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라는 말보단 ‘아빠’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수학’일 줄 알았는데 ‘사랑’이었다. 옥스퍼드대 수학과 김민형 교수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엮어 만든 신간 <아빠의 수학여행>을 들고 한국에 왔다.
서울대 조기졸업 1호, 미국 예일대 전액 장학생, 한국인 최초 옥스퍼드대 정교수, 서울대 수리과학부 초빙 석좌교수. 보기만 해도 화려한 이력의 김민형 교수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수학자로 손꼽힌다. 그는 현대 수학이 안고 있던 고전적인 난제를 풀 수 있는 혁신적인 이론을 제시해 수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연구 성과를 눈여겨본 옥스퍼드대 앤드루 와일드 교수의 추천으로 김 교수는 한국인 최초로 옥스퍼드대 수학과 정교수가 됐다. 재작년에는 한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호암과학상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 그가 올해 초 <아빠의 수학여행>이라는 책을 냈다. 어려운 수학 교육서인 줄 알았는데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엮은 책이었다. 김 교수가 가족과 떨어져 영국과 독일에 머무는 여름 동안 그의 큰아들 오신(당시 15세)군에게 보낸 것들이다. 작은아들에게는 사진엽서를 보내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했다. 편지에는 한국에 있는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세상의 이야기를 담았단다. 인터넷과 전화가 발달한 시대에 손 편지라니 믿기지 않았다. 김 교수는 자신이 유학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편지가 큰 기쁨이던 것을 회상하며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부모님께서는 가족의 이야기나 신문 기사 같은 것을 스크랩해서 보내주셨어요. 제가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지는 않았어요. 비교적 공부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놔두는 분들이죠.”
김 교수가 부모님에게 받은 편지에는 인생과 교육, 철학, 역사 등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김 교수는 오늘날 그의 인문학적 소양에 부모님에게 받은 편지가 큰 자양분이 됐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김민형 교수가 아들에게 쓴 편지도 수학자가 쓴 글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성적인 내용이 많다.
대를 이어 전해진 김민형 교수 가정의 자율 교육
사실 김민형 교수의 아버지는 한국 최고의 인문학자로 손꼽히는 고려대 김우창 명예교수다. 어머니인 설순봉 여사 역시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영문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김민형 교수의 전공이 수학임에도 풍부한 인문학 지식을 갖춘 것은 부모님 두 분의 영향이 컸다.
“중학교 1학년 때 신장염을 앓았어요. 3주간 학교에 갈 수 없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학교를 그만두었죠. 그리고 줄곧 집에 있었는데, 부모님은 그것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김민형 교수는 학교를 그만둔 후 집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레 가족과의 대화 시간이 많아졌고, 홀로 사색할 수 있는 시간도 생겼다. ‘알아서 잘 크겠지’ 하는 부모님의 믿음 덕분이었을까? 김민형 교수는 중·고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패스하고 서울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에는 동기들보다 한 학기 빨리 대학 졸업장을 따내 서울대 1호 조기졸업생이 됐다. 아무래도 뭔가 특별한 공부법이 있었을 것 같다는 기자의 끈질긴 질문에 그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당시만 해도 대학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기준은 비교적 명료했어요. 학력고사 공부만 하면 됐죠. 학원을 따로 다니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수학 과외를 1년간 받았습니다. 부모님 모두 영문학을 공부하신 분들이라 그런지 어려서부터 영어는 곧잘 했던 것 같아요.”
김민형 교수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기대가 오히려 아이에게 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어디 내놔도 교육열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 우리나라 부모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아이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 아이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부모의 자아가 섞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흥미 있는 분야, 재능 있는 분야가 다 달라요. 저희 누나 같은 경우가 그랬죠. 법학 공부를 오랫동안 열심히 해온 분이셨는데, 어느 날 요리가 무척 재미있다며 미국에 레스토랑을 차렸어요. 요즘 누나는 일을 할 때 가장 행복감을 느낀대요. 사람들이 자기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서 보람도 느끼고요.”
김민형 교수는 자신의 자녀들을 교육할 때도 특별히 강제하거나 다그치는 일이 없다고 했다. 아빠가 할 일은 그저 아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라고 한다. 김민형 교수가 그토록 아들에게 편지를 쓴 것도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 소통하지 못하는 간극을 메우기 위함이었다.
아이와 소통하는 첫 단추, 솔직함
김민형 교수는 자식을 키우는 데 필요한 덕목 중 하나가 ‘솔직함’이라고 말한다. 솔직함은 아이들과 소통하는 데 필요한 첫 단계이기도 하다.
“고등학교에 간 큰아들에게 ‘공부하라’는 얘기를 가끔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진지하게 물어봤어요. ‘이제 네가 알아서 할 테니 내가 전혀 참견 안 하는 편이 낫겠니?’ 하고요. 그러면서 덧붙였죠. 감정적인 것을 배제하고 정말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라고요. 그랬더니 ‘아빠에게 공부하라는 소리 듣는 것은 싫지만, 그래도 조금씩 참견해주세요’라고 하더군요. 이런 대화가 성립되려면 정말 진지하게 아이에게 물어야 해요. ‘더 이상 참견 안 하겠다’ 해놓고 또 참견할 게 뻔하다면 그건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이잖아요. 아이와 약속을 했다면, 반드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절되었던 부모 자식 간의 진정한 대화는 하루아침에 회복하기 어렵다. 다만 부모의 솔직함이 반복적으로 아이에게 전해진다면, 거기서부터 아이들은 마음의 문을 연다.
물론 부모에게는 자식에게 강제하고 싶은 것이 있을 수 있다. 몇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서 게임만 하는 중학생 아이가 걱정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당장 컴퓨터를 꺼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를 앉혀놓고 컴퓨터 게임이 얼마나 몸과 정신 건강에 해로운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공부를 하라는 말까지 덧붙인다. 부모의 이런 태도는 아이가 부모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게 만들고, 공부에 대한 흥미까지 떨어뜨린다.
“물론 컴퓨터 게임이 몸에 해롭다는 연구 결과가 있지요. 반대로 컴퓨터 게임이 아이들 두뇌와 사회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원하는 한 방향의 정보만 준다면 그것을 소통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화하고 싶다면 두 가지 정보를 다 주고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 합니다. 부모가 원하는 한쪽의 정보만 주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에게 먼저 솔직해지세요.”
김민형 교수는 자녀 교육에 대한 것을 과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빗대어 설명했다. 사람마다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그 에너지는 다른 형태로 바꿀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가령 인터넷이나 컴퓨터를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컴퓨터를 많이 하는 아이를 하지 못하게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컴퓨터나 인터넷 사용 자체를 막기보다는 좀 더 유용한 쪽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컴퓨터나 인터넷은 훨씬 더 유용한 도구예요.
김민형 교수는 수학은 우리네 인생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수학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이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고민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는 얘기다.
“저는 60년대에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알렉산더 그로텐딕’이라는 수학자를 굉장히 좋아해요. 그는 수학을 두고 ‘밀물 철학’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아주 딱딱한 나무 열매를 열기 위해 망치로 두드려 깰 수도 있지만, 바닷가 적당한 곳에 두면 결국엔 저절로 속이 드러난다는 의미였지요. 자기는 어려운 수학 문제도 그렇게 접근한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것이 꼭 수학 문제를 풀 때뿐 아니라 인생에서 만나는 여러 문제를 풀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학을 즐기면서 인생을 배우다
김 교수는 어려운 문제는 일 년에 한 번씩만 고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수학 문제든 인생 문제든 매일같이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심오한 질문을 잊어버리고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어쩌다 한 번 다시 질문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도가 나가 있는 경우가 많다. 김 교수는 수학을 어렵다고만 생각해 흥미를 잃어버린 아이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했다.
“저는 수학 공부를 음악 연주에 비교해요. 실력 있는 연주가는 감동적인 음악이 나올 때까지 수천, 수만 번 같은 곡을 연습하잖아요. 그런데 연주를 잘하지 못하는 연주가도 연주를 즐겁게 들을 수는 있어요. 수학을 풀 때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비록 잘하지 못하더라도, 세상 속에 숨겨진 수학의 원리를 보며 즐거워하면 그 정도가 딱 적당할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이 수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은 모든 사람을 수학자로 만들 것 같은 분위기다. 그래서 수학을 못하는 아이들은 더 위축되고 흥미를 잃어간다.
“재밌는 건 뭔지 아세요? 웬만한 나라에서 수학을 잘한다는 아이들보다 우리나라에서 수학을 포기했다는 아이들이 수학을 더 잘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만큼 열심히 수학 공부를 시키는 나라예요.”
김 교수의 말처럼 우리나라는 학교에서부터 아이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기로 유명하다. 이에 따른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김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학교에서 공부를 안 시키는 것보단 낫다는 거다. 영국과 미국에선 공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다. 심지어 대학교 강의에서 분수의 덧셈을 어떻게 하는지를 가르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결국 공교육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시킬 것인지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셈이다. 김 교수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어떤 공부를 어떻게 시키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가정에서 보완할 수 있다고 본다.
“아이를 잘 교육한다는 것은 지식과 지혜 모두를 키워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한국의 공교육은 아이들을 호되게 훈련시켜 지식을 채워준다고 봐요. 부모들이 할 일은 이제 아이들의 지혜를 길러주는 일이죠.”
아이에게 지혜를 길러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김민형 교수가 말하는 핵심은 바로 ‘자연 교육’이다. 아이마다 주어진 성향은 모두 다르다. 어떤 아이는 미적 감각이 훌륭할 수 있고, 또 어떤 아이는 수학에 재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학교 교육은 아이들의 다양한 성향을 하나하나 살려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서는 학교가 부족한 부분, 아이의 숨은 진짜 재능을 찾아주는 일이 중요하다.
김 교수는 우리 주변의 ‘자연’ 속에 답이 있다고 말한다. 가령 꽃잎을 보고 미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 안에서 수학적인 구조를 찾을 수도 있고, 또 과학적인 탐구심도 발동할 수 있다. 어떤 아이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물속에 사는 물고기를 보며 그런 지적 호기심이 생길 수도 있다. 아이마다 성향이 다 다르기 때문에 ‘수학 공부를 해라’ ‘국어 공부를 해라’ 하고 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학교에서 수학과 문학, 물리학 등으로 과목을 나누는 것은 편의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 사실은 무척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 화음은 어째서 좋은 소리가 날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음악에 관한 질문, 과학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지고, 또 그것은 수학에 관한 질문으로 옮겨갈 수 있죠. 진짜 지혜는 그렇게 체득하는 겁니다.”
김 교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우리나라 초등 교과서가 작년부터 개편된 것이 떠올랐다. 김 교수의 그런 생각은 바뀐 ‘주제별 통합교과서’의 의도와 일맥상통한다. 한국의 교육 환경을 잘 모르는 그에게 통합교과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재미있는 발상이라며 신기해했다.
“옥스퍼드대 수학과에 박사과정 하는 분들이 열네 명 계셨어요. 그들이 졸업하고 모두 수학자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니에요. 열네 명 중 다섯 명 정도만 학문을 계속하고 나머지는 환경학 연구소, 보험회사, 금융회사 등 다양한 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진로는 다양해요. 그중에서 자신과 가장 잘 맞는 분야를 찾는 것이 관건입니다.”
김 교수는 인문학 강좌가 여러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것처럼 자연과학이나 수학을 주제로 한 문화 강좌를 열고 싶다고 했다. 수학을 세상 밖으로 꺼내 소통하고 싶어 하는 어느 수학자의 간절한 바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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