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性 키워주는 육아법 확산…항상 까준 귤만 먹은 아이 유치원서 귤 줘도 못까먹고 도움없인 신발 못신던 녀석 홀로 하게 뒀더니 다 하더라
원하지 않으면 주지 않는다…장난감 등 알아서 사줬더니 부모가 뭐든 구해준다 생각 간절함을 모르는 아이가 어떤 사람될까 생각하면 섬뜩
결핍의 대가로 얻는 절제력…절제력 낮은 아이 성인된후…절제력 높은 아이보다…건강 이상 비율 2.7배 높고 저소득층 생활 3.2배 많아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는 김정애(36)씨는 네 살 먹은 아이와 몇 달 전 말로 '계약'을 맺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장난감은 한 달에 한 개만 산다. 단 장난감을 사려면 평소에 장난감을 잘 정리해야 한다.' 마트에 갈 때마다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줬던 그는 아이가 장난감을 내던져 부수는 데 취미를 붙인 것을 보고 결단을 내렸다.
아이가 자라서 제대로 경쟁하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결핍'을 가르치려는 부모가 늘고 있다. 넘치게 베풀어 기른 아이들이 애정 결핍이 아니라 '결핍의 결핍'을 겪으며 점점 나약해지자, 결핍을 억지로라도 경험하게 하자는 움직임이 부모들 사이에서 번지는 것이다. '맘스홀릭' '맘스톡톡' 같은 육아 커뮤니티에선 '아이를 독재자로 키울 순 없어 좌절을 연습시키고 있어요' '아이에게 벼룩시장에 장난감을 내다 팔게 해봤더니 장난감을 더 깨끗이 쓰네요' '새 책 대신 헌책을 사주기로 했어요. 그랬더니 아이가 보물찾기 하듯이 책을 찾아내는 재미에 빠졌어요' 같은 결핍 관련 게시물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제대로 키워라'의 저자인 류랑도 '더퍼포먼스' 대표는 "일하는 부모들은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며 과잉보호로 치달았고 그 결과 많은 아이는 조련사에게 먹이를 받아먹고 자란 동물처럼 수동적이 됐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이에게 물질적 결핍을 경험하게 해 삶에 필요한 '야성(野性)'을 되찾아주려는 부모가 느는 듯하다"고 말했다.
- 출판사에서 일하는 김장환(가운데)씨의 아들 규형(오른쪽)이와 규민이는 휴대전화 없이 지낸다. 김씨는 아이들에게 결핍을 통한 자기 절제를 가르치기 위해‘아이가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요구하지 않는 것은 주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다. 새를 좋아하는 규형이는 사진 속 탐조용 망원경을 받기 위해 6개월 동안 아버지를 납득시켰다. 지난 29일 김씨 부자가 거주지인 서울 마포구 성미산마을에서 망원경을 갖고 노는 모습. / 허영한 기자
김장환씨는 소유를 당연히 여기는 큰아들을 보고 결핍을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첫아이한테 대부분 그렇듯이 저희도 원하는 장난감을 별 생각 없이 사주곤 했어요. 그런데 네 살쯤 되니까 아이가 엄마 아빠는 무엇이든 구해다주는 사람인 줄 알더라고요. 집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모든 욕망이 즉각적으로 실현된다면 아이는 어떤 사람으로 자랄까.' 결론은 동기가 없는 아이, 꿈이 없는 아이였어요. 꿈이란 '간절히 원함'에서 비롯되잖아요. 그런데 간절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된다? 섬뜩하더군요."
'마을 공동체'를 지향하는 서울 마포구 성미산 마을에 사는 김씨 부부의 교육 원칙은 '아이들이 합리적 이유를 들어 요구하지 않는 것은 주지 않는다'이다. 이 원칙은 공부나 여행 같은 비(非)물질적 활동에도 적용된다.
새(鳥) 관찰을 좋아하는 첫째가 망원경을 갖고 싶다고 했을 땐 6개월 '유예 기간'을 두었다. "망원경이 교육적으로 좋은 물건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좋은 물건이라고 다 가질 수 없는 게 세상이잖아요." 김씨는 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지금은 새를 좋아하는 건 알겠어. 그런데 계속 그럴까? 아빠는 아직 확신이 안 서네. 여섯 달이 지나서도 새가 그렇게 좋다면 그때 사줄게. 어때?" 아이는 수긍했다. 새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아이는 생일인 지난 6월 오랜 기다림 끝에 망원경을 받았다. 아이는 요즘도 매일 망원경을 닦는다.
지난달 충북 괴산에 캠핑을 갔을 때 일이다. 김씨 부부는 지난번 캠핑 때 잃어버려 텐트 장비 중에 펙(peg·고정용 못)이 두 개, 폴(pole·받침용 막대기)이 하나 모자란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아이들은 궁리를 하더니 무거운 돌을 구해다 끈을 고정했고 부러진 나무줄기를 가져다 폴 대신 쓰자고 했다.
김씨는 "결핍 교육을 하면서 아이들이 어른들 생각만큼 연약하거나 어리석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얼마 전 서울도서관에서 아이들과 따로 책을 보다가 엇갈린 적이 있어요. 아이들에게 휴대폰이 없으니 우리 부부는 살짝 긴장을 했죠. 그런데 아이들이 금세 엄마한테 전화했더라고요. 안내 데스크를 찾아가서 부탁했대요.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고,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연구를 하고 답을 찾아낸다는 걸 알았습니다."
◇결핍이 자아 탄성력을 기른다
김정애씨 역시 결핍 교육을 하면서 아이의 능력을 더 믿게 됐다고 했다. 처음에 '장난감 규칙'을 들었을 때 아이는 당연히 불쾌해했다. "아이에겐 '한 달'이라는 개념도 없었거든요. 아이가 마트에서 목청 높여 울 땐 제가 너무 가혹한 건 아닌지 초조했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고 설명하며 원칙을 지켰어요. 세 번째 마트에 가던 날 아이는 떼쓰기를 멈췄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수월하게 '처지'를 받아들이더라고요."
유치원 교사이자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의 엄마인 송지영(가명·39)씨는 유치원에서 만난 아이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후 아이에게 결핍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간식으로 귤을 줬는데 못 까먹는 아이들이 있더라고요. 엄마들이 다섯 살이 되도록 귤을 까서 애들 입에 넣어준 거예요. 저렇게 자란 아이, 큰일 나겠다 싶었습니다."
금융회사에 다니다 육아 휴직 중인 민지영(31)씨는 14개월 된 아이가 잠을 안 자고 칭얼댈 때마다 안아주던 습관을 지난 6월 버렸다. 오후 6시 30분쯤 저녁을 먹이고 7시에 씻긴 다음 침대에 누인 후엔 아이가 울어도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았고 매번 안아주지는 않았다. 처음 한 주는 아이도 부모도 힘들었다. 그런데 2주 정도 지나니 아이가 오후 7시쯤 조용히 잠들기 시작했다. "아이도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면 아침에 훨씬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아이도 저희 부부도 훨씬 편해졌지요."
이 세 엄마는 신경정신과에서 말하는 '내버려 두기'를 실천해 성공한 경우다. '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오은영 원장은 "결핍 교육은 무조건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안 되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시키고 지켜봐 주는 것"이라고 했다. "'운다고 사줄 수는 없어.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거든'이라고 설명을 해주고 아이를 지켜봐 주면 아이는 '이건 울어도 안 된다'고 깨닫습니다. 이렇게 '안 되는 것'이 있음을 배운 아이는 자아 탄성력이 생겨 그렇지 못한 아이보다 훨씬 편한 삶을 살게 되지요." 오 원장의 책 '가르치고 싶은 엄마 놀고 싶은 아이'에 따르면 자아 탄성력은 '사람이 어떤 고비나 위기에 처하고 좌절할 때 그런 것이 상처가 되지 않게 자신을 격려하면서 잘 감당해내는 힘'이다.
◇"인생은 원래 다 가질 수 없는 것"… 아이도 알아야
결핍의 결과로 얻게 되는 절제력이 삶에 유용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여러 차례 증명됐다. 대표적 연구가 2011년 1월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된 논문 '어린 시절의 자기 통제력 정도는 건강·부·공공 안전을 예측하게 한다'이다. 미 듀크대 심리학·신경과학과 테리 모피트 교수 연구팀은 뉴질랜드 아이 1000명을 30년 동안 추적해 자기 통제력이 삶의 각 분야에 끼치는 영향력을 연구했다. 연구팀은 열 살이 되기 전 아이들을 자기 통제력 기준으로 5분위로 나눈 후 성인이 된 후의 삶을 조사했다. 그 결과 통제력이 가장 약한 아이들은 성인이 된 후 가장 강한 아이들에 비해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비율이 2.7배 높았고 약물중독과 범죄는 각각 3.3배, 저소득층으로 사는 비율은 3.2배가 높았다. 연구팀은 논문에 "자기 통제력은 타고난 사회적 환경과 지능만큼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환경과 지능을 교육으로 바꾸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 나은 삶을 위해 아이에게 자기 통제력을 적극적으로 길러줄 필요가 있다"고 썼다.
'결핍은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아름다운 유산'이라는 생각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맞벌이 부부는 시간을 충분히 주지 못한다는 미안한 마음에 아이를 감싸고 돌고 과하게 베푼다. 무역 회사에 다니는 이윤주(39)씨는 아이에게 여전히 퍼주고 있는 엄마다. 주말마다 마트에 가서 아이와 쇼핑을 하고 체험 프로그램도 여러 개를 소화한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은 운동회를 하고 나온 듯 몸이 뻐근해요. 아이는 가지 말라고 울지, 몸은 피곤하지…. 이게 정답이 아닌 줄은 알지만 평일에 못 해준 걸 보상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제가 안 돼요. 아이가 애정 결핍에 걸릴까 걱정도 되고요."
'이나미 심리분석연구원' 이나미 원장은 죄책감을 물질로 보상하려는 엄마들에게 "그러다 큰일 난다"고 경고했다. "다 받고 자란 아이는 '나는 빚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런 생각은 '나는 언제나 피해자'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쉬워요. 엄마는 당당해야 해요. 워킹맘이 죄지었나요? 솔직히 자아실현 한다고 일하는 사람 몇이나 돼요? 다 먹고살려고 일하는 거지…. 부모가 자기 욕심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엄마 아빠도 '너'에게 무한정 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좌우명이 '견디자'라는 이 원장의 두 아들은 중학교 때부터 동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어 썼다고 한다. 스물일곱 살인 큰아들은 3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 벤처 사업을 시작했고, 스물네 살인 작은아들은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이다.
"어차피 우리 사회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어릴 때부터 집에 있는 폐품도 고물상에 가져다 팔아보라고 하고, 인터넷으로 물물 교환도 시키세요. 결핍의 체험은 아이가 살아가는 데 큰 선물이 될 겁니다. 요즘 아이들이 '88만원 세대'니 뭐니 하면서 피해자인 것처럼 난리죠? 전 웃긴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이삼십대는 힘들고, 노년은 노년대로 쓸쓸한 게 인생이잖아요. 아이에게 삶의 민얼굴을 냉정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