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토요일

클래식 매니아’ 공자, 음악을 통해 예를 배우다




▲ 작자 미상, ‘방악장홍’, 1904년, 목판에 채색, 27.6×37.8㎝, 장서각
공자를 공부하면서 가장 놀란 것은 그가 음악을 사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고지식한 남자가 음악을? 점잖게 무게만 잡고 앉아 감정 표현은 전혀 하지 않을 줄 알았던 공자가 음악을 사랑했다니. 새로운 발견이었다. 사랑도 적당히 취미로 집적거리는 사랑이 아니었다. 지독한 사랑이었다. 그는 자주 노래를 불렀다. 틈만 나면 악기를 연주했다. 다른 음악가의 연주를 듣고 나면 적절한 의견을 실어 음악을 평가했다.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논어’에는 공자가 음악에 대해 언급한 이야기가 열아홉 차례 나온다. ‘공부자성적도’에도 공자가 거문고를 타거나 경쇠를 치는 등 음악과 관련된 그림이 아홉 번 등장한다. 그의 생애에서 음악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의 대부인 그가 음악을 사랑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취미였을까. 아님 다른 의미가 담겨 있을까.

‘방악장홍(訪樂萇弘·장홍에게 음악에 관해 자문을 구하다)’은 ‘공부자성적도’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공자는 주(周)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禮)를 묻고 난 후 장홍(萇弘·?~기원전 492)을 찾아간다. 장홍은 주나라의 대부(大夫)였다. 공자가 특별히 시간을 내 찾아가 음악에 대한 자문을 구한 것을 보면 그 분야의 전문가로 이름이 알려졌던 것 같다. ‘방악장홍’은 장홍과 만난 공자가 평소 자신이 궁금했던 내용을 장홍에게 묻는 장면을 그렸다. 병풍이 특정인물 뒤에 배치되지 않고 두 사람의 중앙에 놓인 것을 보면 두 사람이 대등한 관계로 만난 것 같다. 대등하게 배치된 만큼 어느 쪽이 장홍이고 어느 쪽이 공자인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만난 정황을 참조하여 추측할 뿐이다. 공자가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러 온 만큼 예를 갖춰야 할 것이다. 예를 갖춘 사람은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양손을 드러낸 채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왼쪽이 장홍이고 오른쪽이 공자일 것이다. 오른쪽 인물이 앉은 키가 큰 것으로 봐서 ‘키다리’ 공자임이 분명하다. 공자 뒤에는 거문고를 든 제자와 두 명의 제자가 서 있고 장홍 뒤에는 생황, 편종, 거문고를 든 제자들이 서 있다. 공자는 장홍에게 무엇을 물었을까.

공자가 장홍을 찾아간 것은 34세 때였지만 음악을 위해 처음 스승을 찾아간 것은 29세 때였다. 그는 사양자(師襄子·노나라에서 음악을 관장하던 관리)에게 가서 거문고를 배웠다. 공자가 사양자를 만나 거문고를 배운 태도를 보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예술가의 전형적 모습이 드러난다. 공자는 거문고를 배우면서 열흘이 넘도록 한 곡만 연습했다. 그 모습을 본 사양자가 그만하면 됐다고 해도 공자는 운율을 익힐 때까지 계속 연습했다. 운율을 알고 나서는 음악에 담긴 의미를 알 때까지 연습하고, 음악을 만든 사람됨을 알 때까지 연습했다.

공자는 쉴 때 거문고를 연주했다. 고민이 있을 때는 격한 감정을 담아 경쇠를 연주했다. 그에게 교육을 받은 제자들도 곧잘 악기를 연주했다. 제자 자유는 무성 땅의 재상으로 있을 때 거문고를 연주했다. 스승의 연주를 듣고 귀가 트인 제자 민자건은 공자가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스승의 마음이 가라앉아 있음을 알아챌 정도였다. 성질 급한 제자 자로는 공자를 따라 거문고를 연주하다 소리가 좋지 않다고 스승에게 핀잔을 들었다. 공자가 제자를 혼낼 때도 음악이 등장한다. 제자 유비가 공자를 만나러 왔을 때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던 공자는 유비가 방을 나서기가 무섭게 거문고를 연주하며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제자 유비가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공자는 악기만 연주한 것이 아니다. 노래도 자주 불렀다.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깊은 산골짜기에 핀 난초를 봤을 때였다. 공자는 수레를 멈추게 한 후 거문고를 꺼내 연주하면서 ‘의난조(猗蘭操)’라는 곡을 짓고 노래했다. 잡풀 사이에 섞여 자라는 난초가 마치 무지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의 모습 같다는 내용의 곡이었다. 제후들이 맹약을 했던 단위에서도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산천은 의구하데 인걸은 간 데 없는’ 인생무상을 노래한 시였다.

그러니까 공자가 장홍을 찾아가 자문을 구한 것은 단순히 거문고를 잘 타는 방법이 아니었다. 예에 대한 자문이었다. 그 매개체가 음악이었을 뿐이다. 공자가 장홍을 만나고 떠난 뒤의 후일담을 들어보면 그 사실이 자명해진다. 공자가 떠난 뒤 장홍은 유문공(劉文公)을 만나 공자를 극찬한다. “공자는 성인의 풍채를 가졌으며, 선왕의 도를 전하고, 겸허하게 예를 몸소 실천하며, 넓은 식견과 이상을 가지고 성인의 도를 실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문공은 “일개 평민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성인의 도를 세상에 펼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장홍이 다시 말하기를 “요순(堯舜)임금,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도(道)는 사라져 버리고 예악은 붕괴된 이때, 공자가 기강을 다시 올바르게 세우리라 생각됩니다”라고 했다.

장홍과 유문공의 대화는 흘러흘러 공자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공자의 대답이 참하다.

“내가 어떻게 그런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다만 예와 악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요순임금과 문무왕은 성왕(聖王)의 상징이다. 그들이 다스렸던 시대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의 대명사다. 일개 평민인 공자가 이미 사라져버린 영광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칭찬인데 흥분하지도 않는다. 겸손이 대단하다.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겸손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있는 자의 확신에 찬 겸손이다. 이 부분에서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던 공자의 이야기가 겹친다. 공자는 예와 악을 알고 좋아하고 즐긴 사람이었다. 즐긴 정도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제나라에서 소(韶)를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할’ 정도였다.

공자가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음률만이 아니었다. 그는 음악을 통해 예를 실천하고자 했다. 예악(禮樂)이란 말처럼 음악은 예와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앞뒷면이었다. 공자는 ‘시(詩)에서 감흥을 일으키고 예(禮)에서 근간을 세우고 악(樂)에서 성정을 완성한다’고 믿었다. 공자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시는 필수과목이었다. 공자 당시의 고전음악은 주로 시와 관련된 음악이었다. 시 교육과 음악 교육은 분리되지 않았다. 시에 대한 학습이 예로, 음악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자가 음악을 사랑한 것은 단순히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예를 완성하는 방법론의 실천이었다. 음악을 통해 예를 가르쳐주던 악사 중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많았다. 공자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했는지 다음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악사 면(冕)이 뵈러 와 계단에 이르자 공자께서는 “계단입니다”라고 하시고, 자리에 이르자 “자리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셨으며, 모두 앉자 공자께서 “아무개는 여기에 있고, 아무개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알려주셨다. 악사 면이 나가자 자장이 물었다. “이것이 악사와 이야기하는 방법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이것이 본래 악사를 도와주는 방법이다.”’

‘논어’ 위령공에 나오는 내용이다. ‘논어’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마음이 답답할 때 경쇠를 두드리던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만큼 감동적이다. 그래서 ‘논어’는 살아있는 공자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미팅 장소다. ‘공부자성적도’는 공자와의 만남의 장소를 실시간으로 전송해 주는 고화질의 미디어다.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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