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토요일

‘소학’ 동자들이 어떻게 권력을 바꿨나?




진리의 계보(道統)를 만든 조선의 운동권 지식인들


▲ (왼쪽부터) 김종직.김굉필. 조광조.
미국의 진보적 정치학자 셸던 월린(Sheldon Wolin)은 정치적인 것의 고유성을 말하면서 기존의 정치관을 비판했다.(‘정치와 비전’) 그의 비판을 받았던 기존의 정치관 중 하나가 윤리적 판단에 정치를 종속시키는 규범적 정치학이다. 유학은 월린이 지적한 규범적 정치학에 해당된다. 도덕적 기준에서 현실 정치를 비평하고 정치를 윤리화하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조선 유학도 정치가의 도덕성(修己)을 바탕으로 정치운영(治人)의 정당성을 도출했기에 윤리(도덕)와 정치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 논리를 윤리적 판단으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규범적 정치학은, 전근대 시기 보편적으로 유포된 정교일치(政敎一致)의 미분화된 정치 관행을 연상시킨다.

정치의 고유성을 탐색해온 근대 서양정치학은 정치를 종교와 윤리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았다. 종교나 윤리의 가르침은 사회의 평화와 협력을 증진하기보다 절대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잔혹한 분쟁과 폭력의 역사를 양산했다. 우리에게는 구성원 다수의 평균적 결함을 인정하면서 사회적 공존이 가능한 차선의 방책을 제공해줄 정치 논리가 필요했다.

사회과학의 권위자 막스 베버는 정치와 윤리 문제를 성찰하면서 ‘신념’의 윤리가 아닌 ‘책임’의 윤리가 수반될 때 바람직한 정치 운영이 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한다.(‘직업으로서의 정치’) 베버는, 자신들이 신봉하는 절대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극단적 폭력을 사용한 러시아 볼셰비즘과 독일 사회주의 혁명단 스파르타쿠스주의자를 실례로 들면서, 신념과 동기의 순수성만 믿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이들의 무책임과 유치함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들 윤리적 엘리트주의자들은 자기신념의 절대성과 민중의 어리석음이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베버에 따르면, 정치란 선(善)으로부터 선이 귀결되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며, 오히려 선과 정의의 맹목적 추구는 분열과 싸움을 낳을 뿐이다. 따라서 책임의 윤리를 갖춘 정치가라면 우발성과 결함에 노출된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고려하고 예상 가능한 결과를 염두에 두면서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조선 유학의 대표적 지식인들, 특히 유학적 진리의 계보라고 할 ‘조선도학계보사(朝鮮道學系譜史)’를 만든 사림파(士林派) 지식인은 전형적인 신념의 정치가다. 이들은 정통과 이단, 선과 악,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등 대립 개념들을 구사하면서 정치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했다. 15세기 말 성종의 언론 삼사(三司) 우대정책에 따라 관료사회에 입성한 신진사대부들은 훈구공신 및 대신에 대한 강력한 정치 공세를 폈지만 결국 연산군 때 두 차례 사화(士禍)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중종반정 이후 왕과 대신·대간의 역학관계에서 다시 중앙정치에 간여하게 된 사림파는 ‘붕당을 조성한다(交結朋黨)’는 훈구파의 공세를 방어하던 중 보다 적극적으로 ‘진붕론(眞朋論)’을 내세우며 ‘군자소인’ 논쟁을 촉발시켰다.

중종의 총애로 급성장한 조광조는 폐조(廢朝·연산군) 때의 사화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군자·소인을 엄격히 준별할 수 있는 군주의 식견과 공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중종실록 13년 4월 28일) 그는 소인들의 기미가 엿보일 때 통렬히 응징해야 한다고 중종을 채근했다.(중종실록 13년 5월 18일) 소인이 군자를 모함할 때 명분을 찾기 어려우면 흔히 ‘당(黨)’을 만든다는 죄목으로 비방하지만, 공심(公心)으로 함께 도를 추구하고 선을 행하는 군자의 참된 모임(眞朋)은 소인이 사심(私心)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거짓 모임(僞朋)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조광조는 사족층의 붕당 결성 및 여론 조성이 죄가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에 훈구공신들도 같은 방식으로 사림파의 ‘동당벌이(同黨伐異·같은 편이면 무조건 옹호하고 다른 편이면 배척하는)’ 태도를 공격했다. 적과 동지,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는 이러한 운동권적 발상은, 윤리적 신념을 공유할 수 없는 반대파에 대한 극단적 정치공세와 분쟁을 야기한다. 당시 지식인들은 자기 신념에 대한 확신이 정치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하고 급기야 공동체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도덕적 근본주의·원리주의에 집착함으로써, 상이한 신념의 소유자들이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정치 자체의 고유한 논리를 망각했던 것은 아닐까? 오늘날 정치를 종교와 윤리 문제로 환원해서 이해하는 규범적 정치학이 비난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흔히 사림파로 부르는 성종 연간의 신진관료와 유생들은 도덕적 진리와 대의명분으로 기득권에 저항한 투사적 존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들에 대한 첫인상은 몹시 우스꽝스러웠다. 일례로 그들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기초적 예의범절을 수록한 ‘소학(小學)’ 텍스트를 강독하는가 하면 향약(鄕約)을 만들어 주기적 계모임을 가졌는데, 이를 두고 항간에서 ‘소학계(小學契)’다 ‘효자계(孝子契)’다 말이 많았다. ‘소학’은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유청지(劉淸之)와 함께 편찬한 것으로 유교의 여러 경전을 선별해서 만든 수신(修身) 교과서다. ‘대학(大學)’ 등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들어가기 전 배워야 할 기초덕목으로 구성된 ‘소학’은 효제(孝悌), 공경(恭敬), 성의(誠意), 예교(禮敎) 등을 강조한 일종의 윤리적 생활지침서였다.

소학계라는 명칭은 사림파가 만든 ‘진리의 계보(道統)’에 등장하는 인물 김굉필(金宏弼)과 그의 제자 그룹에서 처음 등장한다. 평생 ‘소학동자(小學童子)’를 자칭한 김굉필은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소학’ 규범을 그대로 재현한 인물이다. 꼭두새벽부터 의관(衣冠)을 바르게 정제하고 가묘(家廟)에 들어가 절한 뒤 부모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온종일 서재에 소상(塑像)처럼 꿇어앉아 ‘소학’을 암송하던 김굉필의 기이한 행적은 세상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성균관을 중심으로 김굉필 제자들이 계파를 만들어 ‘소학’ 규범을 똑같이 따라한 이상한 풍속이 형성된 것이다. 초기에 이들의 행동은 동년배 유생들뿐만 아니라 국왕과 대신의 비웃음마저 샀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공자와 안연 등 수천 년 전 유학자 모습을 흉내 내냐며 이들의 도학(道學) 선생인 양하는 이상한 행동을 비웃은 것이다.

‘소학’을 곧이곧대로 따라하던 이들의 괴이한 행적은 성종에게 올린 한명회의 상소문에 잘 나타난다.(성종실록 9년 4월 24일) “성명(聖明)하신 주상 밑에 어찌 붕당(朋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남효온(南孝溫), 강응정(姜應貞), 박연(朴演) 등이 소학계를 만들어 소학의 도를 실천한다고 떠벌리고 때로 여럿이 모여 강론하면서, 강응정을 공자로 박연을 안연이라고 부르며 스스로 그렇게 표방하고, 혹은 세간에서 그들을 희롱하고 업신여기는 것의 자세한 의미를 알 수 없지만, 한때 유생이 된 자들로 이들을 비웃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상소문에 인용된 기사관(記事官) 안윤손(安潤孫)의 발언에 성종은 “저들이 편당(偏黨)을 만들었어도 무슨 대단한 일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허황된 어린애들(狂童) 짓거리를 어찌 국문할 수 있겠는가”라며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성종은 수차례 소학계 멤버들을 ‘광동(狂童)·광생(狂生)’이라고 지목하며 이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추국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리 어감으로 ‘미친 놈(狂童)’이라고 불릴 만한 당시 나이 어린 젊은 유생들은 사실 미쳤다기보다 허황된 혹은 비현실적 이상을 좇는 연소(年少)한 무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는 공자가 중도(中道)의 선비를 얻지 못하면 광자(狂者·이상만 높고 실천력이 부족한 사람)와 견자(狷者·지식은 부족하지만 절개가 굳은 사람)를 찾아 가르치겠다고 말한 데서 연유한 표현이다.(論語, 子路) 그런데 연소한 무리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朋比·朋黨) 위협적인 여론을 조성했던 점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는 “재조관원(在朝官員)이 교결붕당(交結朋黨)해서 조정의 정사를 문란케 하는 자가 있으면 참형(斬刑)에 처한다”는 ‘대명률’ 조항이 엄존하고 있을 때다. 김굉필 제자그룹의 광동들은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하여 왕실 재산을 국가 공적 자산으로 돌리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세조 때 공신은 더 이상 관직에 등용하지 말 것,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를 모신 소릉(昭陵)을 추복(追復)할 것 등을 집단적으로 주장하면서 민감한 정치 사안을 자극했다. 이들의 집단 행동은 결국 연산군 때 사화를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한다.(연산군일기 4년 8월 16일) 이로부터 ‘소학’은 사화의 발생과 맞물려 조선사회에서 일종의 불온문서로 취급되다가 다시 해금되는 과정을 몇 차례 반복했다.

건국에 참여한 초기 신흥관료들은 ‘주례(周禮)’를 중심으로 중앙정부조직 등 일국 차원의 방대한 운영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사대부 개인의 덕성 함양보다는 왕권과 의정부 재상, 육조관리의 역할분담 및 이들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국가운영에 골몰했다. 성종의 문치주의 이후 등장한 사림파 지식인들은, 개인적 생활규범을 밝힌 ‘소학’과 관혼상제의 예법을 망라한 ‘주자가례(朱子家禮)’, 자연세계와 인간심성의 이치를 밝힌 ‘근사록(近思錄)’ 및 ‘심경(心經)’을 소의(所依) 경전처럼 귀중하게 다뤘다.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도 ‘소학’의 실천궁행으로 이름이 높았고, 김안국은 지방 유향소, 서원, 향교를 중심으로 ‘소학’을 유포시키는 한편 여기 수록된 북송시대 ‘여씨향약’을 경상도 향약 운영의 모델로 삼았다. ‘소학’과 ‘여씨향약’ 그리고 ‘주자가례’의 전국적 보급과 재현은, 사대부들의 향촌 및 향민에 대한 자율적 통제와 교화를 가능하게 했다.

18세기 대표적 실학자 유수원(柳壽垣)은 성종~중종시대 사림의 정치 행적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오직 소학계(小學契), 현량과(賢良科·인재추천제), 향약(鄕約) 등의 일만 급선무로 삼고 위로 선왕들이 나라 다스리는 법도를 제정했던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아래로 노련한 간신들의 교활한 작태를 다스리지도 못해서, 속류의 무리로 하여금 유학자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비방하게 만들었다.”(‘迂書’) 사림이 개인적 도덕 실천과 지방의 향민 교화에 치우쳐 국가 전장제도와 문물을 흥기시키지도, 훈구세력에 맞선 정치대응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소학’ ‘가례’에 대한 사림파의 존숭은 개인의 실천궁행에서 나아가 대민 교화의 효과적 바탕이 됐고 결국 중앙 삼사에 포진한 신진관료의 정치적 발언권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도덕을 근본으로 삼는 점에서 삼공(三公) 대신도 선비이며 국왕도 결국 사기(士氣)의 종주(宗主)일 뿐 일반 포의(布衣·선비)와 다를 바 없다고 강조한 조광조의 등장은, 중앙 및 지방 사족의 윤리적 공감대가 형성됨으로써 가능했다.(중종실록 11년 6월 2일)

사림파의 개별적 ‘소학’ 실천과 문중에서의 ‘가례’ 시행은 국가 차원의 문묘(文廟) 설립, 그리고 문묘향사(文廟享祀)라는 정치적 의례들과 밀접히 연관돼 있었다. 문묘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공자에게 제사 지내던 사당(祠堂)이다. 성균관의 교육 기능과 문묘의 제사 기능은 국가가 주관하는 중요한 학술·정치 행사의 하나였다. 주희가 공자로부터 맹자로, 북송(北宋) 오현(五賢)과 자신에게 이어지는 도학의 계보를 만들었듯이, 16세기 조광조 일파도 조선도학(朝鮮道學)의 계보, 즉 유학적 진리를 담지한 도(道)의 전수자들을 선정했다. 그리고 진리의 계보에 오른 인물들을 문묘에 종사(從祀)토록 함으로써 자신들이 선정한 도학자를 국가의 공식인물로 승격시켰다. 조선 유학의 도를 전수한 인물로 거론된 자들은 다음과 같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 이 도학계보의 형성에 실제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은 조광조 한 사람뿐이다.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의가 본격적으로 개진된 것은 중종 때며 이것은 왕조사회에서 왕통(王統)에 대한 도통(道統)의 위상, 즉 군왕에 대한 사대부 지식인의 윤리적·정치적 권한을 명시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조광조 등 기묘(己卯) 사림들은 도덕적 명분으로 정치권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자신들의 스승 김굉필을 도학의 계승자로 추대했고, 멀리 고려 말의 유신 정몽주로까지 소급해 올라갔다. 사실 정몽주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도전과 함께 한 개혁파 관료였으나 태종 이방원에 의해 살해됨과 동시에 고려왕조의 절개를 지킨 충절과 의리의 화신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정몽주가 사림파 도학의 시조로 설정된 것은, 국가에 의한 충신 정몽주 선양사업과 사림에 의한 도학자 정몽주 추숭사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기묘사림은 스승의 문묘종사를 성사시키진 못했지만 정몽주의 문묘배향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권력비판, 즉 군주권을 정치비평의 대상으로 삼고 정치의 최종목표가 도학적 윤리의 실현이라는 것을 국가로부터 승인받았다. 국왕도 ‘도통’의 계보에 포괄되는 존재로서 선비의 우두머리일 뿐 도덕적으로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을 천명했다.

정몽주가 충신이자 도학자로 평가됨과 동시에 세조에 의해 죽은 사육신, 연산군 때 사화로 목숨을 잃은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 초기 사림파, 중종 때 기묘사화로 사사된 조광조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왕권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국가에 의해 다시 충절과 의리의 표상이 되었다. 현실 권력의 향배와 관계없이 문묘종사의 성취는, 사림의 역사적·사상적 승리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반대세력의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특별한 학문적 공로도 없는 김굉필을 내세워 도학 계보를 날조한 것은 스승을 빙자해 당(黨)을 만들려는 조광조 일파의 모략이며 처음부터 정몽주에 대해선 아무 관심도 없었다고 본 것이다.(중종실록 12년 8월 7일) 조광조와 기묘사림의 죽음 이후, 선조에 이르면서 문묘종사 논의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오현(五賢)으로 축약된다. 여기에는 선배 사림들의 도학사(道學史) 계보에 대한 이황 본인의 불만과 정치적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退溪先生言行錄/退溪集, ‘答金而精’) 이황은 충절과 의리라는 도의적 덕목 외에 학문적·사상적 공로를 좀 더 부각시키고자 했다. 이황과 기대승 등 선조 때 저명한 관료들의 입장을 반영해 1610년 광해군 2년에 오현(五賢)의 문묘종사가 확정되었다.

연소한 무리배, 광동(狂童)의 집단행동은 이렇게 국가적으로 공인된 도통(道統)의 계보와 정치권력을 평가하는 최종 준거로서 도학(道學)의 절대적 위상을 만들어냈다. 도학 선생은 우스꽝스럽고 바보스러운 인물로 매도되기도 했지만, 유교국가 조선은 국가이념에 부합하는 그들의 충절과 효행을 폄하할 수 없었다. 네 차례 사화(士禍)의 큰 벽을 뚫고 이제 사림들은 실질적으로 왕권을 논평하고 견제할 수 있는 정치적 권위를 확보했다. 이들은 정권이 재상(宰相)에게 있어야 한다고 본 정도전의 발상도 넘어섰다. 정도전은 권력이 대간(臺諫)으로만 넘어가도 위험하다고 했지만, 조광조 시대에는 ‘정귀대각(政歸臺閣)’ ‘정귀외의(政歸外議)’란 표현처럼 정치권위와 공론(公論)의 형성이 삼사 관원을 넘어 재야 사족층의 일로 확장되었다. 이것은 진리의 계보를 형성함으로써 국왕을 포함한 재조(在朝)·재야(在野) 모든 지식인을 사상적으로 통일시켰기 때문이다. 왕통의 계승자인 군주는 수양을 통해 도통을 확보해야 성왕(聖王)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도학을 앞세운 사림파 지식인은 왕조사회에서 권력의 속성 자체를 변화시켰다.

이제 막스 베버의 물음을 다시 상기해보자. 베버는 자기 신념의 희생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정치세계에서 윤리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정치가는 행위의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윤리를 견지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결과를 원하며 어떤 책임을 요구하는가? 이것이 다수결의 원리처럼 보다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대변하는 것을 말한다면, 베버가 말한 책임과 결과의 성격에 대해 우리는 다시 장시간의 논쟁을 벌어야 하며 여기선 결국 개인의 신념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신념의 윤리가 정치공동체에서 배제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정치는 공학이 아니며 오차 없는 엄밀한 기술도 아니다. “한정된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행위”로 규정된 정치의 정의(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를 돌아볼 때, 우리는 신념 대 신념을 건 끈질긴 논쟁이 다시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어떤 신념을 어떤 방법으로 실현할지 결정하는 데 우리의 진정한 정치역량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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