다 더한 금욕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평생을 아버지의 업적을 알리기 위한 일에 쏟아부었다. 당대 최고의 홍보전문가를 동원해 아버지 이미지를 바꾸는 작업에 돈을 쏟아붓기도 했다.
록펠러 2세는 5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은 록펠러 가문을 발판 삼아 자기 분야에서 성공했다. 차남 넬슨(1908~1978)은 대통령 보좌관, 뉴욕주지사, 부통령을 역임하며 한때 대통령을 꿈꾸기도 했다. 3남 로렌스(96)는 항공업과 원자력사업에 뛰어들어 초기 환경운동의 중심적 인물이 됐다. 4남 윈스롭(1912~1973)은 아칸소주지사를 역임했고, 막내 데이비드(91)는 체이스맨해튼은행의 지배주주가 된다.
지금 ‘톱 오브 더 록’을 찾는 세대는 록펠러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 잘 모른다. 록펠러의 삶은 총체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록펠러는 98세로 숨을 거두기 직전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다.”
▲ 젊은 시절의 록펠러 photo 21세기북스 |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13년 5월, 5000만달러의 출연금으로 재단이 탄생했다. 재단의 이름은 록펠러재단(The Rockefeller Foundation). 존 록펠러(1839~1937)가 설립한 록펠러재단은 이후 지금까지 교육·의학·과학·문화·예술 등의 분야에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 사람 중에도 록펠러재단의 신세를 진 사람이 여러 명 된다. 대표적 인물이 백남준이다. 1960년대 후반 독일과 일본을 거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가난한 예술가 백남준. 독일에서 비디오아트라는 신천지를 개척한 백남준이 뉴욕에서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로 인정받은 배경에는 록펠러재단의 후원이 있었다.
‘톱 오브 더 록’
2013년은 록펠러재단이 세상의 빛을 본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록펠러재단은 5번대로 420번지에 있다.
뉴욕에 처음 온 사람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 맨해튼 34번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전망대. 그렇다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올라가 본 사람이 뉴욕의 전망을 즐기고 싶다면 어디로 갈까. 그곳은 49번가와 52번가 사이에 있는 ‘톱 오브 더 록(Top of the Rock)’.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보다도 높은 록펠러센터 옥상 전망대를 가리킨다. ‘록펠러’를 줄여서 ‘록’이라고 부른다. 록펠러센터는 전망대 외에도 야외 스케이트장, 크리스마스트리로 유명하다. 야외 스케이트장과 크리스마스트리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수없이 등장한 명소.
전망대로 가려면 23달러를 내고 입장권을 산 뒤 20여분 줄을 서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검색대를 통과한 관람객은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줄을 선다. 이 공간의 벽면에는 존 록펠러의 업적이 사진과 함께 기술되어 있다. 녹음된 설명이 흘러나온다. 관람객 대부분은 이 같은 록펠러의 업적 앞에서 무한한 경의를 표하게 된다. 세계 최고의 부자이면서 위대한 자선사업가로 불리는 록펠러의 위업 앞에서 달리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록펠러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평가받는다. 2008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재산이 1010억달러, 록펠러는 3183억달러. 그러나 록펠러만큼 극단적 평가가 뒤섞인 사람도 드물다.
록펠러의 뿌리는 종교개혁과 깊은 관계가 있다. 조상은 프랑스 위그노(Huguenot) 신도.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독일로 가서 그곳에 터잡고 살았다. 이어 1720년 다시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대서양을 건넜다. 록펠러는 1837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록펠러가 태어난 시점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 노예 소유를 당연시하던 시대였다.
록펠러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건 부모와 교회였다.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와 어머니 일리자 록펠러. 어머니는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가장이면서도 끊임없는, 별의별 탕아 짓을 하고 다닌 인간. 아버지는 온다 간다 말 없이 가출하기 일쑤였다. 성폭행 혐의를 받아 집안이 야반도주한 적도 있었다. 밖에서 젊은 애인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기도 했다.
1855년 록펠러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는 25살이나 어린 여자를 집에 데리고 들어와 살았다. 한 집안에서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이 함께 사는 중혼(重婚) 가정. 악행은 난잡한 사생활로 끝나지 않았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구제불능의 사기꾼이었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닥터’라고 칭했다. 아버지는 엉터리 약을 조제해 무지한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병통치약이라고 속여 돈을 챙겼다. 속칭 돌팔이 의사였다. 아버지의 악행 일지(日誌)는 끝이 없다.
“누구든 믿지 마라”
록펠러는 일찍부터 어머니의 지도감독 아래 비즈니스를 익혔다. 일곱 살 때 칠면조를 키워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돈놀이를 해 이자 수입으로 돈을 불렸다. 사기꾼 아버지였지만 아들에게는 경제관념을 철저하게 심어줬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공짜로 돈을 주는 법이 없었다. 어린 시절 그는 사탕을 파운드 단위로 사다놓고 동생들에게도 이윤을 남기고 팔 정도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누구든 믿지 마라’는 생각을 주입시켰다. 그 결과 록펠러는 사업을 하면서 한 번도 사기를 당한 일이 없었다. 은행을 불신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록펠러가 그런 아버지를 한 번도 원망해본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론 처노가 쓴 ‘부의 제국 록펠러’에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교육시킨 흥미진진한 사례가 나온다.
“존이 어렸을 때 아버지 빌은 그에게 자신이 받아줄 테니 높은 의자에서 뛰어내리라고 부추기곤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받아 안아줄 듯 팔을 내밀고 있다가 내려버렸고, 존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빌은 아들에게 다시 한번 가르침을 상기시켰다. ‘기억하라고 했지. 어느 누구도 완전히 믿어선 안돼. 이 아빠마저도 말이야.’”
록펠러는 사업가로 대성한 뒤에도 아버지의 수많은 악행과 기행을 숨기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물론 아버지의 갖은 기행을 파헤쳐낸 것은 기자들과 전기작가들이었다.
부모 다음으로 록펠러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교회였다. 교회는 록펠러에게 “항상 정당한 방법으로 최대한 벌어서 베풀 수 있는 만큼 베푸는 것이 신앙인의 의무”라는 개념을 심어주었다. 부의 축적은 교회로부터 받은 신이 내린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 록펠러는 성적은 보통이었다. 하지만 숫자에 밝았고 특히 암산을 잘했다. 1855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다시 직업학교에 들어가 상업의 기초를 배운 뒤 그는 일자리를 잡기 위해 하루 6시간씩 구직활동에 썼다.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나는 매일 일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일자리를 찾는 일 말이죠. 나는 매일 그 일에 내 모든 시간을 쏟았습니다.”
1855년 9월 26일 마침내 잡화운송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뻤다. 월급은 1월 1일부터 받기 시작했지만 그는 취직한 날인 9월 26일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는 9월 26일을 ‘일자리의 날’로 정하고 평생 생일 못지않게 중시했다. 잡화운송회사에서 그는 몸에 밴 근검절약과 부지런함으로 돈을 모았다. 이렇게 8년이 지난 뒤인 1863년 그는 목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돈으로 클리블랜드 정유공장에 공동 투자했다. 이 시점은 자동차시대가 본격 개막되기 훨씬 전. 보통 사람은 석유가 ‘검은 황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870년 스탠더드오일을 세웠고, 1872년 클리블랜드에 있는 경쟁사 26개 중 22개를 6주 만에 흡수합병했다.
자기절제의 표본
돈을 쓸어담는 데는 절제를 몰랐던 록펠러였지만 생활에서는 자기 절제의 표본이었다. 그는 평생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늘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매일매일의 개인 회계 장부를 작성했다. 1센트의 출납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회계장부가 그의 일기였다. 그 많은 부를 갖고도 아내 외에는 다른 여자에 관심이 없었다. 아내 로라 스펠먼 역시 남편과 모든 게 비슷했다. 부부는 술이 나오는 파티나 행사에는 아예 가지 않았다. 수입의 10분의 1을 교회에 헌금한다는 십일조를 평생토록 지켰다.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다”
미국은 언론자유의 나라. 록펠러의 마각을 폭로한 것은 아이다 타벨(1857~1944)이라는 기자였다. 아이다 타벨은 스탠더드석유회사가 저지른 갖가지 만행을 심층 취재해 1902~1905년 잡지 ‘매클루어’에 ‘스탠더드석유회사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19회 장기연재했다. 탐사보도의 효시로 불리는 이 보도로 미국 사회는 거부 록펠러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
스크루지보다도 더 악독하게 축재를 하던 록펠러. 그런 그가 자선에 눈을 뜬 것은 55세 되던 1894년이었다. 의사로부터 1년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최종 검진을 위해 병원에 들어섰다. 침울한 상태에서 병원 로비에 들어섰을 때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건강하던 평소 같았으면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를 액자의 글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이 말이 얼음장 같았던 그의 가슴을 녹였다. 록펠러는 마음속으로 전율을 느꼈고, 어느덧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흥건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을 때 록펠러는 병원 원무과에서 입원비 문제로 소란이 벌어진 것을 목격했다. 돈이 없는 어느 어머니가 어린 딸을 입원시켜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록펠러는 비서를 시켜 입원비를 대납하게 했다. 물론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이 소녀가 목숨을 건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고 그때의 심정을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다.”
이날 이후 록펠러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새로 태어나는, 제2의 인생을 살게 된다. 비로소 나눔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 1897년부터 그의 자선은 본격화된다. 하지만 그의 악행을 더 많은 기간 지켜본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록펠러는 자선사업을 지속적으로 체계화할 생각으로 1913년 록펠러재단을 세웠다. 재단 헌장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널리 세계에서 인간의 안녕을 도모한다(Promote the well-being of mankind throughout the world)’, 록펠러 센터 1층 로비 벽면에는 헌장 내용이 붙어 있다.
미 최고의 명문가문으로
록펠러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스펠맨대학을 후원했다. 스펠맨대학은 남북전쟁 후 해방된 노예와 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건립된 학교였다. 비록 록펠러 자신이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 젊은날을 보냈지만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노예에 대한 연민이 이 학교를 후원하게 만들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휘트니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과 함께 뉴욕의 자랑이다. 그런데 뉴욕현대미술관이 1927년 록펠러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백남준이 존 케이지, 오노 요코 등과 함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전위예술운동의 하나인 플럭서스(Fluxus)운동을 할 때의 포스터들을 모두 소장하고 있는 곳이 뉴욕현대미술관이다.
록펠러는 앞서 언급한 대로 자기 절제의 대명사였다.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고 골프를 하지 않다가 60세에 처음으로 손을 댔다. 이후 골프에 빠져 하루 6시간 이상 골프를 즐겼다.
록펠러의 또 다른 행운은 자식을 잘 키웠다는 점이다. 록펠러 가문은 케네디 가문과 함께 미국 최고의 명문 가문으로 꼽힌다. 록펠러는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경제 관념 교육을 철저하게 했다. 용돈은 반드시 심부름이나 집안일을 해야만 줬다. 유명한 일화 한 토막. 파리 한 마리 잡으면 3센트, 음악 연습을 하면 1시간당 5센트, 연필을 깎으면 10센트 하는 식이었다.
이런 결과 외아들 록펠러 2세(1874~1960)는 아버지보다 더한 금욕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평생을 아버지의 업적을 알리기 위한 일에 쏟아부었다. 당대 최고의 홍보전문가를 동원해 아버지 이미지를 바꾸는 작업에 돈을 쏟아붓기도 했다.
록펠러 2세는 5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은 록펠러 가문을 발판 삼아 자기 분야에서 성공했다. 차남 넬슨(1908~1978)은 대통령 보좌관, 뉴욕주지사, 부통령을 역임하며 한때 대통령을 꿈꾸기도 했다. 3남 로렌스(96)는 항공업과 원자력사업에 뛰어들어 초기 환경운동의 중심적 인물이 됐다. 4남 윈스롭(1912~1973)은 아칸소주지사를 역임했고, 막내 데이비드(91)는 체이스맨해튼은행의 지배주주가 된다.
지금 ‘톱 오브 더 록’을 찾는 세대는 록펠러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 잘 모른다. 록펠러의 삶은 총체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록펠러는 98세로 숨을 거두기 직전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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