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5일 금요일

작은 목조 건물서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

'메이지유신의 태동지' 하기(荻)와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이 길러낸 인물들 韓침략 주역으로…
한국근대사 이해 위해서도 주목해야"
조선일보
1850년대 후반 20대의 하급 무사 요시다 쇼인이 메이지유신과 일본 근대화의 주역을 길러낸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오른쪽 건물이 쇼인이 제자들을 가르친 강의실이고, 왼쪽 건물은 학생 숙소다. 일본 국가 지정 사적이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에도 포함됐다. 

1854년 10월 일본 조슈번 출신의 하급 무사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59)이 에도(江戶·현 도쿄)에서 하기(荻)로 끌려와 감옥에 갇혔다. 어려서부터 병학(兵學)을 익힌 그는 견문을 넓히려고 일본 전역을 여러 차례 순회했다. 세계정세와 서양의 앞선 군사 기술에 눈을 뜬 그는 서양을 직접 보기로 결심하고 1854년 3월 요코하마 부근에 정박한 미국 군함에 몰래 올라가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하지만 막부와의 마찰을 염려한 미군이 거절하자 배에서 내려 자수했고 고향으로 이송된 것이었다.

쇼인은 감옥에서 동료 죄수들과 공부 모임을 만들었고, 신병을 이유로 풀려나 자택 연금된 뒤에는 1856년 봄부터 이웃 자제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아오는 학생이 늘어나자 1857년 11월 집 마당에 있는 작은 건물을 수리해 서당을 열었다. '일본 근대화의 산실'로 꼽히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이다.
조선일보
야마구치현 북부 해안 도시 하기의 동쪽에 자리 잡은 쇼인 신사 입구에 서자 왼쪽으로 '메이지유신이 시작된 곳[明治維新胎動之地]'이라는 커다란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1968년 메이지유신 100주년을 맞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일본 총리가 쓴 글씨는 이곳이 일본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말해주었다.

경내로 난 길을 따라가면 왼쪽에 나타나는 작은 목조 건물이 쇼카손주쿠다. 다다미 10조와 8조 넓이의 방 두 개가 붙어 있다. 오른쪽이 강의실이고, 왼쪽은 학생 숙소다. 강의실에 쇼인의 초상화와 좌상이 놓여 있고, 그 사이 대나무 주련에는 서당을 열면서 지었다는 한시가 적혀 있었다. '만권의 책을 읽지 않으면[自非讀萬卷書] 어찌 천추에 남을 사람이 되며[安得爲千秋人]/ 자기 한 몸의 수고로움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면[自非輕一己勞] 어찌 만백성의 편안함에 이를 수 있겠는가[安得致兆民安].' 동북아역사재단 탐방단을 안내하던 자원봉사자 사에키 미요코씨는 "쇼인 선생은 유교 경전과 병학, 세계정세를 가르쳤고 특히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조선일보
왼쪽은 쇼인 신사에 걸려 있는 요시다 쇼인의 공식 초상화. 오른쪽은 쇼카손주쿠의 강의실 내부 모습으로 다다미 8조 넓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숙소에는 쇼인과 제자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상단 중앙에 쇼인이 있고, 그 왼쪽에 '쌍벽(雙璧)', 구사카 겐즈이(1840~ 1864)와 다카스기 신사쿠(1839~1867)가 있다. 재주와 기백이 특히 뛰어나 쇼인의 총애를 받았던 두 사람은 조슈번의 존왕양이파를 이끌고 막부 타도에 앞장서다 20대에 죽었다. 쇼인의 오른쪽에는 '이참의(二參議·메이지 초기 고위직)'기도 다카요시(1833~1877)와 마에바라 잇세이(1834 ~1876)가 있다. 이들은 메이지유신에 공을 세운 후 정국을 주도하다가 40대에 죽었다. 기도는 '유신 삼걸(三傑)' 중 하나로 계속 살았으면 초대 총리가 됐을 인물이다. 아랫줄은 이들의 뒤를 따라가다 대신 이상의 지위에 오른 '오대신(五大臣)'이다. 메이지 중기에 번갈아가며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1841~1909)와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가 있고, 다른 세 명은 법무대신·내무대신·체신대신을 역임했다.

쇼카손주쿠 옆에 쇼인의 본가가 있다. 건물을 돌아가자 연금 상태에서 학생을 가르쳤던 3조 반 넓이의 유수실(幽囚室)이 보였다. 쇼인에게 배운 학생은 모두 92명이었다. 그는 배우려는 열망이 있으면 신분을 따지지 않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20대 스승과 10대 제자들은 추상적인 공론을 배격하고 군사·산업 등 실제적인 학문에 힘썼다. 그의 제자들은 앞서 언급한 쟁쟁한 인물 외에도 상당수가 메이지유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관료·실업인·기술자·법률가로 일본 근대화에 발자취를 남겼다.

쇼인이 제자를 가르친 기간은 2년 반에 불과했다. 전국 각지의 반(反)막부 세력과 연결돼 있던 그는 1858년 12월 막부 고관 암살 사건에 연루돼 에도로 끌려가 이듬해 10월 처형됐다. 그는 하기 동쪽 교외에 자리 잡은 요시다 가족묘원에 잠들어 있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쇼인의 탄생지가 있다. 묘소와 탄생지 사이에는 미국 군함에 타기 전 단호한 표정을 한 쇼인 동상이 하기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인구 5만명의 하기는 도시 전체가 서른 해도 못 살고 세상을 떠난 요시다 쇼인을 기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은 하기박물관뿐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와 기도 다카요시가 살던 집, 구사카 겐즈이와 다카스기 신사쿠가 태어난 곳 등 어디를 가나 쇼인의 짙은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일본인들이 꼭 '선생'이라는 경칭을 붙여 부르는 요시다 쇼인은 한국인들에게는 착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그의 가르침에 정한론(征韓論)의 씨앗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기 감옥 안에서 쓴 '유수록(幽囚錄)'에서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춘 뒤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제후를 봉건하여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키나와와 조선을 정벌하여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타이완과 필리핀 일대의 섬들을 노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양 열강들처럼 이웃 약소국들을 침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우경화를 주도하는 아베 신조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동향 선배인 요시다 쇼인이라는 점도 한국인들의 거부감을 부채질한다. 야마구치현에 지역구를 둔 아베 총리는 두 번째 총리 취임 직후인 2013년 8월 쇼인 신사를 참배했다. 일본이 2015년 7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면서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쇼카손주쿠를 포함시킨 것도 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아베 총리의 좌우명인 '지성(至誠)'은 쇼인이 가장 강조하던 것이다. 쇼카손주쿠 앞에 자리 잡은 쇼인 기념관 이름도 '지성관'이다.

그러나 상대를 이기려면 먼저 알아야 한다. 불편한 대상일수록 냉철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기를 여러 차례 답사한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역사학)는 "요시다 쇼인이 길러낸 인물들이 한국 침략의 주역이 됐기 때문에 한국근대사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도 쇼인과 하기를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