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6일 월요일

관수유술 필관기란(觀水有術 必觀其瀾) 바위에 엎드려 물을 보는 선비… 쉼없는 수행을 말씀하시는군요!


▲ 조선시대 학자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 명나라 ‘고운공편심’

# 무슨 생각 하시나요?

선비 한 분이 바위에 엎드려 턱을 괴고 계시다. 배부른 큰 거북이 물가에 올라앉아 시간을 무시하는 양 편안하고 조용하게 거하시는 그 모습을 보노라면 보는 이의 마음도 누그러지고 어느덧 차분해진다. 그런데 궁금하다. 선비는 하염없이 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그림 속 선비에게 다가가서 물어볼까. “저 옛날 송(宋)나라의 소동파(蘇東坡)가 적벽에서 노래하듯, 흘러도 다 흐르지 않는 물을 보라 하시며 우리의 생명도 저 물처럼 순간이 영원하다며 위로하고 계신가요? 혹은 동서고금 그러하듯 흘러간 과거를 바라보고 계신가요? 선비님은 아실 턱이 없겠으나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미국영화가 있지요. 그 주인공 교수님이 세상에서 사라져간 동생과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그들과 함께했던, 수면 위로 반짝이는 추억을 바라보았듯이, 지난 시절 그 누구를 떠올리고 계시나요? 그런 것도 아니라면 무아지경이라던가요. 지난 세월도 다가올 걱정도 모두 떨치고 초월의 즐거움을 누리고 계시나요?”

# ‘물을 보다’ 이미지에 코드가 숨어있다.

이 그림 속 선비가 물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단순한 궁금증은 곧 ‘우리 선조들이 이 그림을 펼쳐 놓고 무엇을 감상하였을까?’라는 질문과 다름없다. 이러한 질문은 옛 그림을 이해하는 기본적 의문이며 감상태도이다. 산수화 속에 그려진 조그만 인물의 모습에는 선조들이 공유했던 생각과 감상이 응축되어 담겨있다. 근대기 이전의 옛 그림에서 화가의 개인적 체험이나 특별한 생각을 찾아내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시절 그림에는 그림을 향유하던 계급에서 공유하던 생각의 코드가 약속처럼 전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약속의 코드는 대개 그들이 섬기었던 성현의 말씀이거나 아끼며 암송하던 명시의 시구였다. ‘자왈(子曰·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로 시작되는 경전의 어록은 거듭 읽고 탐구하여 그 뜻을 바로 새겨야 했다. 성현의 말씀을 암송하고 행간의 뜻을 터득하는 것이 그 시절의 ‘공부(工夫)’였으며, 이 공부로 단련된 이후에야 관료로 출세하여 세상을 다스릴 수 있었다.

이 그림 속 선비가 취하고 있는 모습 ‘물을 보다’의 행위는 맹자(孟子)의 말씀에 등장하는 ‘관수(觀水)’를 떠오르게 하였다. ‘물’의 성질을 배우라는 말이야, 맹자뿐 아니라 공자도 그리하였고 노자와 장자도 그리하였다. 저 물을 보라 하신 공자의 말이나, 낮은 데로 흐르는 덕을 가르친 ‘노자’의 구절이 모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의 글을 두루 보면 ‘맹자’에 전하는 ‘관수’ 즉 ‘물을 보다’라는 이 한 마디가 특별히 애호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을 보다’라고 하면, 고려와 조선의 학자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맹자’의 다음 구절이었다.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나니, 觀水有術

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하느니라. 必觀其瀾

-『맹자』,「진심(盡心) 상(上)」


# ‘관수’와 ‘관란’으로 배우다

물을 봄(‘관수(觀水)’)에 그 여울목을 보라(‘관란(觀瀾)’)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여기서의 여울목이란 물이 구덩이를 만나면서 급히 돌아 흐르며 물결이 일어나는 곳을 말한다. 맹자가 말하는 ‘관수’와 ‘관란’을 이해하려면, ‘맹자’ ‘진심 상’의 문맥을 앞뒤로 보아야 하고, 더하여 ‘맹자’ ‘이루(離婁) 하(下)’의 글도 함께 보아야 한다.

‘진심 상’을 보면, 물이 여울목을 흘러가는 것을 보라 한 뒤 또한 해와 달이 밝은 빛으로 구석구석 빈틈을 비춘다고 하였다. ‘이루 하’를 보면, 물이 근원에서 솟아나와 구덩이를 모두 가득 채우면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서 바다까지 이른다고 하였다.

맹자가 이른 바의 물이란, 근본에서 솟아 나와 흐르다가 여울을 만나면 채우고 가는데 그 흐름에 빠뜨림이 없고 그 채움에 차별이 없으며 바다에 이르기까지 멈춤이 없다는 뜻이다. 학자가 인격을 수행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태도가 이러해야 좋다는 비유의 표현이며, 너그러운 인성으로 성실하고 완벽하게 수양을 실천하라는 엄격한 가르침이다. 물이 이미 그러하니 물을 보며 배우라.

여울목을 보라는 뜻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여울목의 의미는 물결 즉 파란(波瀾)으로 집중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부딪히며 일어나는 물결을 보는 것이 물을 보는 방법이라, 물결 이는 곳을 보아야 물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도 그러하여 그가 환란을 당했을 때를 보고, 집단도 그러하여 그들이 분란에 처했을 때를 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 사람과 그 집단의 본질을 알 수 있다. 물의 본질은 어떠한가. 여울목을 보라. 온몸으로 부딪히며 물결을 일으킨 뒤 평온하고 유유하게 큰 줄기가 되어 너른 바다로 흘러든다.

유학자들이 말하는 ‘보다(觀)’의 행위는, 실상을 보면서 내면을 보는 것이며 드러난 것을 보면서 그 숨은 바를 보는 것이라, 보았으되 그 속의 이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본 것이 아니다. 유학자는 수행을 위하여 세상을 성찰하여야 했다.

# 조선의 학자 강희안이 그렸다

이 그림의 왼편 상단을 보면 흰 글자로 드러나는 백문인장에 ‘인재(仁齋)’라는 두 글자가 큼지막하다. ‘인재’라는 호를 가진 강희안(姜希顔·1417~1464)이 그렸다는 뜻이다.

강희안은 15세기 조선의 이름난 학자였다. 한글창제에 기여한 집현전 관료학자였고, ‘양화소록(養花小錄·꽃을 키우는 방법)’을 지어 화초의 생태까지 자세히 살폈을 만큼 세상의 작은 만물에도 관심을 가지는 섬세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그러한 관심으로 온갖 물상에서 천리(天理·하늘의 이치)를 살피고 제 마음의 성정을 도야한 유학자였다. 그는 또한 그림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그 시절 전문화가로 최고였던 안견(安堅·1447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제작)과 여러 측면에서 맞수가 될 만한 문인화가를 꼽으라면, 강희안뿐이었다.

강희안은 1462년 중국 명(明)나라를 다녀왔고 이후에도 명나라 사신들과 그림을 주고받으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그림들은 안견이 그리던 고전적인 산수화들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는데 그 이유는, 그가 명나라의 새로운 화풍에 익숙하였고 사유적 차원의 주제를 즐겨 택하였기 때문이다.

물을 보는 선비의 모습을 주제로 하는 ‘고사관수도’는, 실로 강희안이라야 그렸음 직한 걸작이다. ‘인재’라는 커다란 인장을 강희안이 직접 찍었느냐 혹은 아니냐의 문제는 학계에서 분분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만, 빛바랜 인장에 묻어나는 세월의 흔적을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강희안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는 조선시대 선조들의 공인(共認)이며 우리 회화사의 개연성이기 때문이다.

# 명나라에도 유사한 이미지가 있었다.

중국 명나라의 회화문화가 폭넓게 반영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 ‘고사관수도’의 인물과 매우 흡사한 인물상이 실려 있다. 이 책은 17세기 중후반에 출간된 판화서적으로 그림 그리는 각종 방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 ‘산수화 속에 그려 넣을 만한 인물상’의 표본을 정리한 파트가 있는데, 그 인물상 가운데 ‘고운공편심(高雲共片心)’이란 표제의 인물이 ‘고사관수도’의 선비와 유사하다.

‘고운공편심’이란 오언(五言)의 시구이다. ‘높이 뜬 구름에 한 조각 마음이 함께 하네’, 즉 내 마음 한 조각이 구름 따라 두둥실 피어오른다는 말이다. 낭만적 운치가 물씬 풍긴다. 이 구절은 당(唐)나라의 명필가 안진경(顔眞卿·709∼785)의 시라 하며 안진경체의 힘찬 필치로 적혀서 명나라에 유전하던 시구였다. 가을 저녁 근심 없으니 높은 구름이 내 마음과 함께 하노라는 내용의 시이다.

명나라에서 안진경 서체가 인기를 누렸고 청(淸)나라에 들어서도 공식글체로 사용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안진경의 이 시구가 청나라에서 판각된 서적에 거듭 수록된 것을 보면, 이 시구의 유행은 명나라의 문화였다고 판단된다. 정황을 미루어 해석하자면, 명나라 사람들은 안진경 서체를 좋아하게 되면서 안진경의 이 시구를 애호하였고, 바위에 엎드린 인물상을 이 시구의 이미지로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바위에 엎드린 인물상은 무엇을 뜻하는 이미지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다시 묻게 된다. 먼저 말하여둘 것은, 동일한 이미지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이다. 바위에 엎드린 인물상도 그런 예이다. 이 인물상의 유래를 거슬러 찾자면 관음보살의 포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명나라에서는 당나라의 시상으로 사용되었고, 조선에서는 맹자의 말씀으로 표현되었다.

# 조선시대 선비들의 ‘고사관수도’

조선의 선비들은 ‘관수’와 ‘관란’의 가르침에 감응하는 시문들을 허다하게 남겼다. 그러나 ‘고운공편심’이란 시구를 애호하였던 흔적은 좀처럼 찾기 어렵고, 조선왕조의 관료선비가 보살의 뜻으로 산수화 속 인물을 감상할 턱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물을 보다’의 이미지로 조선의 선비들이 맹자의 말씀 ‘관수’를 떠올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감상법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견지한 유학적 사유와 원칙에의 열정은 중국학자들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글방이나 누각에 이름 붙이기를 몹시 즐겼는데, ‘관수당’ 혹은 ‘관란정’ 등의 이름이 특별히 애호되었다. 고려시대 이곡, 조선초기 서거정 및 조선말의 문헌에서 두루 만나볼 수 있다. 퇴계선생 이황의 도산서원에는 ‘관수헌’이 있었고, 기대승은 ‘관수헌’을 시로 읊으며 맹자의 교훈에 감복하노라 하였다. 관수헌의 실제 용도는 선비들의 휴게실이었다고 한다. ‘독서’에 비할 때 ‘관수’란 휴식의 자세라, 물처럼 쉼이 없는 수행을 가르친다. 우리 어릴 적 뛰어다니던 교실마다 정직이며 성실이란 단어들이 붙어 있었던 것도 그러한 유풍일까.

‘고사관수도’는 이전에 ‘한일관수도(閑日觀水圖)’란 제목으로 불렸다. 휴식하는 날의 관수이다. 우리 옛 그림 속에는 물을 보는 선비상이 많다. 폭포를 바라보는 ‘관폭(觀瀑)’도 그 중의 하나이다. 물을 ‘관(觀)’하는 그림 속 선비는 은거자가 아니라 고귀한 신분의 현직관료들이다. 세상을 다스리며 유학자적 수행을 잊지 않으려는 뜻이 물을 보는 그림으로 소통된 까닭이다.

유학자의 관점과 열정으로 물을 보고 세상만물을 대하는 태도, 그것은 유학자의 안경으로 세상을 재해석하는 흥미로운 게임이었고 실천이 어려워도 매력적인 배움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유가의 공부를 제아무리 오래 하여도 완벽한 물의 속성을 삶 속에 실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현들이 물을 배우라고 이르고 또 일렀겠는가. 옛 선조들이 ‘관수’와 ‘관란’을 말하고 또 말하고 그림으로까지 그려 보았겠는가.

이 그림 ‘고사관수도’는 우리 선조들에게 인재선생 강희안의 가르침이라 보듬어진 그림이고, ‘관수’의 표현이라 사랑받은 그림이다. ‘고사관수도’에 엎드린 선비의 모습을 다시 바라본다. “아, 그 느긋하신 모습은 공평무사의 인자함과 빠뜨림 없고 쉼이 없는 완벽한 수행법을 가르치고 계셨군요. 자연의 물도 정녕 그렇지 않거늘,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 만무하지요. 그래서 옛 분들의 마음이 붙들렸던 게지요.”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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