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9일 화요일

"널 믿어"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자녀 교육 실패하는 고학력 부모 많다는데…
부모, 맘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존재 찾아
믿고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감 갖기 어려워
성적 떨어져도 혼내기보다 대안·목표 제시

고학력 부모는 주변에서 종종 '자녀 교육 걱정 없어 좋겠다'는 얘길 듣는다. '학창시절 공부를 잘했으니 아이도 잘 가르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회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이들이 유독 자녀 교육에서 고전하는 이유는 뭘까? 자녀를 자신 못지않게 잘 키워내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두 학부모에게서 '고학력 부모의 자녀 교육 성공 비결'을 엿들었다.
실패사례 #1
고3 자녀를 둔 의사 A씨는 요즘 모임에 나가기가 두렵다. 대입 수시모집이 시작된 이후 번번이 ‘그 집 아이는 어느 대학에 지원했느냐’는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 그는 당연히 자기 아이도 자신과 같은 대학을 나와 의사가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전교 상위권을 유지하던 아이 성적은 고교 입학 후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올해 A씨가 아이에게서 받아든 ‘지원 가능 대학’은 하나같이 이름조차 생소한 곳이었다. A씨 고집으로 서울 소재 대학 몇 군데에 원서를 넣긴 했지만 합격 가능성은 희박한 상태. A씨는 “원서를 낸 대학 이름도 부끄러워 동료에게 말하지 못했다”며 “이마저 떨어지면 재수를 시켜야 하나 고민”이라고 한탄했다.

실패사례 #2
변호사 남편을 둔 전업주부 B씨는 요즘 고2 딸과 매일 전쟁을 치른다. 딸이 공부에서 손을 놔버렸기 때문이다. B씨는 딸을 외교관으로 키우고 싶었다. 명문대 졸업 직후 결혼하는 바람에 못다 이룬 본인의 꿈을 딸이 이뤄주길 바랐다. 둘 사이가 삐걱대기 시작한 건 딸이 외국어고 입시 준비에 나선 중1 때부터. B씨는 입시학원에 가기 싫다는 아이 말을 못 들은 체하고 매일 차에 태워 학원 앞에 내려줬다. 결과는 ‘불합격’. 이후 딸은 공부 자체에 흥미를 잃었다. 성적도 중위권까지 곤두박질쳤다. 딸은 “모든 게 엄마 탓”이라며 엄마와의 대화도 거부하고 있다.
성공사례 #1
임경희씨와 아들 차성우군./이신영 기자 sylee1120@chosun.com
임경희(43) 월드마케팅코리아 대표 겸 미국 샌프란시스코관광청 한국사무소장은 여느 부모에 비해 자식 걱정이 덜한 편이다. 임 대표의 아들 차성우(서울 휘문고 2년)군은 전교 5위권의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엄마와의 사이도 좋다. 임 대표는 차군이 초등생일 때부터 학교나 학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항상 확인했다. “아이가 공부한 내용을 알면 아이의 ‘그릇’이 보여요. 아이 그릇을 가늠하지 못하면 자꾸 아이를 다그치게 되거든요. 반대로 아이 그릇을 알면 부족한 부분을 정확히 파악해 채워줄 수 있어요. 아이 한계가 분명하게 파악되기 때문에 무리한 요구로 스트레스 줄 일도 없죠.”

차군은 “부모님은 성적이 떨어져도 무턱대고 혼내기보다 구체적 대안과 목표를 제시하신다”며 “친구에게도 못 털어놓는 성적 얘길 부모님과는 자유롭게 나누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권에서 일하는 아빠와 마케팅 전문가인 엄마를 보며 자연스레 자신의 목표 대학과 학과(서울대 경영학과)를 정했다. 임 대표는 “부모 영향으로 아이가 편협한 생각을 갖지 않도록 봉사활동으로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게 했다”고 말했다. “아이의 사생활 영역은 침범하지 않으려고 주의해요. 아이가 방에 들어가 있으면 ‘열심히 공부하겠지’라고 굳게 믿죠. 대화를 통해 아이의 학업이나 생활 측면에서 적절한 도움을 주는 ‘러닝메이트’가 되는 게 엄마로서의 제 목표입니다.”

성공사례 #2
김경화(45) 극동방송 PD 역시 성적이 상위권인 고2 아들을 두고 있다. 그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자주 껴안고 등을 토닥이며 “믿는다” “사랑한다” “좋다” “잘한다” 같은 말을 반복해 들려줬다. “아이에게 엄마란 힘들 때 맘 놓고 얘기할 수 있는 존재,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항상 아이 얘길 잘 들어주고 따뜻하게 지지해주려고 노력했죠. 부모가 믿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자신감을 갖기 어렵거든요.”

학업 측면에선 공부 습관과 독서를 강조했다. 아이가 초등 1학년 땐 일이 아무리 바빠도 저녁마다 숙제와 준비물 챙기기를 도우며 ‘혼자 계획 짜서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줬다. “자습 습관이 자리 잡히면 엄마가 잔소리할 일이 줄어 아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게 김 PD의 설명. 그는 “혼자 공부하는 습관을 갖지 못하면 무조건 학원에 의존하게 된다”며 “학원 도움은 아이와 대화하면서 발견한 ‘부족분’에만 전략적으로 적용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김 PD는 자녀 진로 문제에 대해서도 가급적 간섭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주위에서 무심코 건네는 “(법조인인 아버지를 따라) ○○대에 가야지?” 같은 말이 아이를 가장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 “아이에게 ‘제일 중요한 건 너 자신의 행복’이라고 늘 얘기합니다. 인생엔 ‘명문대 진학’ 외길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고학력 부모 위한 전문가 조언│ 목표 낮춰 '작은 성취감'부터 맛보게 하세요
이호분 연세누리소아정신과 원장에 따르면 고학력 학부모가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 대표적 원인은 △완벽주의 △성취 지향적 성격 △공감력 부족 등이다. 이들은 ‘열심히 공부해 성공한’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 자녀에게도 동일한 수준의 성취를 요구한다. “특히 자수성가형 부모는 ‘노력하면 되는 일인데 왜 노력조차 안 하느냐’며 자녀를 다그칩니다. 개인차에 따라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이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강요하는 거죠. 고학력 부모일수록 ‘결과’에 치중할 뿐 그걸 이루기까지의 ‘과정’은 무시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 같은 부모의 행동은 자녀의 자존감을 떨어뜨려 자녀를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든다. 초등생 때까지만 해도 고분고분하던 아이가 중학교 진학 이후 갑자기 공부에서 손을 놓거나 반항하는 경우도 상당수는 부모의 ‘결과 지향적 태도’가 원인이다. 하지만 이 시기 자녀의 변화를 주의 깊게 살피는 부모는 많지 않다. 대개는 ‘사춘기 때 으레 겪는 일’로 여겨 덮었다가 문제를 크게 키운다. 이 원장은 “갑자기 공부를 중단하거나 극심하게 반항하는 건 정상적 사춘기 증세가 아니다”라며 “따라서 자녀에게 이런 모습이 보인다면 그간 자녀와의 관계를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자녀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특히 ‘내 아이니까 나만큼은 하겠지’란 생각은 금물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부모 중 의외로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분이 많습니다. 남의 감정은 물론, 어떨 땐 자기 감정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죠. 그럴 땐 일종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녀가 원하는 게 뭔지 잘 듣고 자녀가 좋아하는 활동을 함께하는 게 그 시작이에요.”

자녀가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 있다면 목표치를 낮춰주는 것도 방법이다. “잘난 부모 밑에서 무기력해진 아이일수록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꾸만 높은 잣대를 들이대면 ‘난 아무리 해도 안 돼’라고 생각하게 되죠. 그럴 땐 목표 자체를 살짝 낮춰 ‘작은 성취감’부터 맛보게 하는 게 효과적입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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