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6일 월요일

동양고전에 묻다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행복의 특권』을 쓴 긍정심리학자 숀 아처는 “현대사회에서 최대 경쟁력은 행복”이라고 말했다. 행복지수가 높아야 학업이나 업무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잡으려는 행복, 하지만 많은 이에게 행복은 그림의 떡처럼 보인다. 중앙일보와 플라톤아카데미가 함께하는 ‘동양고전에 묻다’의 이번 주제는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다. 번잡했던 올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기대하는 의미에서다.

『격몽요결』이 답하다
일상이 공부다, 공자와 나는 다를 게 없으니…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철학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 시인 고은의 ‘그꽃’ 전문이다.

가위 숨가쁘게 달려왔다. 4W, ‘전쟁(War)’이 끝나고, 돌진적 ‘산업(Wealth)’을 거쳐, ‘분배와 복지(Welfare)’가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그런데 최종적 가치, ‘행복(Well-being)’은 어디 있는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는 한국이 소득수준에 비해 삶의 만족도나 소득, 주거, 건강 등의 행복지수가 영 하위권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위의 네 가지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중용(中庸)의 기술이 이 시대 정치적 리더십의 관건이다.

아니, 마지막 가치를 축으로 삶의 전 영역을 재편하는 혁신이 문명사적으로 요청되는 시절이 아닐까. 에리히 프롬은 산업사회의 이상인 ‘위대한 약속(Great Promise)’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백일몽이라고 말한다. 자유는 환상이고, 우리는 남의 욕망을, 권력과 매스컴의 욕망을 대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원과 환경 문제가 인류의 목덜미를 쥐고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지구)의 생존 자체가, 정신의 근본적인 변화에 의존하고 있다”고 했다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내면의 해방이 필요하다. 그 독특한 성숙의 기술을 인문학이라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인문학을 고대 작가들에 대한 연구로 정의했다. 고전학이 곧 인문학이니, “왜냐하면 고전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고 설파했다.

누구나 ‘삶의 기술(ars vitae)’을 원하지만 그 동안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학문은 대학의 분과 안에서 교환되는 정보로 낙착된 지 오래다. 크론먼은 종합대학이 설립되고 학문이 분화되면서 더 이상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인문적 성찰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한다. (앤서니 크론먼, 『교육의 종말』) 대학이 감당하지 않으니, 대학 밖에서 인문의 열기는 뜨겁고, 강좌가 넘쳐난다.

율곡 이이
율곡(栗谷) 이이(1536~84)가 『격몽요결』 서문에서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인문의 실학(實學)적 지평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 노릇을 하자면 학문(學問)을 해야 한다. 학문이란 무슨 남다른,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 관계와 거래에서, 일을 적절히 처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 뿐이다. 산에서 한 소식을 하거나,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얻자고 하는 일이 아니다. 공부를 안 하면, 마음은 잡초로 뒤덮이고, 세상은 캄캄해진다. 그래서 책을 읽고, 지식을 찾는다. 지식이 길을 밝혀줄 것이니, 오직 그때라야, 정신의 뿌리가 튼튼해지고, 활동이 중(中)을 얻는다.“

여기 학문에 두 가지를 경계해야 한다. 한쪽 스킬라(Scylla·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괴물)는 ‘속학(俗學)’이다. 교과서를 외고, 시험을 치고, 교양의 도구로 쓰는 지식과 그 전파를 가리킨다. 다른 쪽 카리브디스(Charybdis·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자 괴물)는 ‘종교’다. 세속에 염증을 내고, ‘초월’에서 길을 찾는 제반 경향들을 총칭한다.

율곡이 헤쳐 나간 ‘제 3의 길’은 어디로 나 있는가. 한 줄로 요약하면 그곳은, "일상의 한복판에서, 오래된‘자기망각을 치유하고, 성격 개조를 통해 본래 부여받은 자연(自然)을 회복하는 곳에 있다.” (蓋衆人與聖人, 其本性則一也, 雖‘氣質’不能無淸濁粹駁之異, 而苟能眞知實踐, 去其舊染而復其性初, 則不增毫末而萬善具足矣)

이 길은 오직 인문을 통해 성자(聖人)를 기약한다. 그래서 왈 성학(聖學’이라 한다. “저 너머의 신에 기대지 말고 자신 속의 힘과 권능을 믿으라!” 사람들은 기겁을 할지 모른다. 율곡은 그러나, “요순(堯舜)이나 공자(孔子)가 하등 나와 다를 바 없다”며 제발 자포자기 하지 말라고 다그친다. 여기 관건은 입지(立志), 즉 실존적 결단이다.

『격몽요결』은 그 인간의 도정을 위한 기초, 혹은 첫걸음을 담고 있다. 여기 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의 주저 『성학집요(聖學輯要)』에 도전해 보기를 권한다. 잊지 말자. 위로는 치유가 아니고, 행복으로 이끄는 길은 쾌락이 아니라, 덕성이라는 것을….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철학

◆격몽요결(擊蒙要訣)=1577년 율곡 이이가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쓴 책. 학문생활과 일상의 윤리 등을 가르치는 일종의 초등 교과서다. 입지(立志)·독서(讀書)·사친(事親)·상제(喪制)·제례(祭禮)·처세(處世) 등 10장으로 구성됐다. 저술 직후부터 널리 유포됐으며 인조 때는 전국 향교에서 교재로 썼다.

『중용』이 답하다
하늘마음으로 살면 내가 하늘 되고, 천국 되고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유학동양학부
우리의 일생을 조용히 돌아보자. 행복했던 때가 있었던가. 아마도 다섯 살 전후의 어린 시절이 아니었을까. 그때는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가 있었다. 과자가 먹고 싶으면, “엄마, 과자 사줘”라고 했다. 이 한마디면 소원이 이뤄졌다. 엄마는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전지전능한 하늘이었다. 엄마 잃은 어린이에게 가장 급한 게 엄마를 되찾는 것이듯, 요즘 사람들에게 급한 것은 하늘을 되찾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막연하다.

멀리 있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내가 그에게 가도 되지만, 그 사람을 나에게 오게 하면 된다. 하늘을 찾는 방법도 이와 같다. 내가 하늘로 가도 되지만, 하늘을 나에게 오게 하면 된다.

『중용』을 읽는 것은 그런 행복이다. 『중용』은 하늘을 내 안에서 찾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 누가 말했던가. 가장 불행한 이는 죽을 때까지 『중용』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도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도둑이고, 천사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천사이듯, 하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늘이다. 내가 하늘의 마음으로 살기만 하면, 내가 하늘처럼 된다. 내가 하늘이 되면 그곳이 천국이다.

『중용』은 말한다.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이라 한다.(天命之謂性)’ 하늘의 마음은 나와 동떨어진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마음속에서 작동한다.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하늘의 마음, 그것을 성(性)이라 한다. 천국을 하늘 위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성을 찾아 그 성대로만 살면 된다.

사람의 마음은 마음 보따리 속에 들어있다. 마음 보따리 속에 들어있는 마음을 우리는 특히 감정이라 한다. 감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중용』에서는 대표로 희로애락이라 했다. 희로애락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온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이 성이지만, 『중용』에서는 속이라는 뜻에서 중(中)이라 표현했다. 사람의 감정이 나타나기 전의 상태가 중이다.

그 중(中)에서 나타나는 감정이 자기중심적 계산에 의해 왜곡되면 남과 갈등하게 되지만, 똑바로 나오면 주위의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룬다. 그것은 하늘의 마음이고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중은 하늘마음이기에 모든 존재의 공통 마음이다.

『중용』에서는 ‘중이란 천하의 큰 뿌리(中也者 天下之大本)’라고 했다. 큰 뿌리는 하나의 뿌리이다. 모든 존재는 이 뿌리를 바탕으로 해서 존재한다. 이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통한다. 하늘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늘마음이 주도하지만, 탐욕으로 사는 사람은 탐욕이 주도한다. 하늘마음이 주도하면 탐욕이 남아 있어도, 그것은 하늘마음에 끌려가기만 할 뿐 용사(用事)를 하지 못한다.

반대로 탐욕이 주도하면 하늘마음이 남아 있어도 그것이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 다닌다. 이 두 경우는 서로 반대다. 하늘마음이 주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바른 사람이지만, 욕심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잘못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거꾸로 서서 사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거꾸로 서서 살면 머리 위에 있어야 할 하늘이 발 밑에 있고, 발 밑에 있어야 할 땅이 머리 위에 있다. 천지가 뒤바뀐 것이다. 그리고 만물이 모두 거꾸로 자라고 있다. 천지가 거꾸로 되어 있고, 만물이 거꾸로 자라는 곳, 바로 지옥이다.

이에 비해 하늘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바로 서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머리 위에 있어야 할 하늘이 머리 위에 있고, 발 밑에 있어야 할 땅이 발 밑에 있다. 그리고 만물이 모두 제대로 자란다. 『중용』에서는 이를 ‘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이라 했다. 속에 있는 뿌리를 찾아 조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 자리에 있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는 뜻이다.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 곳이 천국이다. 하늘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지금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란 거꾸로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서는 것이고, 지옥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중용』은 그 길을 제시한다.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유학동양학부

◆중용(中庸)=유교 경전. 본래 『대학』과 함께 『예기』 속의 한편이었다. 송나라 시대의 주자가 『대학』과 『중용』을 『예기』에서 완전히 분리해 단행본으로 독립시켰다. 이후 『대학』『논어』『맹자』와 함께 사서로 꼽히며 유학의 중요한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대학』이 정치적인 특색이 강한 반면 『중용』은 철학적 내용이 주를 이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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