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의 한 사립학교 교정. 영국 교육은 ‘남과 다르게’를 추구한다. photo 조선일보 DB |
영국은 양극성(兩極性)의 사회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같이 혼재해 있다. 젠틀맨과 축구 훌리건은 유명한 영국인의 대명사다. 의회 민주정치가 세계에서 가장 발달했으면서도 국민의 70%가 왕정을 찬성한다. 미니스커트, 펑크, 비틀스 같은 반문화(反文化)의 발상지이면서 아직도 수백 년 된 의식을 권위와 위엄으로 가득 찬 예복을 입고 애지중지하며 지킨다. 봉건시대가 언제 적 얘기인데 오늘도 일상 순간순간에서 계급의 존재를 느껴야만 한다. 계급에 따라 영어의 억양과 단어, 심지어 먹고 마시고 보는 TV 프로그램마저 달라 완전히 외국인 같은 사람들이 한 나라 안에 같이 산다. 그러면서도 ‘계층 간 괴리감’이나 ‘국민적 위화감’이니 하는 말이 전혀 안 나오는 묘한 나라가 영국이다. 동시에 존재할 수 없을 상극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상호보완 작용을 해서 차라리 다양한 사회적 스펙트럼을 만들어 내는 순작용(順作用)을 한다.
모방이 아닌 독창성을
영국은 사립학교를 통해 몰개성화된 관리자형의 지도자를 만들어 냈다. 근엄하게 행동하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기득권 제도 인간형’들은 결코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현존하는 제도나 가치를 보존하고 관리할 뿐이다. 영국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계층은 항상 서민들이다.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없어 기존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 새로운 시도에 용감하다. 현재 영국 문화를 끌고 가는 이들은 모두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서민의 자식들이다. 패션계에는 미니스커트를 디자인한 메리 퀀트, 비비안 웨스트우드, 폴 스미스가 있고 화가들로는 루시안 프로이드, 데미안 허스트, 프랜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호크니가 있다. 이들은 이민자, 광부, 자동차 기술자, 말 사육사의 아들이다. 비틀스, 롤링스톤스로 시작되어 스웨이드, 블러, 오아시스, 스톤 로지스, 펄프, 라디오헤드, 콜드플레로 이어 내려오는 세계인이 사랑하는 ‘브릿 팝(Brit Pop)’도 모두 서민의 자녀들이 만들어왔다.
한국 교육의 목표가 ‘남보다 더 뛰어나게’라면 영국 교육은 ‘남과 다르게’이다. 영국에서 아이 둘을 키워서 대학교까지 마치게 하고 보니 영국과 한국 교육의 차이가 보인다. ‘남과 다르게’라고 하는 말은 남과 다른 너만의 생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다. 모방(copy)이나 인용(quote)이 아니라 오리지널(original)한, 즉 독창적인 생각이어야 한다. 영국에서 살면서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오리지널 아이디어(original idea)’이다. 오리지널 아이디어는 어딘가에 있는, 혹은 언젠가 있었던 말이나 생각이 아니다. 아무리 엉뚱하고 못나고 이상한 아이디어라도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본인이 만든 오리지널 아이디어라면 높게 쳐준다.
스스로 찾게 하라
88 서울 올림픽이 있던 해 필자 집 뒤 공립초등학교 전교 학생들의 그해 공통 과제가 ‘한국’이었다. 한국에 관해 조사해서 나름대로 한국인은 어떤 사람들이고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를 써오라는 주제였다. 이 학교는 한인타운 중심에 있어서 전체 학생의 거의 20%가 한국 학생이었다. 심지어는 노는 시간에 영국 아이들이 한국 아이들로부터 배운 한국식 고무줄 놀이를 한국 노래를 부르면서 할 정도였다. 학생들이 공부에 쓸 한국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고 해서 관광공사를 비롯한 유관 기관에서 자료를 얻어다 주었다.
그때만 해도 인터넷이 없어서 일일이 종이 자료를 뒤져 찾아야 하는 시절이었다. 학년이 끝날 때쯤 지난 일 년 동안 학생들이 조사한 자료들을 모아 강당에 전시해 놓고 학부모들을 불러 보여 주었다. 전시된 학생들 과제물은 전혀 초등학교 학생 수준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수작이었다. 초등학교 학생, 그것도 사립학교도 아닌 공립학교에서 이 정도로 학생을 교육시킬 수 있다면 대단하다는 감탄과 함께 이 나라 교육 참 무섭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마지막 감동이 더 있었다. 전교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뜸북 뜸북’ 하면서 한국 동요 ‘오빠 생각’을 한국말로 합창하는 게 아닌가. 노란 머리 중간에 드문드문 까만 머리 한국 학생들이 섞인 어린이 합창단이 약간은 어눌한 듯한 발음으로 부르는 ‘오빠 생각’은 지금까지도 그 이상의 감동적인 합창을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기억에 남는다.
영국 학생과 한국 학생이 같이 노래를 연습하면서 느꼈을 동질성은 어릴 때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가리라 생각한다. 한국 노래를 가르치려고 생각한 교사들의 교육적 배려는 지금도 놀랍다. 학생들에게 말로만 다문화 수용을 가르치지 않고 마음으로 배우게 한 것이 놀라웠다. 한국은 얼마쯤 되어야 공립초등학교 학생들을 이 정도로 교육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교실 하나에 학생 50~60명이 바글거리는 한국 현실과 겹쳐 착잡한 심정이 됐다. 당시 영국 교실에는 많아야 15명의 학생이 선생과 보조선생의 도움으로 각자의 능력에 맞게 다른 진도로 공부할 때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국 교육 현실도 상당히 악화되어 어느 지방 학교에는 한 반 학생 수가 30명이 넘는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반면에 한국에는 학생 수가 줄어든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렇게 영국인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자료를 찾아보고 연구해서 과제를 만드는 과정을 중요하게 가르친다. 일찍부터 이런 훈련을 해온 영국인이 모든 일에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영국 교육이 결과만으로 평가받아온 한국 유학생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한국서 못한 공부 제대로 했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아는 영국의 유명 패션스쿨 학생이 거의 울면서 전화가 왔다. 첫 학기 과제를 받아들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말인지 모르겠으니 좀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영어가 어려워서 그러느냐”고 했더니 “그게 아니라 과제를 설명하는 말이 거의 철학 논문 같다”고 했다. 스페인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의 건축물에서 영감을 얻어 옷 한 벌을 디자인해서 제출하라는 주문이었다. 과제를 설명하는 종이를 받아보니 정말 문자 그대로 영국에서 에세이(essay)라고 부르는 한 편의 짧은 철학 논문이었다. 가우디 건축물을 철학·미학·심리학적인 면에서 분석해 설명한 내용이었다. 한국에서 이미 명문대학 패션학과를 졸업하고 온 학생이었음에도 이런 과제물은 처음이었다. 왜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해야 하는지조차도 이해를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 교수의 의도를 내가 아는 대로 설명했다.
“이 과제를 내준 교수는 참 친절한 사람이다. 그냥 소설 한 편을 써 오라고 하지 않고 주인공의 성격과 등장인물의 인적 구성과 심리적 관계까지 잘 설명해 주고 너보고 써오라고 한 것이다”라며 소설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학생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만들어 간 과제가 접수도 안되었다고 울상이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학생은 나름대로 가우디에 관한 책과 건축물 사진도 보고 해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멋지게 옷 한 벌을 디자인해서 제출했다. 과제를 받아 본 교수의 말은 이 디자인이 나오게 된 과정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이 그냥 옷 디자인 하나만 달랑 만들어 왔다는 질타였다.
교수가 말하는 과정이란 왜 이런 모양의 단추를 달았고, 그 단추 색깔은 왜 반드시 그 색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하라는 뜻이었다. 옷의 소매가 왜 이런 식인지, 소매와 몸체의 색깔이 다른 이유 등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말이었다. 교수는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쓰게 함으로써 학생으로 하여금 모든 면을 기록해 남기는 버릇과 결론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생각하게 하여 마지막 결론을 추론해 내는 방법을 처음부터 제대로 가르쳐 주고자 했을 뿐이다. 그냥 어디선가 본 듯한 남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와 적당히 변형해 자기 것인 양 포장해 내놓지 못하게 모든 생각과 과정을 기록하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자신의 생각을 종이에 나열해 놓고 짚어가다 보면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낼 능력이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뜻이었다. 한번도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 학생으로서는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했고 적응하기가 정말 어려워서 많이 힘들어했다. 결국 졸업하고 가면서는 정말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공부를 했다고 토로하면서 자신의 졸업을 자랑스러워했다.
노력하는 서민 vs 무기력한 서민
모방이 아닌 독창성을
영국은 사립학교를 통해 몰개성화된 관리자형의 지도자를 만들어 냈다. 근엄하게 행동하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기득권 제도 인간형’들은 결코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현존하는 제도나 가치를 보존하고 관리할 뿐이다. 영국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계층은 항상 서민들이다.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없어 기존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 새로운 시도에 용감하다. 현재 영국 문화를 끌고 가는 이들은 모두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서민의 자식들이다. 패션계에는 미니스커트를 디자인한 메리 퀀트, 비비안 웨스트우드, 폴 스미스가 있고 화가들로는 루시안 프로이드, 데미안 허스트, 프랜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호크니가 있다. 이들은 이민자, 광부, 자동차 기술자, 말 사육사의 아들이다. 비틀스, 롤링스톤스로 시작되어 스웨이드, 블러, 오아시스, 스톤 로지스, 펄프, 라디오헤드, 콜드플레로 이어 내려오는 세계인이 사랑하는 ‘브릿 팝(Brit Pop)’도 모두 서민의 자녀들이 만들어왔다.
한국 교육의 목표가 ‘남보다 더 뛰어나게’라면 영국 교육은 ‘남과 다르게’이다. 영국에서 아이 둘을 키워서 대학교까지 마치게 하고 보니 영국과 한국 교육의 차이가 보인다. ‘남과 다르게’라고 하는 말은 남과 다른 너만의 생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다. 모방(copy)이나 인용(quote)이 아니라 오리지널(original)한, 즉 독창적인 생각이어야 한다. 영국에서 살면서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오리지널 아이디어(original idea)’이다. 오리지널 아이디어는 어딘가에 있는, 혹은 언젠가 있었던 말이나 생각이 아니다. 아무리 엉뚱하고 못나고 이상한 아이디어라도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본인이 만든 오리지널 아이디어라면 높게 쳐준다.
스스로 찾게 하라
88 서울 올림픽이 있던 해 필자 집 뒤 공립초등학교 전교 학생들의 그해 공통 과제가 ‘한국’이었다. 한국에 관해 조사해서 나름대로 한국인은 어떤 사람들이고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를 써오라는 주제였다. 이 학교는 한인타운 중심에 있어서 전체 학생의 거의 20%가 한국 학생이었다. 심지어는 노는 시간에 영국 아이들이 한국 아이들로부터 배운 한국식 고무줄 놀이를 한국 노래를 부르면서 할 정도였다. 학생들이 공부에 쓸 한국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고 해서 관광공사를 비롯한 유관 기관에서 자료를 얻어다 주었다.
그때만 해도 인터넷이 없어서 일일이 종이 자료를 뒤져 찾아야 하는 시절이었다. 학년이 끝날 때쯤 지난 일 년 동안 학생들이 조사한 자료들을 모아 강당에 전시해 놓고 학부모들을 불러 보여 주었다. 전시된 학생들 과제물은 전혀 초등학교 학생 수준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수작이었다. 초등학교 학생, 그것도 사립학교도 아닌 공립학교에서 이 정도로 학생을 교육시킬 수 있다면 대단하다는 감탄과 함께 이 나라 교육 참 무섭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마지막 감동이 더 있었다. 전교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뜸북 뜸북’ 하면서 한국 동요 ‘오빠 생각’을 한국말로 합창하는 게 아닌가. 노란 머리 중간에 드문드문 까만 머리 한국 학생들이 섞인 어린이 합창단이 약간은 어눌한 듯한 발음으로 부르는 ‘오빠 생각’은 지금까지도 그 이상의 감동적인 합창을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기억에 남는다.
영국 학생과 한국 학생이 같이 노래를 연습하면서 느꼈을 동질성은 어릴 때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가리라 생각한다. 한국 노래를 가르치려고 생각한 교사들의 교육적 배려는 지금도 놀랍다. 학생들에게 말로만 다문화 수용을 가르치지 않고 마음으로 배우게 한 것이 놀라웠다. 한국은 얼마쯤 되어야 공립초등학교 학생들을 이 정도로 교육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교실 하나에 학생 50~60명이 바글거리는 한국 현실과 겹쳐 착잡한 심정이 됐다. 당시 영국 교실에는 많아야 15명의 학생이 선생과 보조선생의 도움으로 각자의 능력에 맞게 다른 진도로 공부할 때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국 교육 현실도 상당히 악화되어 어느 지방 학교에는 한 반 학생 수가 30명이 넘는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반면에 한국에는 학생 수가 줄어든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렇게 영국인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자료를 찾아보고 연구해서 과제를 만드는 과정을 중요하게 가르친다. 일찍부터 이런 훈련을 해온 영국인이 모든 일에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영국 교육이 결과만으로 평가받아온 한국 유학생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한국서 못한 공부 제대로 했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아는 영국의 유명 패션스쿨 학생이 거의 울면서 전화가 왔다. 첫 학기 과제를 받아들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말인지 모르겠으니 좀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영어가 어려워서 그러느냐”고 했더니 “그게 아니라 과제를 설명하는 말이 거의 철학 논문 같다”고 했다. 스페인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의 건축물에서 영감을 얻어 옷 한 벌을 디자인해서 제출하라는 주문이었다. 과제를 설명하는 종이를 받아보니 정말 문자 그대로 영국에서 에세이(essay)라고 부르는 한 편의 짧은 철학 논문이었다. 가우디 건축물을 철학·미학·심리학적인 면에서 분석해 설명한 내용이었다. 한국에서 이미 명문대학 패션학과를 졸업하고 온 학생이었음에도 이런 과제물은 처음이었다. 왜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해야 하는지조차도 이해를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 교수의 의도를 내가 아는 대로 설명했다.
“이 과제를 내준 교수는 참 친절한 사람이다. 그냥 소설 한 편을 써 오라고 하지 않고 주인공의 성격과 등장인물의 인적 구성과 심리적 관계까지 잘 설명해 주고 너보고 써오라고 한 것이다”라며 소설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학생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만들어 간 과제가 접수도 안되었다고 울상이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학생은 나름대로 가우디에 관한 책과 건축물 사진도 보고 해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멋지게 옷 한 벌을 디자인해서 제출했다. 과제를 받아 본 교수의 말은 이 디자인이 나오게 된 과정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이 그냥 옷 디자인 하나만 달랑 만들어 왔다는 질타였다.
교수가 말하는 과정이란 왜 이런 모양의 단추를 달았고, 그 단추 색깔은 왜 반드시 그 색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하라는 뜻이었다. 옷의 소매가 왜 이런 식인지, 소매와 몸체의 색깔이 다른 이유 등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말이었다. 교수는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쓰게 함으로써 학생으로 하여금 모든 면을 기록해 남기는 버릇과 결론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생각하게 하여 마지막 결론을 추론해 내는 방법을 처음부터 제대로 가르쳐 주고자 했을 뿐이다. 그냥 어디선가 본 듯한 남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와 적당히 변형해 자기 것인 양 포장해 내놓지 못하게 모든 생각과 과정을 기록하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자신의 생각을 종이에 나열해 놓고 짚어가다 보면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낼 능력이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뜻이었다. 한번도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 학생으로서는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했고 적응하기가 정말 어려워서 많이 힘들어했다. 결국 졸업하고 가면서는 정말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공부를 했다고 토로하면서 자신의 졸업을 자랑스러워했다.
노력하는 서민 vs 무기력한 서민
이렇게 영국 교육은 그냥 남의 지식을 읽고 배워서 머릿속에 얼마나 빨리 많이 집어넣고 그 다음에는 그 지식을 틀리지 않게 종이 위에 풀어 놓느냐는 문제에 집중하지 않는다. 부단하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그 아이디어를 이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고 실패하면서 배워가는 과정이 공부라고 여긴다. 공부의 내력을 일일이 기록하게 하면 인터넷에서 남의 자료를 찾아 적당하게 조합해서 과제를 제출할 수가 없다. 이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영국의 직업 기술학교의 교육 수준도 정규 대학교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직업교육이라고 손으로 하는 기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학문을 하는 만큼이나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도 시킨다. 사립중고등학교에서 관리자형 지도자 교육을 시킨다면 공립학교와 직업기술학교에서는 이렇게 이론까지 갖춘 창조적인 기술자들을 키워 내는 셈이다.
영국 서민을 하나로 말할 수는 없다. 노력하는 서민과 노력하지 않는 서민으로 갈라야 한다. 불행하게도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자신을 연마해 새로운 창조를 하는 영국 서민은 아주 극소수이다. 문제는 대다수의 영국 서민층이 너무 안분자족하다 못해 아예 자신이 타고난 처지에 젖어 벗어날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영국 사회는 모든 것이 주어지는 사회 안전망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익숙한 삶의 수준이 굳이 노력해서 얻지 않아도 유지된다. 영국인 누구도 결코 다 알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사회복지혜택이 있다. 이렇게 너무 많은 것이 주어지다 보니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는다. 사람은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것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임대서민아파트에서 태어나 자란 서민의 자식은 거기가 자신의 세계다. 가족과 친구들도 다 거기 살고 있는데 왜 다른 곳으로 이사 가야 하느냐고 묻는다. 전망이 더 좋고 좀 더 큰 아파트에 가서 외롭게 살기보다는 전혀 불편을 못 느끼는 임대서민아파트가 더 좋다고 한다.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살아온 임대서민아파트가 낡고 지저분해도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열등감도 위화감도 없다
요즘 영국에는 모든 사회복지혜택을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entitlement cutture)’라고 여겨 끝없이 요구만 하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복지 개혁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 동시에 서민이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되었고 자신의 삶을 바꿔 보고자 하는 ‘영감(inspiration)’을 안 갖는지에 대한 논의도 한창이다.
영국 서민의 이런 무기력함은 원래 유명하다. 대물림되는 가난과 무지를 벗어날 방법이 분명 주어져 있는데도 전혀 노력하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그대로에 만족해 살아간다. 사실 영국에서는 서민이 신분이나 처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경우 그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잘 되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국 서민층은 자신이 태어난 수준에 만족해 하며 살아간다. 소위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이나 ‘신분 상승’의 욕망이 전혀 안 보인다.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라 책 한 권 따로 살 일이 없다. 대학은 최근까지 수업료가 없었고 생활비까지 융자해 주었다.
올해 신학기부터 신입생의 학비가 거의 외국 학생들이 내는 수준으로 올라 학생들 불만이 여간 아니나 사실 이는 지금 당장 내는 것도 아니다. 생활비와 마찬가지로 융자를 해주었다가 졸업 후 취직이 되어 연봉이 1만5000파운드(2700만원) 정도 되면 그때부터 조금씩 갚아 나가면 된다. 만일 그런 수준의 연봉을 평생 못 벌면 안 갚아도 되는 돈이다. 물론 사회 첫발을 거의 4만파운드(7200만원)나 되는 빚을 어깨에 지고 진출하는 셈이라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공부할 길이 있다. 세상이 잘못되어, 부모를 잘못 만나 공부를 못했다라는 원망이나 핑계가 나올 수 없게 되어 있다. 충분한 길이 열려 있는데도 자신이 못나서, 공부하기 싫어서, 게을러서 안 한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영국인은 학력에 대한 불만도 열등감도 크지 않고 사회계층 간 위화감도 별로 없다. 잘사는 사람들에 대해 배 아파하지도 않는다. 또 가진 자니 못 가진 자니 하는 한국 정치인들의 단골 이슈가 영국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영국 서민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된 데에 대한 분석은 상당히 많다. 현세에서 자신의 처지에 크게 불만 가지지 말고 열심히 교회 믿으면 내세에는 잘산다고 가르친 지배자 논리의 기독교 문화 때문이라는 분석부터, 영국 특유의 국민 중우(衆愚) 교육 때문이라는 설명까지 다양하다. 심지어는 영국 특유의 사회적 관습도 크게 작용한다고도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급의 사다리(class ladder)’를 오를 수 없으니 아예 처음부터 포기한다는 것이다. 기껏 올라가 신분세탁을 한들 결코 계급 차이를 넘어서 상류사회는 물론 중산층 계급에서마저도 영원히 진정한 일원이 될 수가 없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아예 시도 자체를 안 한다는 말이다.
무기력이 아니라 안분자족
영국에는 계급이 다른 젊은 남녀가 결혼해서 겪는 갈등을 다룬 영화도 많다. 옛날 빅토리아 시절 얘기가 아니다. 지금도 분명 있다. 영어에 ‘올려 하는 결혼(marry up)’ ‘내려 하는 결혼(marry down)’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아직도 사회적 계급 이동은 어렵다. 그래서 굳이 힘들게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 노력하지 않는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영국은 이미 너무 잘 짜인 사회라 아무리 서민들이 노력해도 당대에는 크게 성공하기 어렵다. 기업 쪽으로 봐도 영국에는 서민 출신으로 미국처럼 크게 성공한 스타 기업가가 별로 없다. 겨우 버진그룹 총수 리처드 브란슨과 최근 TV 인기 프로그램 ‘아프렌티스(Apprentice·수련생)’의 사회자로 인기를 끄는 알란 슈가가 대표적 ‘험블 오리진(humble origin·낮은 계급 출신)일 정도다. 영국 지식인 중 일부는 서민의 무기력에 대한 이유와 설명과 분석을 구차한 변명이라고 질타하기도 한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아예 포기해 버리고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자기만족을 하는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포도’의 이야기라고 한다.
다들 이렇게 영국 서민의 무기력을 말하는데, 필자는 영국 서민이 자신이 타고난 환경을 바꾸려 노력하지 않고 주어진 그대로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과연 ‘무기력’이라고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다. 물론 필자도 고등학교 졸업생의 83%가 대학 진학을 할 정도로 온 국민이 신분 상승에 목숨을 걸고, 과로사하면서라도 승진해야 하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하는 나라에서 와서 그런지 영국 서민의 처지에 안 맞는 삶의 자세가 가소로울 때도 많다. 기술이 좋아서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일이 밀리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일당만큼의 돈만 벌면 더 이상 일을 안 하는 배관공, 방금 폐점을 해 아직 안에 있으면서도 문을 안 열어주는 구멍가게 주인, 주말 저녁에 일하면 일당을 세 배나 받는데도 일 안 하겠다는 종업원들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가 상당히 헷갈린다. “돈 더 벌면 뭐하냐. 난 지금 집에 가서 씻고 저녁 먹고 펍에서 친구들과 우리 클럽의 축구 시합을 봐야 한다”고 바삐 가는 이 영국인의 행복 기준을 내가 과연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영국 서민들을 보면 옛날 우리 선비들의 삶의 자세가 생각난다. ‘안분자족(安分自足)’과 ‘안빈낙도(安貧樂道)’
영국 서민을 하나로 말할 수는 없다. 노력하는 서민과 노력하지 않는 서민으로 갈라야 한다. 불행하게도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자신을 연마해 새로운 창조를 하는 영국 서민은 아주 극소수이다. 문제는 대다수의 영국 서민층이 너무 안분자족하다 못해 아예 자신이 타고난 처지에 젖어 벗어날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영국 사회는 모든 것이 주어지는 사회 안전망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익숙한 삶의 수준이 굳이 노력해서 얻지 않아도 유지된다. 영국인 누구도 결코 다 알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사회복지혜택이 있다. 이렇게 너무 많은 것이 주어지다 보니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는다. 사람은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것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임대서민아파트에서 태어나 자란 서민의 자식은 거기가 자신의 세계다. 가족과 친구들도 다 거기 살고 있는데 왜 다른 곳으로 이사 가야 하느냐고 묻는다. 전망이 더 좋고 좀 더 큰 아파트에 가서 외롭게 살기보다는 전혀 불편을 못 느끼는 임대서민아파트가 더 좋다고 한다.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살아온 임대서민아파트가 낡고 지저분해도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열등감도 위화감도 없다
요즘 영국에는 모든 사회복지혜택을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entitlement cutture)’라고 여겨 끝없이 요구만 하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복지 개혁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 동시에 서민이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되었고 자신의 삶을 바꿔 보고자 하는 ‘영감(inspiration)’을 안 갖는지에 대한 논의도 한창이다.
영국 서민의 이런 무기력함은 원래 유명하다. 대물림되는 가난과 무지를 벗어날 방법이 분명 주어져 있는데도 전혀 노력하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그대로에 만족해 살아간다. 사실 영국에서는 서민이 신분이나 처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경우 그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잘 되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국 서민층은 자신이 태어난 수준에 만족해 하며 살아간다. 소위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이나 ‘신분 상승’의 욕망이 전혀 안 보인다.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라 책 한 권 따로 살 일이 없다. 대학은 최근까지 수업료가 없었고 생활비까지 융자해 주었다.
올해 신학기부터 신입생의 학비가 거의 외국 학생들이 내는 수준으로 올라 학생들 불만이 여간 아니나 사실 이는 지금 당장 내는 것도 아니다. 생활비와 마찬가지로 융자를 해주었다가 졸업 후 취직이 되어 연봉이 1만5000파운드(2700만원) 정도 되면 그때부터 조금씩 갚아 나가면 된다. 만일 그런 수준의 연봉을 평생 못 벌면 안 갚아도 되는 돈이다. 물론 사회 첫발을 거의 4만파운드(7200만원)나 되는 빚을 어깨에 지고 진출하는 셈이라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공부할 길이 있다. 세상이 잘못되어, 부모를 잘못 만나 공부를 못했다라는 원망이나 핑계가 나올 수 없게 되어 있다. 충분한 길이 열려 있는데도 자신이 못나서, 공부하기 싫어서, 게을러서 안 한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영국인은 학력에 대한 불만도 열등감도 크지 않고 사회계층 간 위화감도 별로 없다. 잘사는 사람들에 대해 배 아파하지도 않는다. 또 가진 자니 못 가진 자니 하는 한국 정치인들의 단골 이슈가 영국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영국 서민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된 데에 대한 분석은 상당히 많다. 현세에서 자신의 처지에 크게 불만 가지지 말고 열심히 교회 믿으면 내세에는 잘산다고 가르친 지배자 논리의 기독교 문화 때문이라는 분석부터, 영국 특유의 국민 중우(衆愚) 교육 때문이라는 설명까지 다양하다. 심지어는 영국 특유의 사회적 관습도 크게 작용한다고도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급의 사다리(class ladder)’를 오를 수 없으니 아예 처음부터 포기한다는 것이다. 기껏 올라가 신분세탁을 한들 결코 계급 차이를 넘어서 상류사회는 물론 중산층 계급에서마저도 영원히 진정한 일원이 될 수가 없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아예 시도 자체를 안 한다는 말이다.
무기력이 아니라 안분자족
영국에는 계급이 다른 젊은 남녀가 결혼해서 겪는 갈등을 다룬 영화도 많다. 옛날 빅토리아 시절 얘기가 아니다. 지금도 분명 있다. 영어에 ‘올려 하는 결혼(marry up)’ ‘내려 하는 결혼(marry down)’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아직도 사회적 계급 이동은 어렵다. 그래서 굳이 힘들게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 노력하지 않는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영국은 이미 너무 잘 짜인 사회라 아무리 서민들이 노력해도 당대에는 크게 성공하기 어렵다. 기업 쪽으로 봐도 영국에는 서민 출신으로 미국처럼 크게 성공한 스타 기업가가 별로 없다. 겨우 버진그룹 총수 리처드 브란슨과 최근 TV 인기 프로그램 ‘아프렌티스(Apprentice·수련생)’의 사회자로 인기를 끄는 알란 슈가가 대표적 ‘험블 오리진(humble origin·낮은 계급 출신)일 정도다. 영국 지식인 중 일부는 서민의 무기력에 대한 이유와 설명과 분석을 구차한 변명이라고 질타하기도 한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아예 포기해 버리고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자기만족을 하는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포도’의 이야기라고 한다.
다들 이렇게 영국 서민의 무기력을 말하는데, 필자는 영국 서민이 자신이 타고난 환경을 바꾸려 노력하지 않고 주어진 그대로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과연 ‘무기력’이라고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다. 물론 필자도 고등학교 졸업생의 83%가 대학 진학을 할 정도로 온 국민이 신분 상승에 목숨을 걸고, 과로사하면서라도 승진해야 하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하는 나라에서 와서 그런지 영국 서민의 처지에 안 맞는 삶의 자세가 가소로울 때도 많다. 기술이 좋아서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일이 밀리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일당만큼의 돈만 벌면 더 이상 일을 안 하는 배관공, 방금 폐점을 해 아직 안에 있으면서도 문을 안 열어주는 구멍가게 주인, 주말 저녁에 일하면 일당을 세 배나 받는데도 일 안 하겠다는 종업원들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가 상당히 헷갈린다. “돈 더 벌면 뭐하냐. 난 지금 집에 가서 씻고 저녁 먹고 펍에서 친구들과 우리 클럽의 축구 시합을 봐야 한다”고 바삐 가는 이 영국인의 행복 기준을 내가 과연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영국 서민들을 보면 옛날 우리 선비들의 삶의 자세가 생각난다. ‘안분자족(安分自足)’과 ‘안빈낙도(安貧樂道)’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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