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일 금요일

프랑스대혁명의 두 아버지 루소 vs 볼테르

루소와 볼테르는 계몽주의라는 사상적 지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프랑스를 대혁명으로 이끈 철학자이자 작가다. 두 사람은 사후 프랑스를 위해 공헌한 위인들을 기리는 판테온에 나란히 안장되었지만 생전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던 원수 사이였다. 오는 6월 28일 루소 탄생 300주년을 맞이해 두 지적(知的) 거인들의 관계를 조명하면서 루소 사상의 현재적 의미를 가늠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루소 “볼테르의 모든 글 읽었다”

볼테르는 루소보다 18살 연상이다. 루소가 20대 초반 학문의 세계에 접했을 때 볼테르는 이미 그의 우상이었다. 루소는 볼테르가 쓴 모든 글을 찾아 읽을 정도로 그를 흠모했다. 루소는 볼테르에게서 표현의 명확성과 문체의 우아함을 배웠다.

루소가 볼테르에게 매혹된 것은 그의 글 때문만은 아니다. 볼테르는 미래의 프리드리히 2세가 될 프로이센 황태자와 서신 왕래를 했다. 문학적 성공을 통한 사회적 상승의 꿈은 루소를 포함해 당시의 재능있는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매력을 발휘했다.

루소는 1742년 문학적 성공이라는 청운의 꿈을 안고 스위스 제네바에서 파리로 입성한다. 하지만 자신이 사회적 배경 없는 시골뜨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귀족을 모시는 서기 생활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 그가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선량한 본성을 타락시킨다”는 논지의 ‘학문예술론’으로 38살이란 늦은 나이에 혜성처럼 유럽의 지성계에 출현한 것이다. 루소는 학문과 예술, 기술의 향상이 물질적 발전은 물론 도덕성의 진보까지 갖고 올 수 있으리라는 계몽주의 철학의 기본 신념을 공격했다. 또한 정치 및 윤리의 근본적 개혁을 요청했다.

볼테르를 비롯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를 도발적 역설 혹은 농담으로 치부했다. 루소의 주장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루소는 저서 ‘인간불평등기원론’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더욱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 가상적으로 재구성된 역사를 통해 자연적으로 선량한 인간이 사회제도의 모순을 통해 사악해졌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물론 루소가 사회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긍정적 변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형성되는 애정이나 우정, 인류애를 통해 자아를 확장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단순한 욕구가 아니라 보편적 이성을 통해 스스로 자신에게 부과한 법에 따라 행동하는 도덕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미덕으로 고양된 존재의 행복은 자연 상태의 본능적 행복보다 더욱 우월한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냉혹한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현재의 사회에서 인간들 사이의 투명한 소통은 불가능해졌다. 인간은 사회라는 전체의 일부로서 공동선을 지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함으로써 시민적 의무와 자연적 성향 사이에서 내적으로 분열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볼테르 “루소는 위선자”

볼테르는 루소의 주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로 태어났으며, 사회 안에서 살 때만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한 쾌락을 최대한 향유할 수 있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만든 생산물을 교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며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봉사한다. 교환은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사교의 즐거움까지 포함한다. 볼테르를 포함해 대부분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여 자신이 사회적 존재이고 사회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기만 한다면 사회적 갈등은 자연히 해소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소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통한 점진적 계몽보다, 미덕을 향한 열망에 기초한 의지적 결단이 더욱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 첫걸음으로 자신의 글에 스스로의 삶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이른바 ‘자기 개혁’을 실천한다.

루소는 ‘학문예술론’이 성공한 이후 문단에서 벗어남으로써 특권층의 문예후원제도가 부여하는 특권을 거부했다. 오로지 악보 필사로 생계비를 벌며 진리만을 위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이는 문학적 영광을 확립해 주는 특권층의 기능과 이러한 시혜를 향유하며 출세한 지식인 계층을 무시한 셈이 됐다.

루소는 철학자들과의 경쟁에서 이성보다 도덕적 미덕에 우월성을 부여했다. 그 다음 그 스스로 그러한 미덕의 화신으로 자처함으로써 ‘게임의 법칙’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루소는 철학자들이 성직자에 대해 사용했던 무기를 들이밀면서, 그들이 아무런 사심 없이 진리만을 말한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지식인의 정신적 독립은 그것이 물질적 독립에 기반을 두지 않을 때 거짓말에 불과하다. 루소는 당대의 철학자들이 교회와 정치적 권력이 맺고 있는 유대관계를 깨뜨리고 성직자의 자리에 대신 들어가 권력층과의 새로운 공모관계를 이루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소는 필연적으로 계몽주의의 대부인 볼테르와 적대관계에 돌입한다. 볼테르가 “루소는 계몽주의를 내부로부터 전복시키고 있는 유다”라고 비난하기에 이른다. 볼테르는 “루소의 자기 개혁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신비주의 전략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시민들의 견해’란 소책자를 발간하며 “교육서 ‘에밀’의 저자인 루소가 실제로는 자식들을 모두 고아원에 버린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루소, 월스트리트 점령 참여했을 것”

‘고백록’을 포함한 루소의 자전적 글 상당 부분은 이러한 공격에 맞서 자신의 내면적 진실을 방어하고자 하는 의도로 쓰여졌다. 루소는 사회가 개인의 외적 행동만이 아니라 가장 내밀한 욕망까지도 통제하는 기제임을 의식한 최초의 현대인 중 한 사람이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한 개인이 사회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소외되는 과정을 그려나갔다. 이와 함께 사회의 억압성을 폭로하며 “개인의 죄가 실은 한 개인의 책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책임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볼테르가 꿈꾸었던 세계처럼 보인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 기초한 개인의 자유는 거의 신성불가침한 권리로 인정받는다. 관용의 정신은 민주주의의 미덕으로 받아들여진다. 세계화는 서구적 이성의 발전과 이에 따른 문명의 진보를 입증하는 듯하다.

그러나 ‘생산성 제고’라는 기치 아래 벌어지는 무한경쟁과 불평등의 심화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진행 중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가 아니라 생산성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사회는 개인이라는 모래알들이 우연히 모인 광대한 인간사막으로 황폐화되고 있다.

루소는 “인간이 개인의 이익을 넘어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자아를 확장할 수 있는 평등한 공동체만이 진정한 인간 공동체”라고 생각했다. 루소가 만약 살아있다면 청년 백수들이 사회적 불평등과 자본의 기만에 분노하여 시작한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에 기꺼이 참여했을 것이라 믿는다.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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