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일 금요일

엘리자베스 즉위 60년… 다시 보는 빅토리아시대

격변의 시대 이겨낸 절제·자조·체면 경제 위기의 시대 다시 주목받다

▲ 1837년 즉위해 63년 동안 영국을 통치한 빅토리아 여왕.
 

19세기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은 빅토리아시대다.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은 18살이던 1837년에 삼촌인 윌리엄 4세의 뒤를 이어 즉위, 1901년까지 약 63년 동안 영국을 통치했다. 영국 역사를 통틀어 최장 기간일 뿐 아니라 여왕으로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긴 기록이다. 그녀는 즉위 60주년 기념식을 치른 유일한 영국 군주이기도 하다. 1952년에 즉위한 현재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1926년 출생)만이 올해로 즉위 60주년을 갓 넘겼으며, 2012년 6월 2일부터 5일 사이에 즉위 60주년 기념식이 계획되어 있다. 엘리자베스 2세는 3년 정도만 더 통치하면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록을 넘어선다. 하지만 영국이 세계 최강의 지위에 있을 때 왕좌를 지켰던 빅토리아와,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결을 지켜보며 조용히 뒷걸음질을 시작할 때 즉위한 엘리자베스 2세의 운명 사이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인도 지배 위해 권위로 무장하다

빅토리아라는 인명이 19세기라는 시기명과 동격의 지위에 오르게 된 데에는 역시 전 세계 육지와 인구의 4분의 1을 통치했던 제국의 역할이 가장 컸다. 여왕이 가장 선호했던 총리 디즈레일리(B. Disraeli)는 1876년에 그녀에게 ‘인도 여제’의 지위를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비록 야당인 자유당이 “허위와 저속으로 가득한 허사”라고 비난했고, 여왕 자신은 한번도 인도를 방문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영제국(British Empire)의 보석’이라 불렸던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영어, 교육제도, 정치제도, 산업화처럼 가시적인 것이어서 쉽게 인지할 수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역으로 영국이 인도로부터 받은 영향도 상당하다. 인도는 초반기엔 영국의 경제에, 후반기엔 안보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는 영국 문학에 끊임없이 모티프를 제공했고 중간계급들에게 인도 고위관리직으로서 출세할 수 있는 길을 터주기도 했다. 지금도 ‘치킨 티카 맛살라’와 같은 인도 음식을 제외한 영국 음식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유럽 북서부의 조그마한 섬나라가 세계화의 선두주자였던 것이다.

빅토리아시대 영국인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표현 중에 ‘뻣뻣한 윗입술(stiff upper lip)’이란 말이 있다. 여간해선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이는 남성일수록 그리고 지배층일수록 더욱 뚜렷이 드러났던 특징인데 인도 지배와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소수의 영국인들이 엄청나게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진 인도인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무력 외에도 권위가 필수였다. 영국 남성은 자신들을 이성에 기초해 철저히 합리적으로 행동하며 정치와 같은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에 적합한 우월한 종(種)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영국 여성은 겸양과 온화함의 미덕을 갖추어 가정과 같은 사적 영역에서의 활동에 적합한 종으로 규정했다. 인도를 비롯한 식민지인들은 이성보다는 육체가 발달하여 자기절제를 하지 못하는 열등한 종으로 치부하면서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교화’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했다. 이러한 논리는 추상적 사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찰스 다윈(1809~1882)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과학’ 담론에 기초한 것이었기에 당시에는 반박하기 쉽지 않았다.


산업화가 낳은 전통의 붕괴

권위와 과학에 바탕을 둔 영국과 식민지와의 우열관계는 영국 본토 안에서의 사회질서에도 반영되었다. 영국은 18세기 말에 이미 세계 최초로 산업국가로 전환했다. 물론 산업화는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고 산업화의 정도도 직종이나 지역별로 격차가 심했다. 기계공업과 수공업이 혼재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고 공장 노동자들이 틈틈이 농촌에 가서 농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흔히 알려져 있듯이 ‘혁명’으로 묘사할 수 있는 현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산업화로 인해 새로운 지배층으로 급성장한 ‘중간계급’의 상당수는 기존 지배계급인 작위 귀족이나 젠트리(gentry·대지주)들과 혈연·지연을 통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귀족 자신들도 제조업에 대한 투자 등을 통해 산업화의 물결에 동참했기 때문에 프랑스와는 달리 급격한 사회변화나 혁명을 피할 수 있었다. 산업화의 진행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사회 계서제가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영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변화의 폭은 상당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천연두 예방접종을 한 최초의 군주였고, 클로로포름을 이용해서 출산의 고통을 줄인 최초의 군주였다. 여왕은 또한 1842년에 최초의 기차 여행을 했고, 윈저에서 캐나다까지 최초의 대륙 간 전보를 보내기도 했는데, 이는 모두 영국의 발명품이었다. 일반 대중들도 곧 이러한 물질적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로 접어들면 영국의 인구가 잉글랜드 지역을 중심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예방접종을 비롯한 의학 발달 덕에 유아사망률이 급락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프로 축구나 럭비 경기에 관중 동원이 가능했던 것은 기차 여행 덕분이었다. 물론 1등석부터 3등석까지의 좌석 구분은 계급에 따라 정해졌다. 아무리 산업화가 더디게 진행되었다 해도, 여기저기 들어서는 공장의 굴뚝들과 육중한 기관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영국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진풍경이었음에 틀림없다.

영국인들이 산업화의 혜택만 누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산업화의 부산물인 각종 사회문제 역시 가장 먼저 체험했다. 하루아침에 맨체스터와 리버풀과 같은 신흥 산업도시들이 생겨나면서 거리는 빈민과 유랑자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어린이들이 면직물 공장으로 동원되었고 이들을 보살펴야 할 여성들도 가정이 아닌 공장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야 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직후인 1819년 8월에는 맨체스터에서 대규모 노동자 폭동이 발생했으나 기마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때맞춰 산업화를 주도한 기업가와 금융업자들은 급상승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신분에 걸맞은 정치 권력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에서 발생했던 시민혁명(바스티유 습격 1789년)으로 인해 가뜩이나 불안해하고 있던 영국의 기득권층은 정치개혁이 필요하다는 위기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1832년 중간계급에 투표권을 부여하면서 시작된 일련의 선거법 개혁은 사회갈등을 의회에서의 논쟁과 입법 활동을 통하여 해결한다는 영국 정치의 전통을 한층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유혈사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농민이나 노동자들의 폭동도 발생했지만,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던 유럽 대륙의 이웃나라들에 비하면 영국에서의 사회갈등은 비교적 차분하고 세련된 방식을 통해 치유되었다.


사회불만을 국가에 대한 자부심으로 녹여

이 무렵부터 영국의 의회정치는 “정치의 핵심은 건강한 사회질서의 유지”라고 주장하는 보수주의 전통과 “평등한 정치 참여는 자연권으로서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주의 전통 사이의 대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전자는 잉글랜드 국교회를 지지하고 대지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던 토리(Tory) 전통을 이어받은 보수당(Conservative Party)의 기본 철학이고, 후자는 장로교나 감리교 등 비(非)국교회 기독교를 지지하고 주로 상공업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던 위그(Whig) 및 급진주의 성향의 지식인들(Radicals)이 연합한 자유당(Liberal Party)의 기본철학으로 계승된다. 정치적 이득과 사회의 안정이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이들은 여러 단계의 복잡한 협상을 거쳐 1860년대와 1880년대에 선거법 개혁을 통해 노동계급 남성의 상당수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정치 참여는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었고 스스로 정당을 만들어 의회에 노동자 대표를 보내기에는 아직 역량이 많이 부족했다. 노동자 대부분은 생계에 매달려야 했고 스스로 생계활동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부를 축적한 계층만 국가에 대한 봉사의 일환으로 의회로 진출해서 무보수로 정치활동을 했다.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영국 군주의 역할은 ‘의회 안의 국왕’으로 축소되면서 의회가 실권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빅토리아시대만 하더라도 왕은 보수당 대표나 총리의 임명에 관여하는 등 막후에서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치 감각이 뛰어난 총리들은 왕실의 권위를 높여줌으로써 자신의 권위도 높이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장례 절차에 왕실의 적절한 참여를 유도해서 왕실의 권위도 회복하고 자신의 지지도도 끌어올렸던 토니 블레어 총리가 좋은 예일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 역시 여왕과 정치인들 사이, 또는 정치인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였다. 또한 산업국가 영국의 위세를 전 세계에 떨친 1851년의 대박람회(Great Exhibition)를 앨버트 공이 직접 기획하고 지휘하는 등 정치에서 왕실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런던 한복판의 하이드파크에 유리를 이용해 임시로 건축한 거대한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열린 대박람회야말로 산업국가로서의 영국의 지위를 국내외에 과시한 중대 사건이었다. 영국의 일반 대중과 유럽 각지의 귀족으로 구성된 관람객들은 당시의 최첨단 발명품이자 영국 제조업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대형 면직기를 비롯해 전신기, 현미경, 공기펌프, 기압계, 의료기기를 보면서 세계 최강 영국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대중의 사회에 대한 불만이 국가에 대한 자부심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져 버리는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처럼 활발히 활동했던 앨버트 공이 1861년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자 빅토리아 여왕은 대중으로부터 자취를 감추고 거의 20년 동안을 상복 차림으로 궁에서 은둔하며 지냈다. 이때 영국인들은 어쩌면 “우린 이제 정말 왕 없이도 아무 문제 없이 잘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기간 동안에 군주제 폐지에 대한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은 영국인의 마음속에 “새로운 조각들을 덧붙일 순 있어도 여간해선 낡은 것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전통과 함께 기존 질서에 대한 경외심과 복종심이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보다는 의회 정치
▲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대박람회 때 박람회장으로 지어진 수정궁의 내·외부 모습.

실제로 영국의 지배계층이 신봉했던 인간 종(種) 사이의 우열관계에 대한 담론은 놀라울 정도로 사회 전반에 걸쳐 뿌리를 내렸다. 찰스 디킨스나 토머스 하디의 소설에도 잘 묘사되어 있듯이 노동계급을 비롯한 하층계급의 상당수는 비록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기계들과 함께 찾아온 산업화, 모두를 잔인한 경쟁의 장으로 몰아넣는 자본주의의 위력 앞에서 험난한 삶을 살아야만 했지만 기존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상에 기초한 새 세상을 여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노동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노동당 역시 노동자 대표를 의회로 진출시키고자 노력하면서 사회주의를 당의 강령에 포함시키긴 했지만,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순회연설에서는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곧바로 청중의 외면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에 사회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등 각종 외래 사상들이 유입된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계급은 이에 냉담했고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혁명보다는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식 개혁에 더 큰 노력을 기울였다. 중간계급 지식인들로 구성된 페이비언주의자들 역시 혁명이 아닌 의회로의 ‘침투’를 통해 그들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달성하고자 했는데 이들의 사회주의는 칼 마르크스보다는 헨리 조지(Henry George)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모든 생산 및 분배 수단의 공유화’, 즉 자본주의의 타파가 아닌 ‘토지 재분배’ 및 ‘엘리트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효율적 국가 경영’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영국의 산업화를 목격한 후 사회주의 이론을 정립한 마르크스였지만 정작 영국인들은 그를 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유방임에 기초를 둔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빅토리아시대의 최대 덕목은 ‘자조(self-help)’와 ‘체면(respectability)’ 같은 것들이었다. 빈곤은 개인의 무능력이나 나태의 탓으로 간주되었고 불운으로 인한 빈곤도 국가가 아닌 공동체나 교회 소속 자선단체들의 단기적 구제활동이면 충분히 극복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영국의 하층계급은 비록 빈곤의 늪에서 허덕일지라도 절제하는 생활 태도와 상층계급에 대한 복종 등을 이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채택했다. 불만이 있으면 제대로 된 의복을 갖춰 입고 질서정연하게 의회로 가서 탄원서를 제출했다. 자신들도 최소한의 교양과 체면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동시에 자신들이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영국 본토의 지배자라는 자부심도 배어 있었다. 불만이 있어도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뻣뻣한 윗입술’을 유지하면서 신사답게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제국의 지배 민족에 걸맞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현세의 삶과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라고 가르치는 복음주의가 대중들 사이에 급속도로 확산된 것도 이러한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어쩌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자본주의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국가기구 및 이데올로기가 노동계급을 철저히 세뇌시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과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자신들의 대표를 의회에 진출시키는 데 결국 성공하고 노동당이 자유당을 밀어내고 양당 체제의 한 축으로 우뚝 서도록 만든 영국 노동계급의 저력을 보면 영국 노동계급의 ‘절제’와 ‘복종’을 세뇌와 같은 일방 작용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굳이 지배계층에서 원인을 찾고자 한다면 산업화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주도해 나갔던 영국의 귀족과 젠트리, 혁명의 기운을 미리 감지하고 적절한 시점에 적당한 수준의 사회개혁을 추진했던 의회의 정치인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균형 잡힌 질서 안에서 유지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준 군주제가 일반 국민들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신뢰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를 도와라!’

20여년간의 칩거를 청산하고 빅토리아 여왕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을 때 대중은 환호했다. 사회적 불만을 굳이 여왕에게 토로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세계 최고의 국민이었다. 1897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식은 식민부 장관의 건의로 영제국 전체의 축제로 진행되었다. 캐나다 등 백인자치령(dominion)으로부터 총리들이 초대되었고, 제국 전체를 대표한 병사들이 런던 시내를 행진했으며, 여왕은 덮개 없는 마차에 앉아서 이들을 맞이했다. 공화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허망한 순간이었겠지만 일반 국민이나 왕실의 입장에서는 영국민, 아니 영제국의 모든 신민의 단결을 확인하는 희열의 순간이었다. 여왕 개인에게도 생애를 마감하기 전 최고의 행사였음이 틀림없다. 실제로 여왕은 즉위 60주년과 같은 해에 자신의 장례식 절차를 미리 마련해 두었다.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은 아들인 에드워드 7세의 애칭인 ‘버티(Bertie)’를 나지막이 부르며 와이트섬(Isle of Wight)의 오스본 저택에서 눈을 감았다. 증손녀인 메리 공주는 “빅토리아 여왕께서 계시지 않은 영국은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합니다. 신이시여, 우리 모두를 도와주소서!”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물론 빅토리아의 사망이 원인은 아니었겠지만 영국은 머지않아 두 차례에 걸쳐 불어닥친 전쟁의 광풍 속에서 세계 최강의 지위를 잃고 평범한 나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영국 경제는 전후의 반짝 호경기가 끝나면서 계속 퇴보하여 1970년대가 되면 이른바 ‘영국병’을 앓고 유럽의 최빈국 중 하나로까지 추락하게 된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었던 영국 경제는 1979년에 집권한 마거릿 대처의 등장과 함께 대전환을 맞이한다. 그녀가 경제를 되살리면서 영국 국민을 항해 외쳐댔던 말은 바로 빅토리아시대의 모토 중 하나인 “스스로를 도와라!(Self-help)”였다. 간혹 ‘대처의 아들들’이라는 비아냥스러운 조롱을 듣는 후임 총리들도 기본적으로 대처의 ‘작지만 강한 정부’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이는 비교적 장기간의 경제 호황으로 이어졌다.

최근 유럽연합의 재정위기가 영국에도 악영향을 끼치면서 정치인들은 빅토리아시대의 덕목들을 다시 강조하기 시작한다. 현재 영국 국민은 이미 복지국가의 혜택을 맛본 후여서 100여년 전의 조상들처럼 자조·체면·절제와 같은 빅토리아식 덕목에 어느 정도 호응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적어도 올해 영국인들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빅토리아시대를 자주 떠올리게 될 것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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