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그의 책을 정말 열심히 봤습니다. 어딜 가나 그 책만큼은 꼭 갖고 다녔으니까요. 금방 너덜너덜해지더군요. 결국 같은 책을 세 번이나 샀습니다. 그랬던 제가 이 상을 받게 되다니….” 그가 기억하는 수상소감은 대략 이랬다. 2006년 12월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 앤디 그로브 상(賞)’을 받는 자리에서였다. 매년 한 명씩 반도체기술 분야의 최고 권위자에게 주어지는 상. 이름처럼 인텔 공동창업자 앤디 그로브(76)의 업적을 기린다는 의미다. 그가 언급한 책은 그로브의 저서인 ‘반도체의 물리와 기술’(1967년)이었다. 》
황창규(59·지식경제부R&D전략기획단장)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대학 3학년생이 이름조차 생소한 반도체에 평생을 걸겠다고 마음먹은 것부터가 그랬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기업들의 스카우트 제의를 마다하고 스탠퍼드대 책임연구원으로 간 것이나, 이후 반도체 시장에서 막 걸음마를 뗀 삼성전자행을 결정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로브의 책은 평생에 걸친 그의 도전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그 도전은 한 경영학자를 만나면서 절정을 향한 질주를 시작했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인 ‘혁신전도사’ 클레이턴 크리스텐슨(60)이었다.
○ 도전자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물리가 좋았다. 의대를 가라는 부모의 권유를 뿌리친 것도 물리의 매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기심 넘치는 전기공학도에게 수업은 뭔가 부족했다. 그래서 도서관에 있는 학술잡지들을 섭렵했다. 교과서는 아직도 진공관의 원리에 머물러 있는데, 해외에선 벌써 2, 3단계 앞선 반도체 관련 기술이 개발되고 있었다. 그로브의 책도 이때 그의 레이더에 포착됐다. 그러나 보고 싶은 해외서적을 쉽게 사볼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가격도 비쌌지만 방법도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광화문의 한 책방에 들른 그에게 복사본 한 권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 꽤 낯익은 제목이었다. ‘피직스 앤드 테크놀….’ 갑자기 둔기로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그토록 구하고 싶었던 바로 그 책, ‘반도체의 물리와 기술’이었다. 그는 단숨에 책을 사서 파고들었다. 반도체의 세계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화려했다. 수학, 물리, 화학, 전자공학, 디자인 등 모든 학문이 작은 칩 하나에 농축돼 있었다. 스물 하나 황창규는 “바로 이거야”라고 했고, 그것으로 그의 인생은 결정나버렸다.
잠자는 시간과 수업시간만 제외하고는 그는 그로브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쳤던 이론이 두 번째엔 심오한 깨달음을 줬다. 세 번째가 달랐고, 네 번째, 다섯 번째는 또 달랐다. 세 번이나 같은 책을 사면서 수십 번을 읽고 또 읽었다. 자연스럽게 대학원에서도 반도체를 전공했다. 해군에서 장교로 복무한 뒤 유학길에 오른 그는 매사추세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 주제는 두말할 것 없이 반도체였다.
황창규가 그의 ‘우상’ 그로브를 직접 만난 것은 1987년에 이르러서였다. 인텔은 스탠퍼드대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던 그를 기술개발팀 자문위원으로 초빙했다. 당시 인텔의 최고경영자(CEO)가 그로브였다. 점심을 먹으러 가다 우연히 마주친 그로브는 식사 후 낯선 한국인 엔지니어를 본인 사무실로 초대했다.
“그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5분, 길어야 10분쯤 됐을까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굉장한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롤모델이자 내가 반도체를 하도록 만든 주인공을 직접 만난 거잖아요.”
물론 그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훗날 인텔의 아성을 위협할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를지를 말이다. 그토록 짧은 만남에도 행복해하던 황창규는 15년 뒤 반도체 역사의 가장 중요한 터닝포인트 중 하나인 ‘황의 법칙’(반도체의 집적도가 1년에 2배씩 성장한다)을 발표한다. 이는 고든 무어 전 인텔 회장(83)이 1965년 주창한 ‘무어의 법칙’(마이크로칩의 성능이 18개월마다 2배씩 성장한다)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 것이었다.
○ 선도자
기업인 황창규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1989년 삼성에 합류한 그는 1994년 세계 최초의 256메가D램 개발 프로젝트를 성공시킴으로써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1999년 메모리사업부장에 오른 뒤에는 삼성전자를 인텔에 이은 세계 반도체업계 2위에 올려놓았다. 이 과정에서 황창규는 기존의 반도체 성장이론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직감한다. PC 중심의 반도체 시장이 휴대전화, 디지털카메라, 게임기 등 모바일기기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2002년 2월 국제반도체회로학술회의(ISSCC)에서 발표한 그의 ‘메모리 신성장론’, 즉 ‘황의 법칙’은 이를 충분히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측’에 불과했다. 삼성전자가 이뤄온 괄목할 만한 성과들이 근거가 됐지만, 그의 선언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많았다. 황창규는 자신만만했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그 믿음의 배경은 바로 크리스텐슨이었다. 1971∼1973년 ‘구창선’이란 이름으로 한국에서 선교활동도 했던 크리스텐슨은 ‘혁신기업의 딜레마’(1997년)로 단박에 ‘경영학 구루’ 반열에 올랐다. 그는 인텔의 CEO 자문역을 맡을 정도로 반도체나 반도체장비산업에 밝은 경영학자였다. 2002년 그는 학술논문 ‘마이크로프로세서 비즈니스의 미래’에서 “현재의 PC는 엄청난 연구개발(R&D) 투자로 향상시킨 중앙처리장치(CPU) 성능의 15%만 쓰고 있다”고 주장했다. 황창규는 무릎을 쳤다. 메모리 신성장론의 핵심은 모바일 시대에는 비싼 CPU보다는 싸고 다양한 기능에 적합한 플래시메모리가 시장을 지배할 것이라는 데 있었다. 크리스텐슨의 경영학적 이론은 ‘황의 법칙’에 날개를 달아줬다.
“모바일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입증된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크리스텐슨의 논문이 제게 큰 자신감을 줬죠. 그의 통찰은 대단히 날카로웠거든요. 지금도 강의를 할 때면 크리스텐슨의 논문을 인용하곤 합니다.”
그가 삼성에 있는 동안 반도체의 집적도는 해마다 2배씩 늘어났다. 무어에게 낸 도전장은 결코 ‘객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세계도 그의 이론을 점차 정설로 받아들였다.
메모리 신성장론을 발표했던 그해 10월 영국 케임브리지대 강연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앨릭 브로어스 총장은 “고든 무어가 일주일 전 여기서 특강을 했다”며 “원래 장소엔 300명쯤이 앉고 뒷문을 개방하면 150명이 더 앉을 수 있는데, 무어가 처음으로 그 문을 열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의 강의에 얼마나 많은 청중이 모일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날 오후. 새로운 반도체 스타는 흥행에서도 흘러간 영웅을 압도했다.
황창규의 ‘반도체 신화’는 2009년 삼성을 떠나면서 일단 멈췄다. 또 다른 스타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고, 삼성은 그 없이도 여전히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그렇다고 ‘황창규의 신화’가 끝난 건 아니다. 어쩌면 그가 어제까지 했던 일보다 오늘부터 해야 할 일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동아일보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