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3일 수요일

천천히 그러나 제대로! 핀란드 학교의 유급 문화



핀란드는 다른 나라보다 초등학교 입학 연령이 늦은 편(만 7세 이상)이며 학교 수업 시간도 적고 재수나 유급도 빈번하다. 심지어 유치원 교사의 권유에 따라 초등학교 입학 때 재수를 하는 어린이도 많다. 초등학교 재수를 하는 이유는 다양한데, 지적 발달이 느린 경우 외에도 집중력 또는 독립심 부족 등의 태도 문제로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울 때, 심지어는 소근육이 덜 발달해서 연필을 제대로 쥐지 못하는 아이들도 재수를 권유받을 수 있다. 핀란드 학부모들에게 인기 있는 한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 가보니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를 재수하라는 권유를 받고 친구들과 함께 초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것에 실망해서 울고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그 밑에는 이런 위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몇 년 전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재수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 아이와 함께 울었지만 지금 그 아이는 벌써 중학생이 됐고 학교에서 적응을 잘하며 우등생이랍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유치원에서 1년을 더 준비했던 것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핀란드 아이들은 이렇게 ‘어렵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도 졸업까지 또 여러 난관을 거쳐야 한다. 핀란드 초등학교는 유급제를 적극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초등학교는 성적이 4~10점제로 산출되는데 학년 말에 한 과목이라도 4점을 받아 낙제를 하면 유급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학부모나 학생들은 이런 유급 결정을 그다지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교사가 유급 결정을 마지막 순간에 폭탄 터뜨리듯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학기 중 여러 번 부모와 만나 아이가 유급당하지 않도록 지도하는 방법을 논의하고 유급 가능성에 대해 미리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성적이 다음 학년으로 진학할 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그때 교사는 최종적으로 유급을 결정하며 학부모와 아이들은 이를 대체로 수긍한다. 유급이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충분히 공감하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 주변에도 유급한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보면 핀란드에서 유급은 그다지 흠이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핀란드의 유명한 정·재계 인사 중에는 학교 다닐 때 유급을 한 번씩 해본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의 그런 ‘경력’ 때문에 그들을 폄하하거나 손가락질하는 핀란드인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일정 수준에 미달되면 재수나 유급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핀란드 초중등학교는 통합 9학년제로 운영된다. 그런데 10학년이라는 좀 특별한 학년도 존재한다. 이 학생들은 중학교를 4년 다니는 셈인데 이는 유급과는 좀 다르다. 원하는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내신 성적을 올리거나 진로 선택(인문계 또는 직업계)을 좀 더 신중하게 하는 등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스스로 중학교를 1년 더 다니는 것이다. 대학교에 진학할 때 여유 시간을 갖고 식견을 넓히기 위해 스스로 ‘안식년’을 선포하는 학생들도 많다. 핀란드 학생들은 왜 답답할 정도로 이렇게 천천히 공부하는 걸까.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핀란드 교육 제도를 전면 개정하여 지금 교육 선진국의 발판을 마련했던 당시 핀란드 국가 교육청장 에르키 아호씨가 TV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학생은 경주마가 아니며 학교는 경주장이 아니다.” 핀란드에서 교육은 누구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하는 달리기 시합이 아니라 스스로 고유의 속도에 맞춰 주위의 경치도 보면서 달릴 수 있는 조깅과 같다. 체력 강화를 목표로 하지만 남과 기록을 비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교육을 받은 핀란드 학생들의 학업 성적이 세계 최고 수준이며 취업 연령 또한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빠른 편이라는 분석이 속속 나오고 있다. 천천히 가도 제대로 된 인재를 키워내는 것이 핀란드 교육의 경쟁력인 것이다.
여성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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