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곡 이이의 초상 |
율곡과 그 후예인 서인 및 노론의 정치적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바로 ‘동국십팔명현(東國十八名賢)’의 선정이다. 이것은 공자에서부터 공문십철(孔門十哲), 중국 송대육현(宋代六賢), 신라·고려·조선의 18명을 선정해 성균관의 공자묘에서 제사 지낸 일을 말한다. 동국명현 가운데 조선시대 인물의 절반 이상이 율곡의 학우이거나 문인 제자였다. 문묘종사(文廟從祀), 종묘배향(宗廟配享), 서원향사(書院享祀) 등에 중요인물로 선정되는 것은 정치와 학문이 연계된 조선사회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얻는 지름길이었다. 후손과 가문에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었다.
생전에 이이가 누렸던 유명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후 이이에 기댄 여러 정파와 학파도 모두 그를 통해 권위를 누렸다. 이런 현상은 단순한 정치역학적 문제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지식인이 율곡에 빗대어 정견을 피력하고 사유를 개진할 만큼 우선 이이 본인의 철학이 폭넓고 깊었다. 제왕의 정치학 백서로 불릴 만한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는 조선시대 제왕학 수업인 경연(經筵)에서 국정 교과서로 채택된, 조선 지식인이 쓴 유일한 책이다. 당태종의 ‘정관정요’와 남송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교과서 삼아 왕정 체제를 논하던 조선 지식인들은 16세기에 이르러 처음 국내본 정치학 교재를 만든 것이다. ‘성학집요’는 복잡한 ‘대학연의’ 체제를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사서육경을 선별해 조선 문맥에 맞게 재구성함으로써 왕과 사대부의 실제 정치 운영을 뒷받침했다.
율곡의 ‘성학집요’가 ‘대학(大學)’ 텍스트를 조선 방식으로 풀이한 것이라면, 그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은 소학동자로부터 사림파 지식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수신 교과서 ‘소학(小學)’을 우리 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격몽요결’은 인조 때 간행되어 지방 8도 향교(鄕校)에 배포되었다. 율곡 행장(行狀)을 쓴 제자 김장생(金長生)이 훗날 예학(禮學)의 대가로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대신할 ‘가례집람(家禮輯覽)’을 만든 것까지 포함하면, 바야흐로 율곡과 그 제자에 이르러 조선풍의 정치·수신 교과서가 완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이념과 통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율곡은 자기 학문 인생에서도 일종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인물이다.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린 그는 요즘으로 치면 국가고시에서 아홉 번 전국 수석을 차지한 조숙한 천재였다. 남들은 한 번도 어려운 국가고시를 패스하는 건 물론 9관왕을 차지한 것이다. 강릉 오죽헌의 외가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6살 무렵 상경한 뒤 어머니 사임당 신씨로부터 교육을 받고 성장했던 율곡의 천재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성학집요’와 ‘격몽요결’ 등 이이의 중요한 작품 대부분이 뒷날 조선 관학의 교과서로 채택된 것에는 이런 개인적 이력도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16세(1551년) 때 삶의 버팀목이던 모친 신사임당이 사망하자 율곡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삼년상을 치른 뒤 그가 금강산에 입산해 일 년간 정진한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이이가 입산했던 것과 20세에 환속한 이유에 대해선 아직도 이유가 분분하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본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유학에 다시 매진할 무렵 그가 쓴 한 통의 서신에서 뒷날 율곡의 세계관을 특징 짓는 중요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성인과 보통 사람은 모두 똑같은 본성(性)을 가지고 있으니 두 사람이 다른 것은 오직 기(氣) 때문이다. 내가 미친 지경에 이른 것은 기 때문이지 성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난날 잘못은 거울에 낀 먼지, 물에 섞인 진흙과 같아서 먼지와 진흙만 제거하면 거울이 다시 깨끗해지고 물이 맑아진다고 믿는다.”(율곡전서·‘別洪表叔序’) 한때 불교의 허망함에 빠진 과오를 변명한 말이지만 율곡의 이기론(理氣論)과 인성론을 보여주는 중요한 글귀라고 볼 수 있다. 마음(心)에 내재한 이(理)를 가리키는 성(性)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기의 상태가 바뀜에 따라 사람의 인격 수준이 달라지지만, 결국 기를 바꿈으로써(變化氣質) 원래 성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로부터 얼마 뒤 율곡은 강릉으로 돌아가기 전 고향에 퇴거해 있던 이황을 예방해 학연을 맺었다. 이미 50대 중반을 넘긴 퇴계는 당대 사림의 종장으로 불렸고 총명한 후배 율곡을 맞아 ‘후생가외(後生可畏)’라 감탄했다. 하지만 퇴계 문인의 기록에 의하면 첫 만남에서 퇴계는 지나치게 영민한 이이에게 다음처럼 경계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마음가짐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 조정에 나가선 일 만들기 좋아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퇴계전서·言行錄 類編) 의욕이 솟구쳐 조광조 일파처럼 과도할까 염려한 것이고 율곡의 조숙한 재능이 오히려 학문에 해가 될까 우려했던 것이다. 첫 만남 후 이들은 수차례 서신을 교환했는데 자기 소신이 강했던 율곡은 좀처럼 처음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도덕적 감정인 사단(四端)과 아직 선악이 나뉘지 않은 칠정(七情)의 감정을 구별하기 위해 퇴계가 이(理)와 기(氣)의 발동을 따로 인정한 것과 달리, 율곡은 기가 발동하면 이가 올라타는 한 가지 방식, 즉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만을 인정했다. 무위무형(無爲無形)한 이와 유위유형(有爲有形)한 기를 구분해서 오직 기만이 움직이고 이는 작용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기가 음양으로 번갈아 움직이는 것은 누가 그렇게 시켜서가 아니라 기의 구조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했다. 이이는 ‘이가 기를 올라탄다(乘)’는 말도 어떤 구체적 작용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기를 통해 이가 자기 모습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았다.(율곡전서·‘성호원에 답하다’) 기에 대한 율곡의 집중적 관심은 이(理) 혹은 성(性)을 담는 그릇과 같은 인간의 마음(心), 즉 기로 이루어진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 더 주목함으로써 인간의 능동적 노력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율곡이 사단과 칠정 모두 예외 없이 기가 움직여서 이가 드러나게 된 동일한 범주의 감정이라고 본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퇴계는 두려움과 삼감의 경(敬) 공부를 통해 초월적 상제의 명령이라 할 만한 절대적 이(理)가 우리 마음에 나타날 것을 기대했지만, 율곡은 이의 발동을 기다리는 이런 소극적 자세가 인간의 의지적 노력을 폄하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오로지 기 또는 기질(氣質)의 변화에 따라 본성의 실현이 좌우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맑은 청기(淸氣) 상태면 마음 안의 본성(性)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고 어두운 탁기(濁氣) 상태면 기의 작용 때문에 본성이 가려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다고 봄으로써 결국 본성을 제대로 실현했는지 못했는지의 윤리적 문제가 기의 상태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율곡은 성혼에게 답한 글에서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공자 말을 빌려 도(道·理)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 마음(心·氣)이 움직임으로써 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로 이루어진 마음(心)과 이 마음의 의지작용(意)을 강조함으로써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자기 기질을 변화시키는 공부에 착수해 완전한 인격체(聖人)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기에 대한 관심 그리고 마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지닌 것은 율곡 자신이 처한 시대 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열 살 무렵 을사사화를 마지막으로 사림파 지식인이 훈척세력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난 듯한 대망의 시대에 사환기를 맞았다. 30대 초반 명종의 승하와 선조 즉위를 겪으며 사림파가 도도히 정국 주도권을 잡아갈 때 이이는 활약한 것이다. 지식인의 주체적 노력(氣發)이 유학이념과 목표를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理發)는 믿음과 자부심은 이런 정황에서 가능했다고 봐야겠다. 극심한 사화의 한복판을 거닌 퇴계가 사단과 칠정, 이발과 기발, 도심과 인심, 군자와 소인의 엄격한 구분을 고수하며 사(私)를 누르고 공(公)을 이루는 긴장과 갈등의 심리를 강조했다면, 율곡은 단지 우리가 자신의 기를 조율하고 교정함으로써 이(理)의 실현을 장악할 수 있다는 믿음과 사명감을 피력했다.(성학집요·‘修己’)
여기서 율곡의 유명한 ‘이통기국설(理通氣局·이는 보편적으로 모두 동일하고 기는 개별 사물마다 제한되어 다르다는 것)’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율곡은 이가 보편적 원리지만 기를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기는 시공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이를 실현하는 기의 적절한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가 정국 운영에서 ‘때에 따라 변통해야 하고(隨時變通)’ ‘상황에 맞춰 마땅하게 조치해야 함(因時而制宜)’을 강조한 것도, 이(理)를 실현하는 기의 모습이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조종(祖宗)의 법도라고 해도 백성을 불편하게 만들면 반드시 변통해야 하고 전대 법규를 그대로 고수할 게 아니라 오히려 경장(更張·점진적 개혁)하라고 역설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 등 경세(經世)의 요체를 밝힌 모든 저작에서 율곡은 경장의 불가피성을 주장했다. 그의 입장은 단순히 백성을 마음으로 아끼는 애민(愛民)의 차원을 넘어 구체적 법제와 제도를 마련해 안민(安民)하는 확실한 방책을 세우라고 촉구한 것으로 이어졌다.
국한된 기의 상황에 따라 변통할 수밖에 없다고 본 이이의 정치적 태도는 권도(權道)와 의리(義理), 시비(是非)와 이해득실의 문제에서 독특한 관점을 취하게 했다. “권(權)에는 정해진 법도가 없으니 중(中)의 상태를 얻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의(義)에도 일정한 법식이 없으니 마땅함에 부합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중을 얻고 마땅함에 부합되면 옳음(是)과 이로움(利)도 그 가운데 있다. 진실로 나라를 편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모두 할 만한 일이다.…간혹 어떤 일이 시비가 분명하지 않고 이해가 분별하기 어렵다면 그 경중과 완급을 살필 뿐이다.”(율곡전서·時弊七條策) 시폐를 개정하기 위해 내놓은 율곡의 발언을 보면 도학자적 선악 관념이 예상보다 약한 것을 알 수 있다. 의리에 대해서조차 확고하게 정해진 법식이나 기준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오히려 율곡은 시비분별에만 함몰될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명확히 알아서 도덕성과 효율성 사이의 적절한 조율·배합을 산출해야 한다고 본 듯하다. 선배 도학자들이 선악과 시비관념에 철두철미했고 일보 후퇴도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시대와 사유의 상당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율곡 스스로 창업·수성·경장기를 구분했듯이 이미 단순한 원칙의 고수만으론 정치 운영이 곤란하다고 판단한 때였다.(성학집요·爲政)
그러나 이이의 이런 관점은 일시적 대증요법은 아니었다. 율곡은 이미 윤리적 선악 판단에 있어 퇴계를 종주로 한 일군의 학자들과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37세(1572년)부터 이이는 성혼과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둘러싼 논쟁을 아홉 차례 벌였고 1582년에는 선조의 명으로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을 지어 바쳤다. 성혼은 주희의 ‘중용장구’ 서문과 이황 관점에 따라 인심이란 형기의 욕망에서 발동한 것이고 도심이란 본성에서 기원한 마음이므로 양자가 다를 뿐만 아니라 인심을 도심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보았다.(우계집·‘與栗谷論理氣第一書’) 그러나 율곡은 인심·도심이 두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의 마음이며, 마음이 작동하여 성(性)을 정(情)으로 표출하는 과정에서 기질 혹은 형기의 방애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차이에 의해 임시적으로 인심 혹은 도심으로 불린다고 주장했다. 다만 인심·도심은 사단·칠정과 달라서 단순한 수동적 감정(情)이 아니라 의지작용(意)을 수반한 마음이기 때문에 성의(誠意·의지를 정성스럽게 가꾸는) 공부를 통해 탁한 기를 맑은 기로 기질을 변화시키면 언제든 도심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성혼과의 논쟁에서 드러난 율곡의 관점을 ‘인심도심상위종시설(人心道心相爲終始說)’이라고 부른다. 마음이 도심에서 시작해도 중간에 사의가 개입되면 인심이 되고 인심이라 해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면 도심으로 전화한다고 봄으로써 두 마음이 실체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장한 것이다.(栗谷全書·‘答成浩原’). 인심·도심이 원환처럼 맞물려 시작과 끝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듣도록 하면 결국 인심이 도심이 된다는 것, 인심·도심이 모두 천리(天理)에서 나온 동일한 마음이라면 천리로 인해 인욕(人欲)이 있고 심지어 선악조차 모두 천리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栗谷全書·‘人心道心圖說’) 이것은 사유에 능했던 율곡의 지나친 궤변이 아니라 이 세상 어떤 불합리한 기의 양태 속에도 이(理)가 함께 공존한다고 본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존재론을 피력한 것이다. 일명 ‘이기지묘(理氣之妙·이와 기 사이의 미묘한 관계)’라고도 불리는 이 상황은, 기의 어떠한 분란과 왜곡에도 불구하고 항상 보편적 이가 내재해 있다는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가 노력만 하면 기의 변화를 통해 이를 회복할 수 있다는 낙관, 이 조건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구비되어 있다는 인간 삶에 대한 감각을 전제한 것이다. 실존적 삶의 조건과 인성의 가능성에 관한 율곡 사유의 새로운 단초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율곡의 성찰은 정치 영역에서도 유사한 파급 효과를 낳았다. 알려진 것처럼 사림 정치의 대망을 품은 율곡의 기대와 달리 1575년부터 조선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동서붕당(東西朋黨)이 발생했다.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선후배 사이인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갈등을 일으킨 것이다. 율곡은 공정하게 양측을 중재하려고 했지만 여러 이유로, 특히 동인의 신랄한 공격을 받았다. 이때 율곡이 취한 정치적 태도를 음미할 만하다. 그는 양측이 같은 사류(士類)로서 흑백(黑白)과 사정(邪正)이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 약간의 우열이 있을지라도 결코 시비(是非) 문제로 볼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선조실록 8년 4월 24일) 한편 동인의 핵심멤버 이발(李潑)에게 보낸 서신에선 자신도 반드시 정당하다고 고집하지 않을 테니 그대도 그렇게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율곡전서·이발에 답하다)
흔히 ‘양비양시론(兩非兩是論)’으로 불려 선후배 사림의 협공을 받은 율곡의 관점은 이것도 저것도 모두 옳거나 그르다는 식의 단순한 상대주의는 아니었다. 사회공론을 조성하는 논쟁의 장에선 불가피하게 자기 신념에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고 본 정치적 조율의 감각이 작동한 것이다. 유교 지식인인 그에게도 정치란 도덕공동체의 완성을 목표로 한 진리 구현의 작용이었다. 군자와 소인, 선악의 구분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본인의 철학에서 드러나듯 그는 인심과 도심, 사단과 칠정에 실체적 구분이 없다고 보았고 이것은 결국 상황에 따른 적절한 선악 판단과 논쟁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임시변통으로서 권도뿐만 아니라 의리에도 정해진 법식이 없으며 시비와 이해득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본 관점은 유교정치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사적 신념의 공간과 공적 삶의 영역이 구분되는 것은 타자의 시선, 즉 상이한 입장의 관점이 공존하고 용인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한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의 발언을 생각할 때(‘인간의 조건’) 자기 신념과 공론 사이의 괴리를 심각하게 의식했던 율곡의 정치적 고민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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