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진 3달러였는데…." 소년은 고개를 숙였다. 뉴욕 맨해튼 남단의 부촌 트라이베카를 관통하는 체임버스트리트에는 푸드트럭이 서너 대 서 있다. 점심때면 맨해튼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3달러짜리 점심을 파는 이 트럭들 앞에 학생들이 늘어선다. 그 '$3' 트럭 표지가 지난 6일 '$4.99'로 바뀌었다. 소년은 주머니 속의 지폐를 만지작거리다 풀 죽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래도 형편이 나은 다른 학생은 5달러를 내고 푸드트럭 앞 담벼락에 걸터앉아 싸구려 양고기 볶음밥이 들어 있는 스티로폼 그릇 뚜껑을 열었다.
두 학생 다 인근 스타이브슨트(Stuyvesant) 고등학교 학생들이다. 스타이브슨트고는 뉴욕 일대의 내로라하는 영재 중학생들이 10대 1에 육박하는 경쟁률을 뚫고 입학하는 곳이다. 졸업생 다섯 명 중 한 명이 '아이비리그'에 합격한다. 그런데 이런 '초일류고'가 우리 기준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는 게 한둘이 아니다. 학생들이 학교 급식이나 도시락을 먹지 않고 일용직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싸구려 푸드트럭을 기웃거리는 것부터 생소했다. 알고 보니 대부분 맞벌이 저임 노동자인 재학생 부모들이 도시락을 싸줄 여력이 없었다. 재학생의 60%가 이런 저소득층 가정 출신이다. 무상 급식이 나오긴 하지만 맛없는 피자 조각이나 샌드위치여서 아이들이 그나마 값싸고 맛있는 푸트드럭으로 몰린다.
어떻게 이런 학교에 저소득층 학생이 절반을 넘을 수 있나 궁금했다. 혹시 우리나라 특목고처럼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한다는 '기회균등전형' '사회통합전형' 같은 제도가 있나 조사했더니 없었다. 한국의 특목고들은 내신 성적, 자기소개서, 심층면접 같은 훨씬 '교육적'인 방법을 동원해도 저소득층은 '배려 전형'이 아니면 입학을 꿈꾸기 어렵다. 그런데 이 학교는 오로지 영어, 수학 시험을 250분 동안 치러 칼같이 점수로만 선발한다.
미국이라고 사교육이 없지 않은데 스타이브슨트의 저소득층 학생들은 사교육 지원을 받은 부잣집 아이들과 어떻게 겨뤘을까. 이 학교에 재학 중인 한 중국계 학생의 아버지는 "형편은 어렵지만 우리도 입시학원에 보냈다"고 했다. "맞벌이라 아이들을 돌보기 어려워 학원에 보내긴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학원에서 스스로 계획을 짜고 시험 준비를 했어요."
이 학교는 입시를 치르는 특목고이지만 공립이어서 학비가 안 든다. 시험만 잘 보면 되니 오직 머리 하나와 노력으로 미래에 승부를 걸도록 전투 욕구를 자극한다. 가난하지만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저렴한 학원 시장도 형성돼 있다. 부모가 발벗고 나서 돕지 않고, 고가의 컨설팅을 받아 '전략'과 스펙을 짜지 않아도 공부만 잘하면 명문고에 입학할 수 있다는 게 이들에겐 희망이었다.
입학한 학생들에게는 엄청난 양의 숙제와 시도 때도 없는 시험이 기다린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공부공장'이다. 마치 1970~80년대 고도 성장기 한국 고등학교 같은 풍경을 2015년 맨해튼의 부촌에서 맞닥뜨린 느낌은 복잡했다.
한국에선 이제 교육이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 사립 특목고에다 구색 맞추기로 배려전형을 하기보다는 실력을 겨뤄 당당히 입학하고 돈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는 공립 특목고를 대폭 확충하면 그 사다리를 다시 놓을 수 있지 않을까.
조선일보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