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無시험감독 - 無상대평가 - 無출석확인 ‘3無 실험’ 1년
“출석을 불러야만 수업에 나오는 수동적인 학생은 필요 없다. 학점을 잘 받으려고 저학년 수업을 재수강하는 약삭빠른 학생도 도전정신을 강조하는 고려대와 맞지 않는다. 시험은 정답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적는 것이므로 감독도 없애는 것이 맞다.”
염재호 고려대 총장은 올해 4월 초 신입생 대상 강연에서 이렇게 말하며 자신이 추진하는 ‘3무(無) 정책’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지난해 3월 취임한 염 총장은 그해 2학기부터 출석 확인, 시험 감독, 상대평가가 없는 3무 정책을 적극 장려했다. 시험 때 부정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명예 서약’을 하는 학교는 많지만 정책적 차원에서 이 세 가지를 없애겠다고 나선 대학은 고려대가 대표적이다.
고려대의 3무 정책은 학과나 교수가 자율적으로 도입을 결정하기 때문에 현재 전체 수업의 절반 정도에서 시행되고 있다. 실제로 절대평가 비율은 크게 늘었지만 무감독 시험이나 출석 확인 자율화를 하는 곳은 상대적으로 적다.
염 총장의 3무 실험 1년. 그동안 고려대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 학생들, 절대평가에 가장 호의적
시험출제 방향이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시험은 객관식이나 단답형 위주에서 문제 해결, 대안 제시 등 학생들의 생각을 요구하는 질문들이 많아졌다. 이론의 현실 적용이나 논리적 사고방식이 중요한 인문대, 사회대에서는 책을 보며 시험을 치는 ‘오픈북’이나 집에서 과제를 제출하는 ‘테이크홈’의 비중도 늘었다.
권정환 환경생태공학부 교수는 “어차피 인터넷에는 모든 자료가 공개돼 있다. 암기가 아니라 자기가 아는 지식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인재의 역량이다. 대학 학문 추구의 핵심은 자율성인데 그런 취지에 부합하는 게 무감독 시험”이라고 설명했다. 엄주영 씨(21·미디어학과 3학년)는 “무감독 시험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교수님이 우리를 믿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양심적으로 시험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특히 절대평가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상대평가 때는 동료가 곧 경쟁자였기 때문에 견제와 압박도 알게 모르게 느꼈지만 이제는 서로 신뢰하며 같이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최시영 씨(23·경영학과 3학년)는 “친구를 이기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알기 위해 공부하게 됐다. 친구와 편하게 지식을 교환하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일부에서는 “제도 자체에 대해 체감하지 못하겠다”거나 “부정행위를 방조한다”, “서술형 시험 평가 방식이 너무나 모호하다”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도 나왔다. 학교를 몇 번밖에 오지 않는 학생이 꼬박꼬박 출석하는 성실한 친구보다 더 좋은 학점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학생들은 “취지는 공감하지만, 3무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려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학점 기준이나 채점안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세계적 대학에서 3무 정책은 상식
세계적인 대학에서 3무 정책은 이미 보편적이다. 미국 다트머스대에 재학 중인 손모 씨는 “시험 때 감독관은 학생들의 질문에 대비하기 위해 오는 것뿐이다. 교실에는 감독관이 자리를 떠도 학생들이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미국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와 프린스턴대 등에서는 부정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명예서약을 하고 시험을 치른다. 시험감독을 하는 교수나 조교도 없다. 이런 방식이 학생의 자율성을 고취시키고 자발적인 협업을 통해 학문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고려대의 3무 실험에 대해 “한국 대학 교육의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는 의미 있는 시도”라고 평가했다. 그동안 경쟁 지상주의, 무조건적 줄 세우기식 평가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중기 전국교수노동조합 위원장은 “3무 정책 자체만으로 대학을 혁신하기엔 한계가 있지만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을 믿고, 그들이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실험이다”라고 평가했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고려대의 3무 실험은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는 좋은 시도라 생각한다. 다른 대학들도 이런 제도를 많이 채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3무 실험이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세미나 강좌와 토론 문화 등이 자리 잡아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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