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5일 화요일

경주 최부자의 성공비결






경주 최부자, 최준(오른쪽) 선생과 동생 최윤(왼쪽)





경주 교동 최부잣집은 한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다. 어떻게 해서 이런 영예의 호칭을 얻게 됐을까.
최부잣집에는 대대로 독특한 철학이 전해 내려왔다. 흉년이 들면 자신들의 곳간을 헐어 이웃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것. 다른 부자들은 흉년을 헐값에 농토를 사들이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지만, 그 집은 결코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았다. 또 어떤 손님이라도 극진히 대접하고, 노잣돈에다 양식거리까지 챙겨 보내는 인심을 썼다. 이들의 파시조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군을 물리친 최진립이다. 병자호란 때 순국한 그는 정무공의 시호를 받고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전란 이후 땅이 피폐해지자, 최부잣집은 관개시설을 확보했다. 그 덕분에 새로운 농사법인 이앙법을 도입하고 노동력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들의 소작농 관리법은 특별했다. 다른 지주들의 절반밖에 안 되는 소작료를 받고 중간마진을 없애는 등 지주와 소작인이 상생하는 길을 모색했다.

일제 치하, 최씨 문중의 장손인 최준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제의를 받아들여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또 일제의 치열한 감시 아래에 자신은 백산상회 대표로 활동하는 한편, 동생 최완은 대동청년단의 비밀요원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해방 후엔 인재양성에 뜻을 품어 400여년 동안 모아온 전 재산을 영남대의 전신인 계림대와 대구대에 기부했다. 최부잣집은 그로써 모든 재산을 사회로 환원한 셈이었다.‘조선 최고 부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영원히 따라다니게 된 것은 그래서였다.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논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 경주 최부자 집안이다. 경주 최부자 집안은 무려 300년 동안 만석의 재산을 유지했으며 많은 선행과 독립운동의 후원자 역할을 통하여 부자로서는 드물게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최씨 집안은 권력을 멀리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였으며,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고, 검소하게 살며 자선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항일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전 재산을 바치는 것으로 기나긴 부의 세습을 마무리했다. 참된 부자의 전범이 아닐 수 없다.
'부자가 3대 가기 힘들다'는 옛말을 무색하게 만든 경주 최부자 가문은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19세손인 최국선(崔國璿, 1635~1682)으로부터 28세손인 한말의 최준(崔浚, 1884~1970)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그 부를 유지하였다. 이렇게 장기간 한 집안이 부를 유지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최부자 집안이 칭송을 받는 것은 부를 많이 축적했고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자선 활동과 사회공헌으로 지도층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최부자 집안의 모범은 한, 두 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집안의 전통으로 전해내려 온다는 점에서 음미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최부자 가문의 기본적인 생활지침은 육연(六然)이라는 가훈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육연의 내용을 살펴보면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처신함에는 초연하게 행동하라)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을 대할 때는 온화하게 대하라)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라)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라)
 
 득이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처신하라)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에도 태연하게 행동하라) 이다.

최부자 집안의 가훈은 육연 외에도 보다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양반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하되 권력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지위는 필요하나 권력까지 가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도 되겠다. 요즘 식으로 해석하자면 정경유착은 피하라는 교훈도 될 것이다. 과거를 보라는 것은 학문을 가까이하여 지적능력을 기르라는 가르침이다. 지식과 최소한의 신분유지로 부는 지키되 권력은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은 오늘날의 자본가들에게도 금과옥조 같은 교훈이다.
2)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대단히 역설적인 가르침이다. 부잣집의 가훈이라면 재산을 늘리라고 가르칠 것 같은데 최부자집의 유훈은 정반대이다. 그러나 이 집안을 존경받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가르침 때문이다. 최부자집의 후손들은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부에 대한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그들은 이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소작률을 낮추어서 부의 혜택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로 퍼져나가게끔 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수확물의 절반을 지대(地貸)로 주는 병작반수제를 과감하게 도입하여 소작인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키웠던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소작인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고 최부자집의 재산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윈-윈 전략의 선구자적인 실천이었다고나 할까.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씨 집안의 셋째 원칙은 지나가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덕을 쌓고 인심을 얻으라는 가르침이다. 과객(過客)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선행을 베푸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손님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하는 수단도 되었다. 최부자집에서는 1년 소작 수입의 3분의 1인 쌀 1천 석을 과객을 접대하는 데 사용하였고 손님이 많이 머무를 때는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들이 베푼 적선의 규모를 알 수 있다.
4)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남의 불행을 치부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정의로운 경제활동을 하라는 뜻도 될 것이며, 이웃의 원성을 살 일은 하지 말라는 의미도 되겠다. 최부자집은 이웃의 어려움을 통해서 재산을 늘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웃이 어려울 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그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이렇게 얻은 인심은 다른 기회에 재산을 늘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최부자집의 재물에 대한 철학은 부를 축적하는 데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이 어려울 때를 축재의 기회로 삼는 요즘 기업인들에게도 크게 교훈이 되는 가르침이다.
5)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이웃과 나누라는 가르침이다. 그것도 사방 백리안의 이웃과 나누라는 것은 그 스케일 면에 있어서도 로마제국 귀족들의 선행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규모이다. 최부자집은 춘궁기나 보릿고개가 되면 한 달에 약 100석 정도의 쌀을 이웃에 나누어 주었고, 흉년이 심할 때에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바닥이 날 정도로 구휼을 베풀었다고 한다. 소작수입의 3분의 1을 빈민구제에 썼다는 것이다. 최씨 집안의 이러한 전통은 1대 부자인 최국선의 선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최국선은 신해년(1671)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지켜서 무엇 하겠느냐"며 곳간을 헐어 이웃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 이후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이 가훈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6)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집안의 살림을 사는 여자들에게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강조하는 이 가르침은 자신들에게는 박하고 엄격하게, 타인들에게는 후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최부자집 생활철학의 진수이다. 자신들을 낮추고 겸손하게 사는 생활태도는 요즈음 졸부들의 천민자본주의적 돈 쓰기나 생활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렇게 교육받은 후손들이 재산을 낭비할 리 없으므로 이 교훈이야말로 300년 동안이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비결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핵심이 아닐 수 없다. 사학자 조용헌은 그의 저작『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에서 최부자집 사례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 이러한 최부자집의 가훈을 '한국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지칭하였다. 최부자집의 부는 마지막 부자인 최준의 대에 와서 길고 긴 300년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나 그것은 부의 끝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공헌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 문파(汶坡)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오늘날의 영남대를 설립한 교육 사업가로서 우리의 근대사에 독특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거부이면서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나라 일을 걱정하던 최준은 1914년, 부산에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회사인 백산상회를 설립한 백산 안희제를 만나게 된다. 백산상회는 겉으로는 무역회사였으나 내용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1919년 5월 백산상회는 자본금 100만 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하게 되는데, 이때 최준은 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백산무역은 서울, 대구, 원산, 만주, 봉천 등지에 지점을 설치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으나, 상해임시정부 등 독립운동단체에 자금을 계속 지원하다보니 경영은 날로 악화되었다.
최준이 상해임정에 자금을 송금한다는 사실을 탐지한 일경은 그를 경찰서에 수감하고 수시로 혹독한 고문을 하였다고 한다. 계속되는 일경의 감시로 백산무역의 자금난은 날로 심각해졌고 결국 최준은 1927년 110만 원이라는 엄청난 부채를 떠안고 파산하게 된다. 광복 후 최준은 그때까지 남은 전 재산은 물론,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과 장서류 8000 권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교와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최준과 그의 둘째동생인 최완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최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1921년 35세로 순국했다.
최준의 바로 아랫동생인 최윤은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죄로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윤이 중추원 참의를 지낸 것은 집안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희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치하에 국내에 있었던 자본가 집안으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선택 이었으리라.
생각해보면 일제치하에 대지주 집안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사업을 했다는 것은 군사독재 치하에서 재벌이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준의 증손자는 현재 창원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고 있는 최성길(崔成吉)이다.
..예종석(한양대 경영학 교수)
정재(淨財)사상의 실천으로 12대를 이은 만석지기




 
 주춧돌만 남은 사랑채와 별채
1970년도에 화재로 불타 없어진 사랑채 터이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귀(富貴)와 수복(壽福)을 갈망한다. 생각해 보면 부(富)의 근본은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하여 춥고 배고프지 않음을 물론이요, 남에게 빌러 갈 것이 없으니 마음 상할 일이 없음을 의미한다. 귀(貴)의 근본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니 없씬 여김을 당하거나 핍박받을 일이 없음을 뜻한다. 수(壽)는 세상을 원망하거나 미련가질 일이 없을 만큼 타고난 천수(天壽)를 다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조선시대 영남 최고의 부자로 널리 알려진 경주 교동의 만석지기 최부자 댁을 찾아간 것은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는 5월 초였다. 날씨가 궂어 사진촬영에 약간의 애로가 있었지만 흐리면 흐린 대로 찍으면 된 일이니 주저할 까닭은 없었다. 몇 년 동안 경부고속도로를 하도 많이 타서 이제는 아랫 지방으로 내려갈 때는 일부러 길을 바꿔 낯선 길로 다녀보고는 한다. 그런 까닭에 경주에 들럴 기회도 그 만큼 줄어들었다. 따라서 들런 김에 이곳 저곳 다 기웃거려야 했다.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교동의 최부자댁에 이르렀을 때는 하루 해가 저물똥 말똥할 때 쯤이었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최부자댁은 사찰이나 고궁과 달리 개인의 사유 재산에 속한다. 그러니 출입에 있어 쥔장의 심기가 불편해지지 않도록 다소 유의할 점이 있었지만 시간에 쫓기다보니 그런 일에까지 마음을 쓸 수가 없었다. 쥔장의 허락도 없이 대문 안으로 쓱 들어서니 행랑채의 댓돌 위에는 신발 한짝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열린 문틈으로 삐끔 들여다보니 누군가가 상당한 수준의 전공서적을 쌓아놓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느낌으로는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의 공부방처럼 보였다. 그렇든 말든 나는 이곳 저곳 쑤석거리고 다니며 셔트를 눌러댔다.

1970년에 화재로 불타 버린 사랑채와 별채 자리에는 주춧돌만 가지런히 드러나 있다. 이 주춧돌뿐만 아니라 이 댁의 모든 쓰임새가 많은 돌들은 옛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것이라 한다. 이 집터는 원래 신라 때 요석 공주가 살던 요석 궁터로 알려져 있다. 요석 공주는 원효대사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사람이다. 이 설총이 이두를 만든 신라의 석학이었던 것이다. 이 요석궁의 위치는 신라의 궁궐이 있었던 반월성과 인근하는데 대지가 인근 약 7,000여 평에 이를 만큼 대단한 규모였던 모양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정무공 최진립이 이 집안의 원조인데 그 후 이 터를 사들여 집을 짓고 본격적으로 부(富)를 쌓았던 최국선, 그리고 마지막 만석지기 최준에 이르기까지 12대 동안 이 집안에서는 집을 지을 때 타지역에서 돌을 가져올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신라 때 요석궁을 지으며 썼던 돌들이 하도 많아 그 돌들이면 충분했다고 한다. 최부자집 보다 조금 일찍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인근의 경주 향교 역시 주춧돌을 비롯하여 건축에 필요한 모든 돌들은 요석궁을 지을 때 섰던 그 돌들이라고 한다.

경주 최부자 댁은 정재사상(淨財思想)을 실천한 우리나라의 모범적 명문가이다. 현실적으로 3대 부자가 없고 3대 가난이 없다는 말이 널리퍼져있다. 또한 부자는 하늘이 낸다는 막연한 믿음도 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이 허황한 말이란 것을 입증한 집안이 경주 최부자 댁이다.

이 집안의 마지막 만석지기였던 최준이 광복 이후 쇠락한 국운을 회복하는데는 교육사업이 첩경이라는 믿음으로 현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전 재산을 다 기증하기까지 집안의 가훈으로 내려온 육연(六然)을 비롯한 수신과 제가의 덕목을 살펴보면 12대 만석지기, 9대 진사의 비결이 보인다.

이 내용을 다시 해석해 보면, 만석 이상 재산은 모으지 말라고 한 뜻은 재산 축적에 지나친 욕심을 내다보면 남 못할 짓을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고,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는 뜻은 부자가 권력까지 탐하면 결국 당쟁에 휩쓸려 패가망신하게 됨을 경계한 것이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것은 문(文)을 숭상하는 한편으로 인간관계에 있어 인격을 존중한 것이기도 하다. 흉년에 남의 논밭 사지 말라는 뜻은 윤리경영의 지침이면서 인간애의 상징과 같은 귀한 말이다.

여기서 '연'의 사전적 의미는 '그러하다', '그렇다고 여기다'인만큼 전체적으로 관용, 긍정, 초연의 뜻이 담겨 있다.

최부자댁이 360년 만석지기를 유지하며 존경받는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윤리의식과 도덕성을 바탕으로 합리적 경영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최부자 댁에 전래되는 가훈은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경제이론이며 바람직한 사회를 위해 가진 자들이 지켜야 할 일종의 윤리헌장이기도 하다.

지금 최부자 댁은 예전과 같은 만석지기 부자가 아니다. 마지막 만석지기였던 12대 최준이 전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했기 때문이다. 지금 최부자 댁도 최부자집안 소유가 아니라 이 집안에서 세웠던 대구대학교의 후신인 영남대학교 재단 소유이다. 전 재산을 다 이 나라 교육사업을 위해 대학재단에다 기증해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이 집안 후손 중에는 법조계 인사도 있고, 사업을 하는 분들도 있지만 모두 대대로 내려오던 가훈을 아직도 실천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요즘 최부자 댁은 예전의 영화로운 부자집이 아니라 많이 퇴락한 전통가옥으로 남아 있다. 사랑채와 별채는 1970년 화재로 불타고 600섬을 들일 수 있었던 창고건물만 남아 만석지기 집안의 한 켠을 엿보게 할 뿐이다. 그러나 이 집안은 홍익인간과 경천애인사상을 경제논리에 적용한 사례로써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과 결합되어 부활하고 있다. 몇몇 학자들이 이 집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집안에 내려오던 만여권의 장서는 지금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기증 관리되고 있다. 불행한 것은 그 중 3,000여 권이 분실되어 소재파악이 안된다고 하는 점이다.

이 집안에 내려오는 얘기들은 무지 많은데 몇 가지만 간추리면 이 집안에서 경주 남산에서 생산되는 수정을 가지고 돌안경을 만들었고, 울산 구암에서 미역을 양식했다는 자료도 있다. 울산 구암미역은 대한민국 최고의 양질 미역이다. 또 요즘은 과메기라고 하면 꽁치를 피득하게 말린 것이지만 예전 이 집안에서 손님을 접대하며 상위에 올렸던 과메기는 청어 과메기였다. 귀한 음식으로 과객을 접대하고 굶주린 이웃을 돌보며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했던 이 집안에서는 요즘 '경주 교동 법주'(중요무형문화재 제86-다호, 전수자 배영신)를 생산하여 보급하고 있다. 이 술은 순수 찹쌀 재래식 발효 곡주인데 도수가 16도 정도이다. 조선 숙종 때 궁중에서 음식관리직을 맡았던 이 집안 후손인 최국선이 전래한 것인데 살아있는 생주여서 10°c 이하의 냉장고에서 보름 정도의 보관이 가능하다. 이 술은 찹쌀의 진뜩한 맛이 감도는 미황색 액체인데 그 부드러운 맛과 향은 애주가들이 선호할 만한 명주의 품위를 지니고 있다.

경주 교동 만석지기 최부자댁은 훌륭한 이웃사랑의 경영철학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실천한 모범적 명문가이다. 이 집안의 내력은 흘러간 우리 옛 역사가 아니다. 21세기 대한민국과 함께 하는 절실한 현실이며 발전적인 미래를 담보할 거룩한 사상과 이념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최부잣집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1884-1970)의 결단은 또 하나의 인생 사표(師表)였다.

못다 푼 신학문의 열망으로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시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물은 똥거름(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대문 안을 막 들어서며 바라본 최부자댁 집안 풍경이다. 잘 다듬어진 석축으로 보아 이 집이 위세와 품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집을 지을 때 이용한 돌들은 모두 신라시대 요석궁을 지을 때 쓴 그 돌들이라고 한다.



KBS 1TV ‘한국사 傳’ ‘12대,400년 부자의 비밀-경주 최부자’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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