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6일 월요일

동양고전에 묻다 새로운 나를 찾아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자기혁신에 매진했던 퇴계(退溪) 이황(1501~70)과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이 2013년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연암 박지원이 답하다
너와 나의 경계 걷어차고 그 ‘사이’를 유영하라


고미숙
고전평론가
1780년 6월 24일, 불혹의 나이를 넘긴 연암(燕巖) 박지원은 생애 처음 중원의 땅에 들어선다. 연암은 타고난 프리랜서다. 노론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났건만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한 채 지성과 우정의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고문(古文)에서 소품체로의 지성사적 대전환이 일어난 것도 이 네트워크에서였다. 마침내 그 내공을 펼칠 때가 도래한 것이다.

 강을 건너면서 그는 묻는다. “그대 길을 아는가?” 그리고 스스로 답한다. “길은 저 강과 언덕 ‘사이’에 있다”고. 사이란 무엇인가. 대상과 주체, 적과 나, 정(靜)과 동(動) 그 양변을 ‘여의는’ 것이다. ‘여읜다 함’은 또 무엇인가. 양변을 가로질러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경계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사이란 중간도 평균도 아니다. 어설픈 조화와 통일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낡은 프레임에 가차없이 균열을 야기하는 것이다. 균열은 차이를 낳고 차이는 곧 생성으로 이어질 것이므로.

 “썩은 흙에서 영지(靈芝)가 생겨나고, 썩은 풀에서 반딧불이 생겨난다.”(『초정집서(楚亭集序』). 이것이 우주적 이치다. 삶과 역사의 현장 또한 다르지 않다. 이항대립에 머무르는 한 차이도 생성도 불가능하다. 당시의 지배이념인 북벌론, 소중화 사상, 고문주의 등이 그랬던 것처럼. 연암은 이것들에 맞서 ‘이념적 전선’을 형성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건 그런 식의 프레임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이’라는 화두는 바로 이런 사유의 산물이다.

 강을 건너 중원 땅을 가로지르며 이 화두는 끊임없이 변주된다. 열흘을 가도 산이 보이지 않는 요동벌판, 그 드넓은 대지 앞에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참 좋은 울음터로구나, 크게 울어볼 만하도다!’ 문명의 거대한 스케일을 천지를 뒤흔드는 통곡소리에 비유한 것이다. 놀랍고도 참신하다. ‘청문명의 장관은 깨진 기와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는 명제는 더더욱 파격적이다. 모두들 만리장성·자금성·요동백탑 같은 스펙터클에 빠져있을 때 그는 그 저변에 작동하는 일상의 흐름을 통찰하고 있다.

 이렇듯 그의 시선과 행보는 늘 느닷없고 엉뚱하다. 심오한가 하면 친숙하고, 원대한가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세밀하다. 여기서 탄생한 미학적 키워드가 바로 유머 혹은 역설이다. 웃음은 일종의 무기이자 전략이다. 통념과 매너리즘에 찌든 기존의 배치에 치명적 균열을 야기할 수 있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결핍된 것이 이 덕목이 아닐지. 지식은 스펙으로, 정치는 구호로 전락해버린 이유도 거기에 있으리라.

 천신만고 끝에 연경(燕京·베이징의 옛 이름)에 도착했건만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동북방의 요새지 열하(熱河)의 피서산장에 가 있었던 것. 열하로 가는 길은 실로 험난했다. ‘무박 나흘의 대장정’! 하지만 연암의 지성은 더욱 예리해졌고, 신체는 한층 유연해졌다.

 열하로 들어서기 직전,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는 절대 절명의 순간을 맞이한다. “내, 이제야 도(道)를 알았도다! 명심(冥心)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잗달아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 말의 재갈을 풀어주고 강물에 떠서 안장 위에 옹송그리고 앉았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러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명심이란 분별망상의 허황한 불빛이 꺼진 ‘평정’의 상태를 의미한다. 물과 땅, 물과 몸, 물과 마음, 외물과 주체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이 그것이다. 그러자 생과 사의 경계도 홀연 사라지고 말았다.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자유고 또 도(道)다. 이젠 그 어떤 타자와도 접속할 수 있고, 그 무엇으로도 변용될 수 있다. 21세기적 언어를 빌리자면, 유목주의가 그것이리라.

 바야흐로 디지털 문명의 도래와 더불어 20세기를 지배한 분할과 경계들은 여지없이 동요하고 있다. 주체와 객체, 자연과 인생, 기계와 인간 등등. 이 ‘썰렁한’ 이항대립을 가로질러 그 ‘사이’를 유영할 수 있는 ‘삶의 기예’가 절실한 시점이다. 그런 점에서 『열하일기』와 21세기의 조우는 이제 막 시작된 셈이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고미숙 국문학 박사(고려대).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역임. 현 감이당 연구원. 저서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윤선도 평전』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등.

퇴계 이황이 답하다
늘 푸르른 청산 … 우리가 되지 못할 이유가 있나


이광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가?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퇴계 이황(1501~70)의 시구다. 퇴계는 늙지 않는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귀한 스승이다. 진리를 알고, 좋아하고, 그리고 즐기는 삶은 진리와 함께 그치지 않는 영원한 삶이다. 퇴계는 어려서부터 진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일깨우며 평생을 정진했다.

 퇴계는 사람의 도리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12세에 숙부 송재공(松齋公) 우(?)에게 『논어』를 배우며 “자제들은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해야 한다. 아들 된 사람의 도리는 이와 같아야 마땅하다”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모든 일의 옳은 것을 이(理)라고 합니까”하고 물음을 던지니 송재공이 기뻐하며 칭찬했다고 한다.

 오늘날 유학은 흔히 도덕과 정치의 학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유학이 말하는 도덕과 정치는 우리 사고의 지평을 크게 넓혀준다. 현대 학문은 모든 것을 나누고 분석하며 이해하는 서구적 자연관과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지만 유학은 자연 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 자연은 인간에게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생명 현상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창조의 근원이다. 자연은 그 자체 진리이며, 우리 삶과 학문의 목적이다.

 퇴계는 유학의 진리에 대해 누구보다 깊고 철저하게 고민했다. 53세에 추만(秋巒) 정지운의 ‘천명도’를 수정·보완하며 유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른 무렵부터 지은 시와 몇 편의 글을 제외한 대부분의 저술은 만년의 작품이다. 전형적인 대기만성의 학자다.

 퇴계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는 진리에 대한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고인이 이미 나의 마음을 얻었음을 생각하니, 후세 사람이라고 어찌 나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근심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가운데 근심이 조화를 타고 다하여 돌아가니 다시 더 무엇을 구하리오.’ (我思古人 實獲我心, 寧知來世 不獲今兮. 憂中有樂 樂中有憂, 乘化歸盡 復何求兮)

 진리는 옛 사람에게서 현재의 자신을 거쳐 후세로 이어진다. 진리 안에서의 삶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만나는 항상 새롭고 즐거운 세계라는 확신을 읽을 수 있다.

 퇴계가 지향한 학문이란 무엇인가. 자기완성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군자의 학문은 자기완성을 위한 것일 뿐이다. 자기완성을 위한다는 것은 장경부(송나라 철학자. 이름은 식·?, 호는 남헌)가 말한 위하는 바가 없이 그러한 것이다. 예컨대 깊은 산 무성한 숲 속의 난초는 종일 향기를 피우면서도 자신이 향기롭다는 것도 모른다. 이러한 삶이 바로 군자의 자기완성의 뜻에 맞다.”

 깊은 산 속에 사는 난초는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향기를 피운다. 남이 모르는 것은 물론 자신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본성을 실현한다. 퇴계는 모든 생명이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을 삶의 이상으로 이해했다. 인간으로서의 이상적 삶을 실현한 성인의 경지 역시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온전하게 실현하는 삶으로 이해한다.

 퇴계가 만년에 선조에게 바친 『성학십도(聖學十圖)』는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이 어떠한 것인가를 밝힌 책이다. 성인이 되려는 공부는 마음이 삶의 주인이 될 때에만 가능하며, 마음을 삶의 주인으로 삶기 위한 자세가 경(敬)이므로 이 책은 경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제8도 ‘심학도’에서는 경의 방법을 설명하고, 제9도 ‘경재잠도’와 제10도 ‘숙흥야매잠도’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간의 삶의 영역 전체에 걸쳐 경을 유지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삶의 근본인 마음을 확립하면 마음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밝아(提?此心, 如出日), 훤하게 빛나는 천명을 항상 살필 수 있다(明命爀然, 常目在之)고 말한다. 새벽부터 밤이 늦도록, 고요할 때나 움직일 때나 항상 이와 같은 삶을 이어가니 인격이 날로 새로워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학을 통하여 자연의 외적 지평은 무한하게 확대됐지만 인간의 내면은 허약하고 위태로움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내외의 불균형에서 오는 현대의 위기를 치유하기 위하여 오늘날 치유라는 화두를 개발했다. 성학을 통하여 인간의 내적 지평이 무한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퇴계의 철학은 단순한 치유를 넘어선다. 자연과 인간을 다시 보게 하는 이 시대의 커다란 빛이며 희망이다.

이광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이광호 철학박사(서울대). 한림대 부설 태동고전연구소 한문교육과정(5년) 수료. 태동고전연구소 연구소장· 한림대 부교수·한국동양철학회 회장 역임. 역서 『성학십도』 『격몽요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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