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돌을 쥔 이세돌 9단이 첫수로 우상귀 소목을 선택하자, 구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는 대리인인 구글 딥마인드 엔지니어 아자황(아마추어 6단)을 통해 1분30초 만에 좌상귀 화점에 돌을 놓았다. 알파고는 거의 규칙적으로 시간을 쓰며 반상을 채워 나갔고 마침내 186수 만에 세계 최강인 이 9단을 불계승으로 제압하며 전 세계 바둑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인류의 인공지능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9일 이 9단과 알파고의 바둑 대국에서 알파고는 바둑의 형세를 치밀하게 읽어가면서 중반 이후 ‘승부수’를 던지는 등 인공지능답지 않은 대국을 펼쳤다. 이 9단의 우세가 굳어지던 중반전에서 보통의 바둑기사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과감한 우변 침입에 나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초반 포석단계에서 이 9단의 변칙수에 말려들기도 했지만 중반 이후로 접어들수록 강세를 보였다. 해설을 맡은 김성룡 9단은 대국 초반 “판후이와의 대국 당시 알파고가 판후이와 비슷해 보였다면, 오늘의 알파고는 이세돌의 수준을 어느 정도 따라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으나 알파고의 능력은 ‘따라 하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다.
백돌과 흑돌을 차례로 놓으며 누가 집을 많이 짓느냐로 승부를 가르는 바둑은 경우의 수가 전 우주의 원자 개수 이상으로 무궁무진하다. 바둑판에서 돌을 놓을 수 있는 착점은 19×19=361개다. 이 때문에 똑같은 바둑이 나올 확률은 361×360×359×358…2×1분의 1로 사실상 ‘제로(0)’다. 세력과 ‘두터움’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하고, 단순 수읽기를 넘는 ‘직관력’이 요구되는 등 고도의 두뇌 스포츠인 만큼 인공지능이 인간에 도전하기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인공지능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체스에서 인간을 넘어선 지 9년 만에 바둑에서 인간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컴퓨팅 파워가 향상되고, 빅데이터 산업이 발전하면서 인공지능이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인지, 학습, 추론 등 고차원적 정보처리의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은 알파고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인공지능을 헬스케어 등 범용 기술로 확산하겠다”는 뜻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구글 지주회사인 알파벳의 에릭 슈미트 회장이 “이번 대국의 승자는 인류”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새로운 미래 성장동력이자 인간의 삶에 큰 변화를 몰고올 인공지능에 전 세계의 역량이 집중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진흥센터 자료에 따르면 인공지능 분야에서 자율형 로봇의 경우 시장 규모가 2019년 35억8200만달러, 2024년 139억2700만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지능 분야에서 앞서나가는 그룹은 IBM, 구글, 애플, 바이두 등 글로벌 기업들이다. 인공지능 컴퓨터의 선구자 역할을 해온 IBM은 2011년 인공지능 프로그램 ‘왓슨’을 통해 미국 퀴즈쇼에서 인간을 상대로 우승을 거두고, 앞으로 금융·의료 등 영역에까지 적용 분야를 확대할 계획이다.
구글은 검색, 포토, e메일 등 기본적인 서비스에 이미 인공지능 기술을 상당 부분 적용했고, 자율주행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머신러닝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이 앞서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중국의 바이두 역시 경쟁력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한국은 아직 인공지능의 산업 기반이 부족하고, 원천기술에서도 선진국과 격차가 있는 게 사실이다. 미래창조과학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한국의 인공지능 기술은 미국과 비교해 약 2.6년의 격차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정부는 “선진국과 기술격차는 있지만 아직 시장 전반을 지배하는 사업자가 없는 초기 단계로 우리에게도 기회는 열려 있다”며 “단기간에 기술 수준을 높이고 시장 선점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부는 민간 주도의 ‘지능정보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우리나라 지능정보기술 연구의 구심점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계획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설 자리를 점점 빼앗아갈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지만, 어쨌든 앞으로 기술 발전의 방향이 인공지능 중심으로 갈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민옥기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실장은 “앞으로 집중해 기술을 개발해야 할 부문은 딥러닝, 인간의 다양성을 모사하는 다양한 형태의 지능”이라며 “마지막은 5년이나 10년 뒤까지 준비할 수 있는 시스템 소프트웨어 기술 등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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