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2일 화요일

세종 때 관료들의 필독서가 된 수학책

아니 되옵니다

세종 때의 문신 신인손(辛引孫,1384∼1445)은 강직한 사람이다. 그는 아첨을 못하고 직언을 잘했다. ‘아니 되옵니다’는 그의 전매특허이다. 세종17년 (1435)8월 19일의 일이다.

당시 임금이 관리를 임명할 때 50일 이내에 대간(사헌부·사간원)이 임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해당 관리는 취임할 수 없는 인사검증시스템인 ‘서경’이 있었다. 대간들은 비공개로 3번이나 모여 철저히 심사한 뒤 동의여부를 임금에게 보고한다. 위대한 임금 세종조차 이것을 두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세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용되는 사람의 하자(瑕疵)를 신하들이 아래에서 의논하고 있는데도, 임금이 홀로 위에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그러자 도승지 신인손 등은 “아니 되옵니다”를 외친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공개 청문회의 일을 주상께 자세히 보고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대로 발언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세종은 말한다.
“과인이 당사자의 하자 사유를 모두 듣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의논한 사항을 간략하게만 보고해 달라는 것이다.”

“아니 되옵니다.”

또 세종22년(1440)10월 15일에 이런 일도 있었다.

세종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왜인들이 여러 번 고초도(孤草島)에서 물고기를 잡고자 청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이 섬에서 왜인들로 하여금 왕래하며 물고기를 잡게 하되, 그 세금을 국가에 바치게 하면 저들은 모두가 기뻐할 것이요, 그 땅도 잃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병조 참판 신인손 등이 원래 우리의 땅인 대마도의 예를 들어 “아니 되옵니다.”한다.

이런 신인손 대감이 ‘아니 되옵니다’를 말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종이 좋아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수학책을 진상
세종실록 15년(1433)8월 25일의 기사를 보자.

경상도 감사가 새로 인쇄한 송나라의 양휘산법(楊輝算法) 100 건을 진상하므로, 집현전과 호조와 서운관의 습산국에 나누어 하사하였다.
○慶尙道監司進新刊宋《楊輝算法》一百件, 分賜集賢殿、戶曹, 書雲觀習算局。
양휘산법. /문화재청
양휘산법. /문화재청
여기서 경상도 감사는 우리의 신인손 대감이다. 경상도 감사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경상도 원님들의 우두머리이다. 경상감사가 중국수학의 전성기인 남송(南宋)의 양휘(楊輝,1238∼1298)의 수학책 ‘양휘산법’을 구해서 한자 한자 나무에 새긴 다음, 옛날이나 지금이나 값비싼 한지에 찍어 경주에서 서울로 보낸 사실은 보통 일이 아니다. 집현전에 사서삼경이 아닌 수학책이 주어진 사실도 흥미롭다. 당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의 서고에는 수학책이 꽂혀 있었고, 그 곳에서 한번이라도 누군가 수학공부를 했으리라. 밤새 공부하다가 엎드려 잠이 든 성삼문에게 세종이 자신의 용포를 덮어주었을 때, 성삼문이 보고 있었던 책은 ‘수학 책’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나누어준 지금의 기획재정부인 호조는 당연히 수학 책이 필요한 관청이고, 서운관의 습산국은 지금의 기상청과 천문대의 계산을 담당하는 곳이다.

일본, 수학에 눈뜨다

임진왜란 때 신인손 대감의 양휘산법은 다른 문화재처럼 일본에게 약탈되어 일본으로 간다. 일본의 수학은 양휘산법 이전의 ‘수학’ 문맹의 시대와 그 이후의 ‘수학’에 눈을 뜬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일본은 그들의 수학을 ‘화산(和算)’이라 하여 마치 동양의 수학을 대표하는 듯이 이야기한다
.
조선시대 산학자를 뽑는 시험의 텍스트이자 그 이후의 많은 수학서가 자주 인용한 이 책은 2012년에 드디어 보물 1755호로 지정된다. 일본으로 간 신인손 대감의 수학책은 일부가 다시 중국으로 가서 중국에는 이미 멸실된 양휘산법의 맥을 이어준다. 반환이 두려워서 드러내놓고 이 책이 있다고 자랑 못하는 일본은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경우라 할 것이다.

이 양휘산법은 세종이 직접 공부한 계몽산법과 더불어 그 당시의 고급 수학책이다. 특히 이 책은 수학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를 잘 안내하고 있다. 내용면에서도 급수, 수열, 분배, 마방진, 비례, 측량, 고차연립방정식 같은 것들을 담고 있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유명한 고산 윤 선도(尹善道,1587~1671)의 해남에 있는 서재, 녹우당(綠雨堂)에도 이 책의 필사본이 있다. 이 책에 있는 재미있는 문제를 소개한다.

도둑들이 비단을 훔쳤는데, 한 명당 6필씩 나누면 모두 6필이 남고, 한 명당 7필씩 나누면 모두 7필이 모자란다면 도둑들과 비단은 각각 얼마나 되는가?

이 문제에서 옛 사람들의 유머와 여유를 볼 수 있다. 물론 지금 모든 수학시험에서는 도둑을 소재로 문항제작이 불가능하지만.

답은 도둑이 13명이고 비단은 84필이다. 한번 풀어보시라.

청와대에 수학책을
양휘산법 /문화재청
양휘산법 /문화재청
영조와 정조 때의 대학자 황윤석(黃胤錫,1729~1791)은 그의 이재유고(頤齋遺藁)에서 세종이 명을 내려 이 책을 발간했다고 기록했다. 물론 세종 때의 각도의 감사(관찰사)들은 막대한 공과 경비가 드는 책을 간행했던 기록이 있다. 만약 왕명이 없었다면 세종이 좋아할 것을 정확히 알았던 신 인손은 명신(名臣)이리라.

왕명이 있었다 하면, 신인손 대감은 이번에는 ‘아니 되옵니다’라는 말씀을 안하고 동양 삼국의 보물 수학책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분은 이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승승장구 끝에 벼슬이 당상관인 병조판서, 예문관 대제학에 이른다.

33살에 수학을 공부한 왕(세종 12년, 1430년)에게 수학을 공부하면 임금이 ‘성인(聖人)들’처럼 되길 기대하는 신하가 그 3년 뒤 수학책을 바친 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절명할 뻔한 동양수학에 숨통을 불어 넣은 이 책의 간행은 신하의 선물인가? 아니면 임금의 명령인가?

그 어떤 추측을 하더라도 수학책은 청와대로 갔었고, 그 책은 관료들의 필독서였다.

수학이 얼마나 필요한지 아는 임금이나, 그것을 알고 최선을 다해 귀중한 동양수학의 맥을 잇는 책을 선물한 신하나, 훌륭함에 있어 용호상박이다.
바야흐로 조선수학의 황금시대였다.

 프리미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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