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7일 목요일

시와 과학…사실, 이론, 존재

인간의 존재방식과 자기완성
느낌에서 시작하여 주제의식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말을 상기한다면, 사물과정은 심리 과정에 일치하고, 심리 과정은 사물의 자체 과정에서 나온다. 모든 물질적 과정의 기초는 사물들에 들어 있는 에너지이다. 이것은 외부와 결합,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하나의 통일성을 향하여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결정(結晶)되는 것이 현실대상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데카르트의 사유의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모든 것의 중심으로 형성되어가는 인간의 심리의 과정이기도 하다. 물심(物心) 일체의 화이트헤드 철학은 도덕, 윤리, 종교에서 완성된다. 그것은 시적 표현 그리고 철학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정당화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주체적 통일을 지향하는 사물의 과정 속에 있다. 이것은 스스로의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방식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자연의 과정이면서 의식을 가진 존재에게는 도덕적 요구가 된다. 즉 의식의 존재인 인간이-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면-자기완성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책임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로 하여금 그 본래적인 지향에 따라 자기완성에 이르게 하여야 한다는 사물 세계에 대한 책임과 의무로 확대된다.

화이트헤드는 창조적 과정으로서의 사물의 느낌과 주체적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인간 그리고 그 도덕적 책무에 연결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느낌들은 주체가 바로 자체이게 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주체는, 선험적으로 말하여, 바로 그 느낌으로 하여 자체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느낌을 통하여 그 자체를 초월하는 창조성을 객관적으로 결정한다. 인간존재의 보다 높은 수준에서는 이 느낌과 주체의 이론은 도덕적 책임의 개념에 의하여 예시될 수 있다. 주체는 그 느낌으로써 자신의 현 재 있는 대로의 모습으로 있게 된데 대하여 책임을 진다. 그리고 여기에 추가하여, 그 것이 자신의 느낌의 결과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로부터 유래하는 결과와 부작용에 대 하여 책임을 지게 된다.”

조금 단순화하여 번역을 해본, 위의 인용도 조금 거꾸로 생각하면, 즉 인간 심리의 측면으로부터 접근하면, 조금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도덕적 책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이 행동은 우리 자신의 사람됨에서 나온다.

다른 데에서 시사되어 있는 것을 보충하면, 여기에서의 사람됨이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여러 습관과 성향-느낌의 향방으로 이루어진다. 긴 형성과정이 어떤 내면적 외면적 행동 경향(disposition)을 조성한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가 되어 사람됨을 형성한다. 성향이 되었든 아니면 일시적인 감정이든, 이러한 느낌은 오늘의 자아의 상태 그리고 그것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실천적 상황에 결정적 요인이 된다.

이러한 도덕적 품성과 형성 과정을 물질에도 옮겨 볼 수 있다. 물질은 그 나름의 느낌-또는 연계 에너지(prehension)를 가지고 있다. 이 느낌들은 주체로서 종합되어 대상적 사물이 된다. 그러면서 그것은 다른 사물들에 연결된다. 이 연결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상황은 물질세계에 숨어 있던 창조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의 사물과 사물의 성질을 초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관계된 사물들의 고유한 성질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새로운 상황--구체적인 현실로 만들어지는 상황의 일부가 된다.

이러한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다. 한정과 진화로서의 변화는 물질적 과정과 심리적 과정에 걸치는 모호한 지대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 느낌 또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연계성향은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사건의 한정화 또는 선택의 필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부정적인 결과를 포함한다.

앞의 인용에 언급된 “부정적 연계 성향 negative prehension”은 이에 관련된 구체적 사물 형성의 한 계기를 가리킨다. 이 부정적 성향은 두 가지로 생각된다. 모든 구체적인 상황은 복합적인 요인으로 이루어지고 상황의 변화 또는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요인들에 의하여 형성되고 그것을 흡수한다.

그런데 하나로 제한되거나 선택되는 것은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하여 발생하는 새로운 현실 (new actuality)은 상황 전체에 부조화를 일으킬 수 있고, 심리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전체적인 상황에 의하여 금지 또는 금기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악(惡)이다. (이것은 사실을 말하기도 하고 심리적 도덕적 관점에서의 판단이기도 하다.)

화이트헤드의 낙관주의 철학에 있어서, 악은 근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전체 상황에 의하여, 즉 거기에 맞아들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정의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맞지 않는 계절에 태어나기를 고집하는 것이 악의 잘못된 소행이다.(Insistence on birth at the wrong season is the trick of evil.)”

그러나 악은 “적극적인 대안적인 기여”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하여 시대의 진전에 따라 그것은 상황을 더 풍부하고 확실하게 또 보다 안정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지속되는 이러한 과정은 결국 모든 것의 일체성 또는 조화를 향한다.

화이트헤드의 생각에 세계는 궁극적으로 모든 대립과 모순을 넘어서 하나의 조화된 전체를 이루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인간의 실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악과 고통과 괴로움을 받아드리고 대처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진선미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이 된다. 화이트헤드는 이 과정을 총괄하는 원리를 신(神)이라고 한다.

반드시 우리의 논의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세계 과정에 대한 화이헤드의 최종적인 설명은 물질 과정이 완전히 심리적인 과정이며 도덕적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한 구절을 조금 긴 대로 인용해본다.

“주체적 목표의 지혜는 [여기의 주체는 현실 사물의 구체화의 중심이면서, 인간의 주체에 비슷한 그러나 그것보다는 우주적 과정의 주체 또는 신의 의지를 가리킨다] 일체의 현실 (actuality)을 그러한 [즉 모든 것이 상호 평형을 이루는] 완전한 체계를 지향 하게 (prehend)하게 하는 것이다. 이 완전한 체계는 현실의 고통, 슬픔, 잘못, 성취, 직접적으 로 다가오는 기쁨을 정당한 느낌으로 엮어 보편적 느낌의 화성(和聲)이 되게 하는 체계 이다. 이 화성은 언제나 직접적이고, 언제나 다성(多聲)적이고 언제나 하나이며,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며 없어지지 않는 새로운 전진에서 온다. 파괴적인 악의 반항은, 그것이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것인 경우, 쓸데없는 지엽이 되고 단순히 개별적인 사실이 되어 버 려지게 되지만, 그것으로 하여 가능하여진 개체적인 기쁨, 슬픔은 필요했던 대조를 보여 주고 또 완성된 전체와의 관련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사라지지는 아니한다. 이러한 신의 자연 운영을 포착할 수 있는 이미지는-이것은 이미지에 불과하지만-어떤 것도 부질없 이 살아지지 않게 하려는 섬세한 조심성이다.”

여기에서 “조심성 care”이란 모든 사물이 우주의 구성과 진화에 참여한다는 사실의 원리를 도덕적 차원으로 옮긴 것이다. 헤겔은, 모순과 그 극복 그리고 보다 큰 종합의 과정으로서 역사 변증법을 말하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는 이성적이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즉 세계 현실을 부정의 연속으로 보면서 동시에 그것을 전체적으로, 있는 그대로 긍정한 것이다.

이에 비슷하게, 화아트헤드의 철학에서도 여러 부정적인 작용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완성된 전체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것을 그대로 긍정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을 심정의 차원으로, 또 도덕적 차원으로 옮기면, 요구되는 태도는 모든 것이 대한 돌봄 내지 사랑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화이헤드는 이것을, “구해 낼 수 있는 것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 부드러움(tenderness)의 판단”, “한없는 인내(infinite patience)”라고 바꾸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것은 본 세계의 총체적인 구체화 과정을 두고 그에 대한 태도를 말한 것인데, 방법론 적으로 우주의 변화 생성 과정을 주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조금 더 초월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이것은 모든 것을 구원하려는 신의 뜻, 신의 사랑에 대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사람의 도덕적 윤리적 책임은 이 우주적 과정에서 연역되어 나온다. 그것은 우주의 물질적 과정이 요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실천적 이성이다.

여기에서의 화이헤드의 철학을 말하는 것은 그것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 글에서의 우리의 관심을-다시 말하건대, 시가 사물의 비유로서 표현하는 바와 같은 주관적인 느낌이 결코 주관에 한정되는 것으로만 말할 수 없다는 추측을 조명하여 주기 때문이다.

되풀이하건대 화이트헤드는 주관적인 심리의 세계와 객관의 사물의 세계가 별도의 것이 아니라는 직관을 정당화해준다. 앞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다마시오가 신경과학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도 비슷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경과학은 심리 작용을 사람의 심리를 신경 조직 내의 생리 작용과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외적 자극으로 환원한다.

그러한 환원이 완전한 것이라면, 외적 자극과 반응은 외부 세계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여 주는 것일까?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 의식 그리고 자유의지와 행동은 어떤 근거를 가진 것인가? 인간의 느낌은 주관적인 환상에 불과한가? 그것은 외부 세계의 진리에 관계가 없는 것인가? 모든 것이 객관적인 요인으로 환원되는 과학의 시대에 있어서 이 문제는 핵심적인 철학의 난제가 된다.

사람의 감각이나 지각 또는 의식이 완전히 세계의 진리에 일치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진리로부터 단절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진리에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깥을 완전히 반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진리의 방법이 이미 인간의 내면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과 밖은 존재의 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완전히 대칭적 반영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럴싸한 아날로지를 들자면, 세계와 사람은 쌍둥이 또는 형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둘 사이의 이해(理解)는 기질을 같이함으로써 매개된다. 또는 그 관계를 조금 더 먼 것으로 생각한다면,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같은 종적 진화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서로 이해할 수 근본을 나누어 가진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위에서 시사하려고 한 것은 물질의 세계에서 오는 자극이 인간의 지각과 심리를 움직여 심리와 의식의 불가해한 현상-지각과 의식 현상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에 이미 물질세계의 인과 법칙이 작용하고 있어서 그 해독(解讀)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세계의 인과 관계는 인간의 내면에서 의미, 목적, 가치, 도덕 등으로 바뀌어 존재한다. 또 거꾸로 심리적 동기는 물질세계의 원리의 통로가 된다. 즉 주관적으로 생각되는 사물에 대한 사람의 지각에는 사물 자체의 작동 원리가 들어 있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결국 인간적 가치의 실현에 일치할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일치를 풀어내는 데에는 물론 복잡한 형이상학적 과학적 해석이 필요하다. 위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그에 대한 시사가 화이트헤드의 고찰에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시에 옮겨 생각해 볼 때, 시의 비유나 이미지는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면서도 사실 세계의 객관성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모든 시적 표현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무렇게나 하는 말이 적절한 의미를 가진 말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언어가 사물 자체의 현실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면, 다른 문제의 하나는 사실 세계의 설명에 기준이 되는 과학의 세계에서의 사실 그리고 그것을 인과관계 또는 논리적 필연성을 통해서 설명하는 과학의 객관적 언어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결국 과학의 사실도 감각과 지각의 여료(與料)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


김우창 전 고려대 영문과 교수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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