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글에서 과학기술사상 동시발견, 발명의 사례가 매우 많았음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 누가 먼저 발견(발명)했는가를 놓고 치열한 우선권 다툼이 자주 뒤따를 수밖에 없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미적분법을 발견한 뉴턴(Isaac Newton; 1642-1727)과 라이프니츠(Gottflied Wilhelm Liebniz; 1646-1716)가 오랜 기간 동안 지리한 우선권 논쟁을 벌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역시 거의 동시에 전화기를 발명한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과 그레이(Elisha Gray; 1835-1901)가 특허권을 둘러싸고 역사적인 법정 소송을 벌인 일 역시 유명한 사례이다. (다만 벨이나 그레이가 전화기의 최초 발명자는 아니며, 한두 시간 차이의 특허출원으로 특허권이 엇갈렸다는 대중들의 인식 역시 역사적 진실과는 크게 다른데,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이나 저서에서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기로 한다.)
우선권 다툼 중에서도 사회적 지위 등이 크게 다른 사람들이 부딪힌 경우로서 탄광용 안전등과 비행기 발명의 사례가 있는데, 이들 역시 데자뷔라고 할만큼 공통점이 많으므로 주목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안전등과 비행기 – 누가 먼저?
탄광 내에서의 작업은 예나 지금이나 힘들고 위험한 일인데, 전등이 없이 촛불을 썼던 옛날에는 갱내의 가스로 인한 심각한 폭발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19세기초 탄광이 밀집한 영국 북부에서는 ‘탄광사고 예방협회’가 결성되어, 저명한 과학자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에게 탄광사고를 막는 방법을 연구해 달라고 청하였다.
데이비는 안전한 탄광용 등불을 만들기 위해 연구한 결과, 불꽃 심지를 철사그물로 감싸면 불꽃이 그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메탄가스가 흘러 들어가도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데이비는 탄광용 안전등을 발명하였고, 실험을 거친 후 관련 논문을 왕립학회에 발표했다.
그 무렵 영국 북부 광산에서 근무하던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8)도 탄광용 안전등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 역시 불꽃이 가느다란 파이프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안전등을 독자적으로 발명하였다.
데이비와 스티븐슨의 안전등은 거의 같은 시기에 선보이게 되었으므로 치열한 우선권 논쟁이 벌어져서, 왕립학회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데이비는 훗날 왕립학회의 회장까지 맡게 되는 저명한 과학자였던 반면, 스티븐슨은 당시 탄광에 근무하는 가난한 기계공에 불과했으므로 크게 불리한 입장이었다.
결국 조사위원회는 데이비를 안전등의 최초 발명자로 결정하여 탄광주들의 기부금을 모은 2,000파운드의 상금을 그에게 주었고, 스티븐슨에게도 노력한 대가로 100파운드 정도의 돈을 주었다. 이에 스티븐슨의 탄광 동료들이 격분하여, 푼돈을 털어 1,000파운드를 모금한 후 안전등 발명자를 기념하는 시계를 사서 스티븐슨에게 보냈다고 한다.
라이트 형제, 즉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67-1912)와 오빌 라이트 (Orvill Wright; 1871-1948)는 비행기의 발명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마터면 비행기 발명의 우선권을 랭글리(Samuel Pierpont Langley; 1834-1906)에게 빼앗길 뻔한 일이 있었다.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형제의 쌍엽기 플라이어호가 세계 최초의 비행을 성공시키기 직전에, 저명한 과학자였던 랭글리 역시 두 차례에 걸쳐 비행기를 날리려는 실험을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랭글리의 제자들은 ‘비행기 발명의 명예를 자전거포 직공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는 비뚤어진 생각에 비행기 발명의 우선권을 가로채려는 음모를 꾸몄고, 라이트형제는 오랜 시간을 끈 진상규명 노력 끝에 비로소 비행기의 최초 발명자로 공인받을 수 있었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에 당당히 맞선 무명의 기능공
안전등과 비행기의 발명 역시 치열한 우선권 다툼 이외에도 공통점이 상당히 많다. 첫째, 우선권 다툼의 당사자 간에 사회적 지위 등이 크게 차이가 났다는 점이다. 안전등 발명을 놓고 다툰 경쟁자 중에서 데이비는 영국 왕립학회 회장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반면에, 스티븐슨은 당시에 무명의 탄광 기능공이었고 문맹을 간신히 벗어났을 정도로 교육 수준도 낮았다.
비행기 우선권 다툼의 당사자 역시 랭글리는 저명한 물리학, 천문학 교수 출신에 미국의 유명한 과학기관인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협회 회장까지 지낸 반면에, 라이트 형제는 고졸 정도의 학력에 자전거점을 운영하는 기능공이었다.
둘째, 기능공 출신의 발명자가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과학자와 대등하게 경쟁하거나 결국은 우선권 경쟁에서 승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훗날에는 기능공 출신의 발명자가 당시의 저명 과학자보다 훨씬 유명해져서 과학기술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는 점도 동일하다.
안전등의 발명자 중의 한사람인 조지 스티븐슨은 바로 다름 아닌 ‘증기기관차의 아버지’이다. 물론 그가 증기기관차를 발명하고 실용화에 성공한 것은 상당히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험프리 데이비보다는 조지 스티븐슨이 누군지 잘 아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역시 랭글리가 누구인지 생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꽤 있겠지만, 라이트 형제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안전등과 비행기 발명의 데자뷔 역시 우리에게 여러모로 생각할만한 교훈을 남겨 준다. 먼저 어찌 보면, ‘과학’과 ‘기술’의 역사적 뿌리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이라 하여 이 둘을 거의 구분하지 않고 한 단어로 쓰는 경우가 많지만, 과학과 기술이 긴밀히 결합되면서 서로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만든 것은 사실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수준 높은 이론보다도 구체적인 장인적 기술이 때로는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암시한다는 점이다. 높은 수준의 과학교육을 받고 탁월한 이론적 능력을 지닌 과학자들에 의해 중요한 발견, 발명들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정식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사람들이 개인의 기술적, 장인적 재능과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례는 이외에도 적지 않다.
필자 역시 예전에 연구개발 현업에 종사하면서, 대학교육도 받지 못한 분들이 저명대학의 박사학위를 지닌 이들보다도 더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낸 사례를 직접 목격한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물론 숱한 첨단기술과 수준 높은 이론들이 쏟아져 나오는 오늘날 이 같은 데자뷔를 자주 볼 수 있을지 장담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가능성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ScienceTime거의 비슷한 시기에 미적분법을 발견한 뉴턴(Isaac Newton; 1642-1727)과 라이프니츠(Gottflied Wilhelm Liebniz; 1646-1716)가 오랜 기간 동안 지리한 우선권 논쟁을 벌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역시 거의 동시에 전화기를 발명한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과 그레이(Elisha Gray; 1835-1901)가 특허권을 둘러싸고 역사적인 법정 소송을 벌인 일 역시 유명한 사례이다. (다만 벨이나 그레이가 전화기의 최초 발명자는 아니며, 한두 시간 차이의 특허출원으로 특허권이 엇갈렸다는 대중들의 인식 역시 역사적 진실과는 크게 다른데,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이나 저서에서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기로 한다.)
우선권 다툼 중에서도 사회적 지위 등이 크게 다른 사람들이 부딪힌 경우로서 탄광용 안전등과 비행기 발명의 사례가 있는데, 이들 역시 데자뷔라고 할만큼 공통점이 많으므로 주목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안전등과 비행기 – 누가 먼저?
탄광 내에서의 작업은 예나 지금이나 힘들고 위험한 일인데, 전등이 없이 촛불을 썼던 옛날에는 갱내의 가스로 인한 심각한 폭발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19세기초 탄광이 밀집한 영국 북부에서는 ‘탄광사고 예방협회’가 결성되어, 저명한 과학자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에게 탄광사고를 막는 방법을 연구해 달라고 청하였다.
데이비는 안전한 탄광용 등불을 만들기 위해 연구한 결과, 불꽃 심지를 철사그물로 감싸면 불꽃이 그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메탄가스가 흘러 들어가도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데이비는 탄광용 안전등을 발명하였고, 실험을 거친 후 관련 논문을 왕립학회에 발표했다.
그 무렵 영국 북부 광산에서 근무하던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8)도 탄광용 안전등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 역시 불꽃이 가느다란 파이프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안전등을 독자적으로 발명하였다.
데이비와 스티븐슨의 안전등은 거의 같은 시기에 선보이게 되었으므로 치열한 우선권 논쟁이 벌어져서, 왕립학회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데이비는 훗날 왕립학회의 회장까지 맡게 되는 저명한 과학자였던 반면, 스티븐슨은 당시 탄광에 근무하는 가난한 기계공에 불과했으므로 크게 불리한 입장이었다.
결국 조사위원회는 데이비를 안전등의 최초 발명자로 결정하여 탄광주들의 기부금을 모은 2,000파운드의 상금을 그에게 주었고, 스티븐슨에게도 노력한 대가로 100파운드 정도의 돈을 주었다. 이에 스티븐슨의 탄광 동료들이 격분하여, 푼돈을 털어 1,000파운드를 모금한 후 안전등 발명자를 기념하는 시계를 사서 스티븐슨에게 보냈다고 한다.
라이트 형제, 즉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67-1912)와 오빌 라이트 (Orvill Wright; 1871-1948)는 비행기의 발명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마터면 비행기 발명의 우선권을 랭글리(Samuel Pierpont Langley; 1834-1906)에게 빼앗길 뻔한 일이 있었다.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형제의 쌍엽기 플라이어호가 세계 최초의 비행을 성공시키기 직전에, 저명한 과학자였던 랭글리 역시 두 차례에 걸쳐 비행기를 날리려는 실험을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랭글리의 제자들은 ‘비행기 발명의 명예를 자전거포 직공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는 비뚤어진 생각에 비행기 발명의 우선권을 가로채려는 음모를 꾸몄고, 라이트형제는 오랜 시간을 끈 진상규명 노력 끝에 비로소 비행기의 최초 발명자로 공인받을 수 있었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에 당당히 맞선 무명의 기능공
안전등과 비행기의 발명 역시 치열한 우선권 다툼 이외에도 공통점이 상당히 많다. 첫째, 우선권 다툼의 당사자 간에 사회적 지위 등이 크게 차이가 났다는 점이다. 안전등 발명을 놓고 다툰 경쟁자 중에서 데이비는 영국 왕립학회 회장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반면에, 스티븐슨은 당시에 무명의 탄광 기능공이었고 문맹을 간신히 벗어났을 정도로 교육 수준도 낮았다.
비행기 우선권 다툼의 당사자 역시 랭글리는 저명한 물리학, 천문학 교수 출신에 미국의 유명한 과학기관인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협회 회장까지 지낸 반면에, 라이트 형제는 고졸 정도의 학력에 자전거점을 운영하는 기능공이었다.
둘째, 기능공 출신의 발명자가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과학자와 대등하게 경쟁하거나 결국은 우선권 경쟁에서 승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훗날에는 기능공 출신의 발명자가 당시의 저명 과학자보다 훨씬 유명해져서 과학기술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는 점도 동일하다.
안전등의 발명자 중의 한사람인 조지 스티븐슨은 바로 다름 아닌 ‘증기기관차의 아버지’이다. 물론 그가 증기기관차를 발명하고 실용화에 성공한 것은 상당히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험프리 데이비보다는 조지 스티븐슨이 누군지 잘 아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역시 랭글리가 누구인지 생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꽤 있겠지만, 라이트 형제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안전등과 비행기 발명의 데자뷔 역시 우리에게 여러모로 생각할만한 교훈을 남겨 준다. 먼저 어찌 보면, ‘과학’과 ‘기술’의 역사적 뿌리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이라 하여 이 둘을 거의 구분하지 않고 한 단어로 쓰는 경우가 많지만, 과학과 기술이 긴밀히 결합되면서 서로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만든 것은 사실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수준 높은 이론보다도 구체적인 장인적 기술이 때로는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암시한다는 점이다. 높은 수준의 과학교육을 받고 탁월한 이론적 능력을 지닌 과학자들에 의해 중요한 발견, 발명들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정식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사람들이 개인의 기술적, 장인적 재능과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례는 이외에도 적지 않다.
필자 역시 예전에 연구개발 현업에 종사하면서, 대학교육도 받지 못한 분들이 저명대학의 박사학위를 지닌 이들보다도 더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낸 사례를 직접 목격한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물론 숱한 첨단기술과 수준 높은 이론들이 쏟아져 나오는 오늘날 이 같은 데자뷔를 자주 볼 수 있을지 장담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가능성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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