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키주쿠 출신인 일본 개화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 |
근대적 의미의 사숙은 막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된다. 기독교와 유럽 문화의 전파 때문이다. 막부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본 지식인들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제한적으로 네덜란드와 무역을 행하던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유럽 문화의 우수성을 실감한다.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이른바 란가쿠(蘭學)이다. 어학·천문학·의학·물리학·측정학·수학이 일본인에게 알려진다. 막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일본인의 호기심과 관심을 막지는 못했다.
19세기 중엽, 2000여개 난립
란가쿠에 이어 독일·프랑스·미국으로부터 ‘요가쿠(洋學)’가 밀려오면서 양적·질적인 면에서 사숙의 영역이 확대된다. 막부가 제공하는 중국식 세계관에 기초한 커리큘럼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세상이 닥치면서 새로운 세계를 배우려는 젊은이가 폭증한다. 막부가 인정한 공식적인 교육기관인 ‘한코(藩校)’는 서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립교육기관이 사무라이나 귀족에게 한정되자 사숙이 생겨난다.
대륙이 아닌 섬나라의 장점 중 하나는 바다를 통한 정보습득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아시아 정복에 나선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미국에 관련된 모든 정보는 일본으로 들어간다. 중국도 남쪽 바다를 통해 외국 문물을 접하지만 베이징의 중국 지도부는 눈과 귀를 막는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18세기 들어 일본 열도는 주군(主君)을 잃거나 월급을 못 받는 사무라이들로 어수선했다. 전통 예법에 따르면 사무라이는 돈을 벌기 위해 장사에 뛰어들어서는 안된다.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해서도 안된다. 돈도 없고 시대적 불만이 많은 젊은 하급 사무라이들이 사숙에 눈을 뜬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먹고살아야만 한다는 생활고가 배경에 있다. 사숙을 열 경우 숙생들이 가져오는 학비를 통해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되기 때문이다. 공부만이 아니라 반막부 반체제의 중심이 된다.
‘데키주쿠(適塾)’는 19세기 초 일본이 대변혁기에 들어설 당시 만들어졌다.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선구자적 인재를 양성해낸 사숙의 최고봉이었다. 오가타 고안(緖方洪庵)이 1838년 설립했는데 처음에는 ‘란가쿠주쿠(蘭學塾)’란 이름으로 시작했다. 오사카에 있는 가와라마치(瓦町)가 시발점이다. 현재 역사 유물로 오사카대학이 관리하고 있다. 란가쿠주쿠와 더불어 막부 말기 사숙의 양대산맥에 해당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보다 4년 먼저 출발했다. 새로운 세계와 학문에 대한 열정이 들끓던 19세기 중엽 일본 전역에서 크고 작은 사숙의 수는 2000여개에 달했다고 한다.
데키주쿠, 설립 30년 만에 사라져
일본 역사에서 차지하는 데키주쿠의 위상은, 하급 사무라이 출신으로 의학자이자 네덜란드어에 능통한 오가타 고안의 철학과 가치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오가타는 천연두에 걸려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해 사무라이의 길을 접는다. 대신 의사가 되려고 공부를 하던 중 란가쿠에 빠진다. 네덜란드 의학서적을 통해 천연두 예방법을 배워 일본 최초로 천연두 접종을 시작한다.
일본 최초의 병리전문서적인 병학통론(病學通論)을 저술하기도 했다. 콜레라 예방과 치료에 관한 연구에도 선두적 역할을 한다. 오사카 의과대학은 오가타 고안의 의학 강좌를 모태로 설립됐다. 데키주쿠는 의학적 연구만이 아닌 근대화 문명과 문물을 전부 통달하기 위해 탄생했다. 제자들을 모아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네덜란드발 신문명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 데키주쿠의 설립 취지이다.
데키주쿠는 세계를 알고 공부하자는 수많은 사숙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가타 고안의 가르침을 받은 636명의 면면을 보면 현재 하버드대학 이상의 역할을 해낸 19세기 동양 최고의 인재양성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지유신에 직접 참여하고 이후 밀어닥친 근대화 작업의 선두에 섰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데키주쿠 출신이다.
일본 최초의 사립대학인 게이오(慶應)대학을 설립한 교육철학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일본 적십자사 초대 총재인 사노 쓰네타미(佐野常民), 철인 아톰을 그린 만화가 데쓰카 오사무의 증조부인 데쓰카 료센(手塚良仙), 일본 육군의 군의(軍醫) 초대 사령관인 이시자카 이칸(石阪惟寬), 육군장성 출신으로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총장을 지낸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일본 육군의 아버지인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 등이 데키주쿠 출신자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데키주쿠가 설립 30년 만인 1868년 문을 닫는다는 점이다. 오가타 고안이 숨진 지 1년 뒤이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일본 근대화에 불을 지핀 뒤 바람처럼 사라진 곳이 데키주쿠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주도한 쇼카손주쿠는 일본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공부한 곳이다. 1842년 설립돼 1858년 문을 닫을 때까지 전부 50여명의 숙생을 배출해냈다. 소수정예다. 기병대(奇兵隊)를 창설해 막부군을 무너뜨리는 데 공헌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육군대장에 오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처럼 무력을 기반으로 한 천황제 확립 지사를 창조해낸다. 이토 히로부미는 숙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장 교활하고 머리가 둔한 생도’로 인식됐다고 한다.
쇼카손주쿠는 요시다 쇼인이 흑선 페리를 타고 미국으로 밀항하려다 실패한 뒤 만들어진다. 자신의 꿈을 후진들에 이어가기 위해서이다. 주목할 부분은 요시다 쇼인과 사카모토 료마를 가르친 숙이 같은 곳이란 점이다. 하급 사무라이 출신인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숙이다. 사쿠마 쇼잔은 일찍부터 바다를 일본 근대화의 키로 본 인물이다.
해안방위 8책(策)은 흑선이 오기 전에 만든 정책 제언서이다. 료마의 선중팔책이 8개로 모아진 이유도, 사쿠마 쇼잔의 8책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료마가 바다를 통한 일본 근대화에 주목하고 해운중개업을 통해 반막부 군자금과 무기를 공급할 수 있게 된 것도 전부 사쿠마 쇼잔의 배움에서 비롯된다.
일본 근대화는 30년 만에 이뤄졌다?
일본학계에서 근대화의 계기로 잡는 것은 1853년 7월 8일에 나타난 미국 동인도함대 소속 흑선(黑船) 4척의 출현이다. 철로 만든 배를 본 뒤 사카모토 료마 등의 선각자들이 변혁에 나선다. 개방에 반대하던 막부가 붕괴되고 천황제로 힘을 모은 뒤 이어 메이지유신으로 갔다는 것이다. 흑선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서방식 근대화가 필요하고 결국 천황을 통한 중앙집권제를 통해 내부의 모순과 문제를 한순간에 해결했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과 산업화, 시민계급으로 이어지는 150년이 넘게 걸린 유럽의 근대화를 일본은 불과 30여년 만에 해치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853년 흑선을 보고 공포에 떨었던 일본은 불과 23년 만인 1876년 조선 바다에 나타나고 1895년에는 청일전쟁을 통해 중국을 무력으로 제압한다. 세상물정 모르던 조선과 중국은 일본 근대화의 희생물로 전락한다. 흑선과 뒤이은 메이지유신이 일본 근대화의 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일본학계에서는 흑선과 메이지유신이 갖는 의미를 축소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동인도 흑선이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메이지유신으로 갔을 것이고, 설령 메이지유신이 없었더라도 일본의 근대화는 이뤄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식의 주장이다. 19세기 들어 막부가 가진 한계와 모순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자각이 사숙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상태이기 때문에 막부 타파와 일본 근대화는 이미 시동이 걸린 상태라는 것이다. 메이지유신이 아니라 데키주쿠와 쇼카손주쿠와 같은 사숙에서의 풀뿌리 계몽운동이 일본 변혁과 근대화의 동인(動因)이라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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