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8월 24일은 스코트 니어링 탄생 130주년이면서 동시에 사망 30주기다. 이 시점에서 스코트 니어링의 삶이 주목받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그가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위선과 탐욕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사청문회 때마다 드러나는 고위 공직자들의 타락, 재벌 3세들의 끝모를 탐욕, 그리고 말만 번드르르한 강남좌파의 위선에 보통 시민들은 신물이 날 대로 났다. 다른 하나는 그가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하는 단순하고 느린 삶을 실천하고 향유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삶이 삭막하면 할수록 귀농을 통해 충만한 삶에 대한 영감을 준 그를 추억하게 된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씨는 2007년 시사주간지에 쓴 글에서 스코트 니어링을 가리켜 “스코트 니어링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숙고로 우리를 이끈다”면서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딱 한 사람은 스코트 니어링과 같은 의인”이라고 썼다. 시인 장석주는 스코트 니어링을 “부유한 가정의 한 남자아이로 태어났지만 20세기 초 산업사회로 이동한 미국 사회에서 하층민의 분배와 평등과 자유에 관심을 가진 진보적 사상의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니어링은 자생적 사회주의자이며 공산주의 활동가였다. 니어링은 스스로를 원리주의자라고 부른다. 니어링은 ‘스코트 니어링 자서전’에서 자신이 왜 자생적 사회주의자가 되었는지를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경제적으로 전혀 부족한 게 없고, 대부분 편의시설과 당시로서는 사치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까지 많이 갖추고 살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학창 시절에 이미 부의 위험을 알게 되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욕망에 따르다가 타락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여 자기 배를 불린다는 사실을.”
스코트 니어링은 석탄산업의 중심지인 펜실베이니아주 티오가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윈필드 니어링은 삼십대 중반이던 1864년 토목기사 자리를 얻어 가족을 이끌고 이곳으로 이사했다. 윈필드는 얼마 후 탄광회사의 채탄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토목기사이면서도 지적 호기심이 강해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다. 뉴욕에서 정기적으로 책을 주문해 읽다 보니 집안이 작은 도서관이 되었다. 이런 집안의 지적 분위기가 니어링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스코트 니어링의 아버지는 사업가이면서 주식중개인을 했는데, 집안이 부유해 가정교사 한 명과 일하는 사람 두 명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어떻게 반자본주의 사회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집안의 풍요로움의 바탕이 되는 광산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부터다. 니어링은 이때부터 많이 갖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1901년 고교를 졸업한 니어링은 펜실베이니아대학 로스쿨에 입학한다. 하지만 기업의 이익만 우선시하는 강의에 실망해 1년 만에 중퇴한다. 니어링은 유펜의 와튼스쿨로 옮겼는데, 여기서 경제학에 완전 매료되고 만다. 와튼스쿨 시절 니어링은 사이먼 패튼 교수를 알게 되어 그에게 깊은 영향을 받는다. 패튼 교수는 혁신가였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의 교육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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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use_caption">▲ 1951년 버몬트주 농장에서 스코트와 헬렌. photo
보리</dd>
1915년 6월, 어느날 아침 그는 학교 측으로부터 조교수직 해임 통보를 받는다. 그는 즉각 반발했고, 패튼 교수도 니어링 편을 들어 학교 측에 항의했다. 그는 여러 매체에 학교 측의 결정이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처사라며 해임 취소를 요구하는 글을 썼다. 이 해임 사건은 곧바로 미국 사회의 이슈로 확산되었고, 그해 가을이 되었을 때 니어링은 미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강연과 집필을 하며 징집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 나갔다.
니어링은 1917년 거처를 뉴욕으로 옮기고 반전조직을 창설해 창립멤버가 되었다. 니어링은 같은해 7월, 사회주의 정당에 입당한다. 그리고 사회주의 정당이 자금을 대는 랜드스쿨의 강사가 된다. 랜드스쿨 강사 자격으로 그는 1년에 200회 이상의 강연을 했고 소책자를 발행했고 책을 썼다. 급기야 그는 연방정부로부터 징집 방해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레닌이 이끄는 정치세력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해 소비에트 정부를 구성했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공산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한 것이다. 이 역사적 대사건을 접하고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은 흥분에 들떴다. 니어링은 1925년 소련을 방문해 2개월간 머물며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1927년 니어링은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3개월간 장제스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과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후 1930년대 초까지 니어링은 미국에서 강연과 저술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여기까지는 그리 특별한 게 아니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적지 않은 수의 자생적 공산주의 운동가가 있었고 스코트 니어링도 그중 한 명이었다. 미국, 영국 등 세계 전역에서 자생적 사회주의자(혹은 공산주의자)를 탄생시킨 계기는 1917년 10월 볼셰비키혁명과 1929년 대공황이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킴 필비, 앤서니 블런트 등 5인의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은 1944년부터 1950년까지 영국 내에서 소련 스파이로 활동했다. 이들은 뉴욕발 대공황이 유럽을 덮치자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변신해 반미세계혁명의 선봉장이 되겠다며 소련 스파이를 자처했다.
니어링이 스물한 살 연하인 헬렌 크노테를 만난 것은 1928년. 니어링은 당시 이미 강연과 저술로 유명한 인물이었고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니어링은 연속되는 강연과 집필로 몸이 쇠약해졌고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을 무렵 버몬트주의 시골에 살고 있는 크노테를 만나게 되었다. 니어링은 마흔다섯, 크노테는 스물넷.
1924년 네덜란드 오멘에서 공부하던 시절 헬렌은 인도에서 유학 온 아홉 살 연상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남자는 헬렌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고백한다. 훗날 남자는 인도로 돌아가 유명한 철학자가 된다. 그의 이름은 크리슈나무르티.
니어링이 크노테를 만났을 무렵 그는 첫부인과 헤어진 상태였다. 함께 살기로 결심한 두 사람은 뉴욕을 떠나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단순한 삶을 살기로 했다. 이들이 선택한 곳은 미국 동부에서 가장 오지에 속하는 버몬트주였다. 1932년은 대공황이 최악의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던 시점. 니어링은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가 회복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판단했고, 시골로 들어가 불황을 타지 않는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하고자 했다.
두 사람은 2200달러에 숲을 사고 2500달러에 농장을 구입한 뒤 시골생활을 시작한다. 버몬트 숲에서 먹을 것을 재배하고 기르는 자급자족 생활을 한다. 두 사람은 원칙을 세웠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적어도 절반 넘게 자급자족한다, 스스로 땀을 흘려 집을 짓고, 땅을 일구어 먹을 것을 장만한다, 돈을 모으지 않는다, 일 년 살기 충분한 만큼 노동을 하고 양식을 모았다면 더 이상 돈 버는 일을 하지 않는다, 가축을 기르지 않으며 고기를 먹지 않는다 등.
아무리 자급자족 생활을 해도 최소한의 돈은 필요하다. 현금은 메이플 시럽과 메이플 설탕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으로 충당했고, 부족한 부분은 니어링의 강연료로 해결했다. 메이플 시럽과 메이플 설탕은 북미대륙 동부 지방에서 겨울철에 주로 생산되는 완벽한 자연식품이다.
두 사람은 이렇게 버몬트 숲속에서 20년을 살았다. 그러나 주변에 스키장이 건설되어 관광지로 바뀌자 1952년 두 사람은 다시 버몬트주를 떠나 메인주로 들어간다. 1954년 두 사람은 공저로 버몬트 숲에서 산 스무 해의 기록을 ‘조화로운 삶(원제 ‘Living the Good Life’)’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순식간에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의 첫장을 펴면 출간된 지 60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까지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는지가 드러난다.
‘많은 이들이 월급에 기대어 먹고살며 도시의 아파트나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식구를 먹여살리는 일뿐 아니라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사람들을 살기 힘들게 한다. 그래서 자기를 옭아매고 있는 이 답답하기 짝이 없는 데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하기를 꿈꾼다. 삶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식구들과 친구들의 걱정 어린 충고와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발길을 가로막는다. 그러기에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많은 세월을 보내고,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
정말로 시골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땅을 일궈서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까? 힘든 농사일을 몸이 감당할 수 있을까?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은 게 아닐까? 시골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누구한테서 배워야 할까? 내가 살 집을 과연 내 손으로 지어 올릴 수 있을까? 집짐승들도 길러야 하지 않을까? 농사일에 얼마나 얽매여 살게 될까? 시골 일은 내 허리를 휘게 만드는 또 다른 중노동이 되지 않을까? 도시 생활과 결별하기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몇백 가지가 넘는 이런 의문들이 머리를 채우기 마련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해 우리 두 사람이 쓴 것이다.…’
만일 대도시의 월급쟁이가 이 대목을 처음 읽었다면 이 책이 1954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에게 하는 말로 들릴 테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숨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대도시 생활을 접고 귀농을 꿈꾸는 이들이 많다. 대도시의 복잡함에서 벗어나 단순함 삶의 방식을 갈망한다. 그러나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극소수다. 누구나 공기 맑은 시골로 가는 게 건강에도 좋다는 것은 다 안다. 니어링이 버몬트의 순깡촌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 데는 건강해지고 싶다는 욕구도 강했다. 니어링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건강을 지킬 뿐 아니라 더 건강해지고 싶었다. 도시생활은 여러 가지로 우리를 조이고 억눌렀다. 건강한 삶의 토대는 단순했다. 땅에 발 붙이고 살고, 먹을거리를 유기농법으로 손수 길러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스무 해 동안 버몬트 숲에서 산 결과는 어떤가. 두 사람은 스무 해 동안 전혀 의사를 만나거나 찾아가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다.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하며 단순하고 느리게 사는 라이프스타일이 두 사람의 건강을 지켜줬다는 얘기다. 스코트 니어링은 성인병 없이 100세까지 살았고, 헬렌 니어링은 91세를 살았다. 채식주의자로 살았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복잡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도시에 일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야 하기에 출퇴근 전쟁을 벌이면서도 도시를 떠나지 못한다. 대부분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번도 의심해본 일이 없다. 또 대부분은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헬렌과 니어링은 돈을 벌지 않겠다고 작정했다.
“우리는 돈을 벌 생각이 없다. 또한 남이 주는 월급을 받거나 무언가를 팔아 이윤을 남기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바람은 필요한 것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손수 생산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일차 목적이다. 한 해를 살기에 충분할 만큼 노동을 하고 양식을 모았다면 그 다음 수확기까지는 돈 버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니어링과 헬렌은 실제로 해마다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여섯 달로 줄이고 나머지 여섯 달은 여가 시간으로 정했다. 부부는 여가 시간에는 연구, 여행, 글쓰기, 대화, 가르치기 등을 하며 보냈다. 연구, 여행, 대화, 가르치기는 궁극적으로 모두 글쓰기로 집약되고 수렴된다.
부부는 생전에 총 63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 중 니어링이 쓴 책은 51권으로 시골생활을 하면서 쓴 게 20권이다. 헬렌이 쓴 책은 4권. 부부 공저로 되어 있는 책이 8권이다. 부부 공저의 책 중에 1950년에 나온 책은 ‘메이플 설탕 책(The Maple Sugar Book)’이다. 두 사람은 이 책을 쓸 만큼 농사의 달인이 되었다. 니어링은 부부 공저를 포함해 모두 59권의 책을 남겼다. 니어링은 전업 작가도 하기 힘든 지적 작업을 농사를 지으면서 해냈다. 그의 저작들을 조금만 훑어보아도 그 연구의 폭과 사색의 깊이에 경탄하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스승으로 가르침을 준 인물로 헨리 조지, 레오 톨스토이, 사이먼 패튼,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꼽았다.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는 소크라테스, 붓다, 간디, 예수, 공자, 헨리 소로, 휘트먼,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위고, 버크 벨라미, 로맹 롤랑 등이다.
보리출판사가 스코트·헬렌 니어링 전문 출판사가 되는 과정도 흥미롭다. 보리출판사는 1988년 출판사를 시작하면서 도시문명의 폐해를 극복하는 길을 찾다가 이석태 변호사가 번역한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원고를 만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니어링 부부 책을 소개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1991년에 부인 헬렌이 쓴 책으로 인해 남편 스코트 니어링이 국내에 알려지게 된 셈이다.
단순한 삶은 다른 말로 바꾸면 느리게 사는 삶이다. 우리가 지금 니어링 부부의 삶을 되새겨 보는 이유는 두 사람이 조화로운 삶, 참으로 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부인 헬렌이 쓴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따르면 스코트 니어링은 여든 살이 되기 전까지 자신에게 노인이라고 부르면 몹시 화를 냈다. 스코트 니어링은 아흔이 넘어서야 자신이 노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헬렌은 “스코트는 90대 중반까지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고 썼다. 스코트 니어링은 92세에 마지막 책 ‘문명과 그 너머’를 출간했다. 스코트는 아흔여섯이 되자 비로소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헬렌은 “그이는 요양소에서 두려움에 떨며 오랜 시간에 걸쳐 죽어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며 이렇게 썼다.
“스코트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가기를 원했고, 의식을 갖고 또 의도한 대로, 죽음을 선택하고 그 과정에 협조하면서 죽음과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그이는 죽음의 경험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기꺼이 그리고 편안하게 몸을 버리는 기술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기대했다. 그동안 어떻게 사는지 배워왔는데 이제 어떻게 죽는지 배우고자 했다.”
니어링 부부의 마지막 여행은 1980년 국제채식주의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도에 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대학 두 곳에서 강연을 했다. 그의 나이 아흔여덟이었다. 스코트 니어링은 1963년 자신의 죽음의 순간에 대한 지침을 작성했고, 1982년에 거기에 이름을 써넣었다. 헬렌은 이 지침대로 장례식 없이 화장을 했고 그 재를 스피릿만(灣)이 보이는 나무 아래 뿌렸다.
‘그이의 타고난 체질, 환경, 식사법, 습관, 감정, 삶의 방식, 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의 건강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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