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토요일

스토리텔링 수학? 교육을 먼저 바꿔라

구구단 9단을 외우는 방법입니다. 왼손 엄지를 접어 보세요. 오른쪽으로 손가락 9개가 남죠? 자, 엄지를 1이라고 한다면, 남은 손가락은 결과가 돼요. ‘구일은 구’가 되죠.” 신기해하는 사람들에게 강사는 “외국 학생들은 5단까지만 외우고 그 이상은 손가락 법칙을 사용해 외운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어 하는 수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목표도 계속해서 강조했다.

이곳에서 가르치는 건 ‘육일은 육’, ‘육이는 십이’를 외울 때까지 되새기던 구구단 학습법이 아니다. 요즘 수학 교육은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이뤄진다. 올 3월부터 초등학교 1, 2년 과정에 ‘스토리텔링 수학 교과서’가 도입되면서 생긴 변화다. 지난해 1월 교육과학기술부는 ‘수학 교육 선진화 방안’을 내놓고 수학교과서를 점진적으로 개정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개정되는 수학 교과서는 융합인재교육의 방향에 맞춰나간다는 것. 과학(Science)·기술(Technology)·공학(Engineering)·예술(Art)·수학(Mathematics)의 앞글자를 딴 융합인재교육(STEAM)은 인문학과 자연과학 지식을 고루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개정된 수학 교과서를 보면 암기 위주의 내용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반복되는 개념 설명 대신 글과 그림이 늘어났다. 전면 컬러로 인쇄된 면도 많아졌는데, 학생들의 흥미를 이끌어내기 위한 시도다. 교과서 개정에는 수학 교육 전문가뿐 아니라 동화작가 등 전문 스토리텔링 작가들이 참여해 수학적 지식뿐 아니라 사고능력과 이해력을 키우는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힘을 보탰다. 수학 교과서의 개정과 더불어 평가 방식도 바뀌었다. 하나의 답을 적어내던 단답형 평가에서 문제해결 과정까지 서술하는 서술형 평가가 주를 이루게 됐다.

전문가들은 변화된 스토리텔링 수학에서 중요한 능력은 문자 이해력이라고 말한다. 평소 독서량이 많다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개념조차 이해하기 힘들다. CMS에듀케이션 박정현 책임연구원은 “예전에도 초등학교 수학 교육은 이해력을 높이는 데 중점을 뒀지만 최근 들어 그 경향이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스토리텔링 수학 교과서를 이해하려면 논술학원에 다녀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논술학원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개설을 검토하고 있다. 대치동에서만 10년 넘게 강의를 해 온 한 논술강사는 “대입 전형이 논술보다 특기자 전형에 비중이 실리면서 논술학원들이 새 활로를 찾기 위해 초등학생을 눈여겨보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단순히 계산능력을 기르는 데서 벗어나 배운 개념을 다양한 분야에 접목시키는 능력도 평가하기 때문에 “수학만 공부해서는 수학 점수를 잘 받을 수 없다”는 생각도 커지고 있다. 박정현 책임연구원은 “스토리텔링 수학 도입 후 오히려 논술학원의 수강생이 급증하고 있다”며 “다른 분야의 배경지식 없이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스토리텔링 수학 교육이 지속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국제인재교육원에서 ‘스토리텔링 수학 지도사 과정’을 수강하고 있는 수강생 김지윤(가명)씨는 “공부는 하고 있지만 과연 스토리텔링 방식이 초등 교과 과정부터 수능에까지 이어질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평가 방식에 맞는 수학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전반적인 수학 교육의 변화 없이는 스토리텔링 수학이 자리를 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판이다.

개정된 수학 교과서에 다른 과목의 난이도가 쫓아가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초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한현주씨는 “국어 교과서에서는 ‘기역 니은’을 가르치는데, 수학 교과서에서는 개념은 물론 응용력까지 가르치려 하니 교과 과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속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사들이 바뀐 교과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학부모도 많다. 초등학교 2학년 딸을 둔 학원강사 유정화씨는 “아이의 공책을 보니 바뀐 교과서를 두고 예전 방식 그대로 가르치고 있었다”며 “시간을 두고 장기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수학 교육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인터뷰 | 권오남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세계수학교육자대회 조직위원)

“수학 교육 바꾸려면 평가제도를 바꿔야”

2014년부터는 고등학교 수학 교과서도 스토리텔링 교과서로 개정된다. 권오남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는 고등학교 교과서 개발 위원이다. 지난 5월 13일 서울대 사범대 연구실에서 만난 권 교수는 “교과서 하나만 개정한다고 해서 수학 교육이 변하지 않는다”며 “교사와 교육 방식, 평가제도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과감한 개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권 교수는 먼저 “우리나라 학생의 수학적 능력이 매우 뛰어난 반면, 수학에 대한 태도는 부정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지난해 발표한 ‘수학·과학 성취도 추이 변화 국제비교연구’를 보면 우리나라 학생의 수학 성취도는 세계 42개국 중 2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수학에 대한 흥미도와 자신감은 세계 꼴찌에 머물렀다. 권 교수는 “입시가 끝나고 나면 구구단도 잊어버린다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며 “사회와 개인의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수학 교육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권 교수가 우리나라 수학 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평가제도다. 권 교수는 “수학적 능력을 평가하려면 사고력과 창의력, 문제해결 능력을 평가해야 하는데 현재 우리의 평가제도는 ‘실수하지 않는 계산능력’을 평가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점진적으로 수학 교육 과정에 100% 서술형 평가가 도입된다고 하지만, 이대로라면 암기 능력을 평가하는 평가제도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권 교수가 제안하는 것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교과서를 개정하는 것과 교사 연수를 강화하는 방법이다. 권 교수는 “교육의 변화는 유기적”이라고 말하면서 “교과서와 더불어 수학 교육, 나아가 학교 교육 전반을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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