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9일 일요일

로보 사피엔스’가 온다

사피엔스’(sapiens)라는 말은 ‘지혜로운’이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다. 그렇다면 ‘로보 사피엔스’는 인간처럼 지혜로운 로봇을 의미한다. 이 말은 미국의 TV 뉴스 연출자인 페이스 달루이시오(Faith D’aluisio)와 사진 작가인 피터 멘젤(Peter Menzel)이 2000년에 쓴 책인 『새로운 종의 진화, 로보사피엔스』에서 처음 쓰였는데, 진화론적 시각에서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 로보 사피엔스는 요즘 시절에 보면 바로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로봇이다. 이것이 과연 진화론적 차원에서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을 대체할 것인지는 지금의 과학 영역에선 언급하기 매우 어렵지만, 적어도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인격성을 지닌 로봇이 멀지 않은 미래에 등장하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과 유사한 인격성을 지닌 로봇이 등장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필수적이다. 우선 인간의 지능에 준하거나 능가하는 인공지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는 주로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이성적인 영역의 지적인 작업들을 수행하는데 필요하다. 다음으로 인간처럼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영역에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격성의 가장 핵심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율성, 자의식, 자유의지가 있어야 한다. 현재 휴머노이드 로봇의 발전 수준은 첫 번째 조건인 지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인공지능의 영역에서 보면 상당한 발전 단계에 와 있고, 두 번째 조건인 감정 인지 및 표현 능력과 관련해서는 초기 발전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세 번째 조건과 관련해서는 이론적으로 다양한 논의들은 있지만 실제로 자율성이나 자유의지를 기술적으로 구현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런 면에서 로보 사피엔스는 전체적으로 이제 시작 단계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각 요소 별로 어느 정도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2014년 6월에 영국 왕립학회는 ‘유진 구스트만’이라는 슈퍼컴퓨터에서 돌아가는 ‘유진’(Eugene)이라 불리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튜링테스트를 최초로 통과했다고 발표하였다. 튜링테스트는 영국의 전산학자인 앨런 튜링(Alan Turing)이 개발한 테스트로 “기계가 과연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를 판정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에 따르면 컴퓨터가 인간과 문자로 대화를 주고받는 상황에서 컴퓨터의 반응을 인간의 반응과 구별할 수 없다면, 그 컴퓨터는 인간처럼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진 프로그램은 우크라이나에 사는 13세 소년인 것처럼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고, 이 상황을 커튼 뒤에서 지켜보던 심사위원 가운데 33%이상이 ‘유진’을 진짜 13세 소년으로 착각함으로써 튜링테스트를 통과하게 된 것이다.
이 보다 먼저 아이비엠의 최초 회장이었던 토마스 왓슨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아이비엠의 인공지능 컴퓨터인 ‘왓슨’(Watson)은 2011년에 미국의 유명한 퀴즈 쇼인 ‘제퍼디’에 참가하여 그동안 제퍼디 퀴즈 쇼 사상 최대 금액 우승자 및 가장 오랜 동안 챔피언 기록 보유자와의 퀴즈 대결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한편 1996년에는 역시 아이비엠에서 만들어진 ‘딥 블루’(deep blue)라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체스 경기에서 세계 챔피언인 인간을 이겼다. 이외에도 인간과 자연스럽게 가상의 지능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한 ‘채터 봇’(chatterbot)이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도 다양한 용도에 맞게 개발되어 있다. 가령 환자와 대화하면서 심리치료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공지능 상담 프로그램인 ‘엘리자’(Eliza) 등등. 채터 봇의 경우 대부분 언어와 문맥을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배우도록 설계되어 있다. 음성 인식이 기존에 정해진 패턴의 음성만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 특정 알고리즘 기반의 하향적 방식에서, 무수히 집적한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자기학습을 통해 다양한 음성 패턴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 상향적인 딥 러닝(deep-learning) 방식으로 바뀌어, 인간과의 자연스러운 대화가 훨씬 용이해 지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 넘거나 아직은 완벽하진 않지만 인간처럼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인공지능 컴퓨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인간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로봇, 소위 감정 로봇은 어느 정도까지 발전하고 있는가. 가장 최근인 2014년에 일본의 소프트뱅크사는 사람의 감정을 인식하고 이에 따라 반응 행동을 적절히 표현하는 감정로봇 ‘페퍼’(pepper)를 발표하였다. ([그림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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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인간과 감성적 대화를 나누고 있는 로봇 페퍼
페퍼에게는 두 가지 기술이 적용되었다. 하나는 사람의 얼굴을 보거나 음성을 듣고 그 사람의 감정을 인식하는 감정 인식 기술이다. 감정 인식을 위해서는 표정, 동작, 말소리 등을 인식할 수 있는 시청각 센서 기술이 필수적이다. 나아가 최근에는 웨어러블 컴퓨터 등을 활용하여 인간의 감정과 관련한 체온, 심장박동 등의 생리적 변화를 측정함으로써 인간의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 기술 덕분에 페퍼는 기존에 프로그래밍된 대로 행동하지 않고, 사람들의 감정을 인식한 다음 자기 학습을 통해 그에 적합한 행동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또 다른 기술은 ‘클라우드 서비스 감성 엔진’이라 불리는 기술이다. 인공지능을 갖춘 클라우드 환경 안에서 여럿의 페퍼들이 접속하여 각자가 인지하고 학습한 다양한 감정 및 반응 행동에 관한 정보들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감정에 관한 일종의 집단 지성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다. 또한 클라우드 환경에서는 인간의 감정과 관련한 빅데이타에 접속이 가능한 만큼, 이를 통해 페퍼는 인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들을 빠르게 인지하고 학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보다 정교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보다 훨씬 이전인 1991년에는 메사추세츠공과대학 인공지능연구소에서 사람의 표정을 흉내 내는 ‘키스멧’(Kismet)이라는 자율형 로봇을 개발하였다. 키스멧은 인간과의 상호작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감성적 표정들을 만족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자체적으로 학습하면서 표현해 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현재 키스멧은 눈 동작과 얼굴 표정 등으로 관심, 평온함, 화남, 슬픔, 행복, 놀람, 싫증 등 인간의 7가지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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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키스멧의 7가지 감정 표현
페퍼나 키스멧과 같은 로봇들이 인간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인간과 같은 감정과 정서를 동일하게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아직 일러 보인다. 하지만 이런 능력으로 인해 로봇은 충분히 인간과 감성적 차원의 교류를 할 수 있으며, 이는 인간과 로봇 간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로보 사피엔스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인 자율성, 자의식, 자유의지에 대해 살펴보자. 이러한 능력들은 앞의 두 가지 능력들과 달리 아직까지 과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 구현된 적이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조차 자율성이나 자의식이 무엇인지, 자유의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통일된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아닌 고등동물이나 인공지능 로봇에게 인격성을 부여하려는 철학적인 시도들과, 인간의 자율성이 결국 뇌의 복잡한 활동의 산물일 수 있다는 최근의 뇌 과학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자율성 나아가 자의식을 표현할 수 있는 뇌의 시스템에 대한 수학적 모델링 작업들이 시도되고 있다.
우선 인격성에 관한 철학적 논의와 관련해서 근대 철학자 로크는 인간 개념과 인격 개념을 구분하였다. 인간 개념이 생물학적인 종개념인 반면, 인격 개념은 생각하고 추리하며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개념화하여 구분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아닌 인격체가 존재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 실제로 20세기의 진화생물학에서는 인간에게만 부여됐던 도덕성이 사실상 동물들의 이타성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많은 실증 연구들이 진행 중에 있다. 즉 도덕성이라는 것도 신으로부터 이성적으로 부여된 인간만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진화과정에서 공동체 생존을 위해 작동하던 동물의 이타성이 경험적으로 발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피터 싱어와 같은 동물 윤리학자들은 고퉁을 느낄 줄 아는 동물들은 인간과 유사한 자의식 또는 마음을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들이 실제로 현실에서 적용된 사례도 있다. 2014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및 아르헨티나 법정은 아르헨티나의 동물원에 20년 동안 갇혀 있던 ‘산드라’라는 이름의 오랑우탄이 인간이 향유하고 있는 합법적 권리를 일정 수준 누릴 자격이 있다며 자유롭게 해주라고 판결하였다. 산드라가 인간과 유사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격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들은 앞으로 인공지능 로봇에게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뇌 과학을 보면 자율성이나 자유의지에 대한 기존의 생각에 도전하는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고 이것을 통해 두뇌나 육체가 움직인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1983년에 신경외과 의사인 미국의 벤자민 리벳과 동물 생리학자인 독일의 한스 코른후버 등이 행한 의식과 행동에 관한 뇌 실험(소위 ‘리벳의 실험’) 결과를 보면 이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가령 나의 의지로 손을 드는 경우, 내 마음이 의지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나면 뇌가 이에 따라 작동하고 뇌에 의해 다시 손을 드는 행동이 뒤이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이미 나의 뇌는 그런 결정을 알고 있었고 바로 이에 의해 행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를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의 행동의 원인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뇌이며, 그럴 경우 자유의지는 뇌의 산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리벳의 실험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실험이라고 단정 짓기는 곤란하다. 이는 인간의 뇌 안에 행동에 관한 자율적 예측 시스템이 존재하여 의식을 통한 행동 결정을 예측할 수 있음을 단지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최근의 인공지능 연구에서는 우리의 뇌가 미래의 행동과 관련한 예측적 학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고 이를 수학적으로 어떻게 모델링할 것인가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만약 이러한 모델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이에 대한 기술적 구현이 가능해 진다면 적어도 자율성을 지닌 인공지능의 탄생은 머지않아 가능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자유의지, 자의식을 무엇으로 규정하는가에 상관없이, 인간처럼 자율성을 갖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로보 사피엔스의 등장 가능성은 더욱더 높아지게 될 것이다.
사이언스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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