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7일 화요일

이보다 수학을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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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수학을 사랑할 수 있을까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2004년 요미우리 소설상과 제1회 서점대상을 수상한 일본의 베스트셀러다. 그 뜨거운 인기에 2006년 영화로도 제작됐다. 주인공은 64세의 수학박사. 나이는 많지만, 그의 시간은 47세에 멈춰 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기억이 80분 동안만 지속되기 때문이다. 80분이 지나면 뇌가 리부팅 되면서 그동안의 기억은 사라져버린다. 소설은 그를 돌보기 위해 파견된 28세의 가정부 교코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영화는 교코의 아들 루트가 중학교 수학교사가 된 이후 회고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일본 베스트셀러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영화판 포스터.

우애수 220, 284로 이어진 우리는 특별한 관계


박사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수는 바깥세계와 소통하는 통로인 셈이다. 작품에는 그만큼 다양한 수학 개념이 등장한다.


박사는 교코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신발 사이즈를 묻는다. 그녀가 24라고 답하자, 박사는 “4의 계승(4×3×2×1)이기 때문에 고결한 수”라고 말한다. 교코가 전화번호가 576-1455라고 하자, 박사는 “1에서 1억 사이에 존재하는 소수(素數)의 개수가 5761455개이기 때문에 대단한 전화번호”라고 감탄하기도 한다. 그는 또한, “소수는 어떤 수로도 나누어지지 않고 그 자체로 고고한 수이기 때문에 밤하늘에 떠있는 닿을 수 없
는 별과 같이 영롱한 존재이고, 또 소수는 별과 같이 무수히 많다”고도 이야기한다. 이렇듯 똑똑한 박사이지만, 기억의 한도가 80분이기 때문에 매일 아침 교코를 만날 때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 줄 알고 신발 사이즈와 전화번호를 묻는다.


박사는 “교코의 생일인 2월 20일을 세 자리 수로 표시한 220과 내 시계에 새겨진 학장상의 번호인 284가 ‘우애수’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의 손길로 인연을 맺은 특별한 관계”라고 말한다. 우애수가 더없이 좋은 친구가 되는 박사와 교코의 관계를 암시하는 복선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우애수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의 합이 서로 같은 두 수를 말한다. 220의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 1, 2, 4, 5, 10, 11, 20, 22, 44, 55, 110을 모두 더하면 284가 되고, 284의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 1, 2, 4, 71, 142를 모두 더하면 220이 된다. 17세기를 대표하는 수학자 페르마는 우애수(17296, 18416)을, 데카르트는 (9363584, 9437056)을 찾아냈다. 1866년 이탈리아의 16세 소년 파가니니는 (1184, 1210)을 찾아냈다. 이는 (220, 284) 바로 다음의 우애수로, 영화 속에서 박사는 위대한 수학자들이 지나쳤던 우애수를 찾아낸 것이다.


우애수와 유사한 것으로 ‘부부수’가 있다. 1과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의 합이 서로 같은 두 수로, 우애수는 자기 자신만 약수에서 제외했지만 부부수는 1과 자기 자신을 모두 제외하고 더한다. 예를 들어 48의 약수 중 1과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 2, 3, 4, 6, 8, 12, 16, 24를 모두 더하면 75이고, 75의 1과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 3, 5, 15, 25를 모두 더하면 48이 된다. (140, 195), (1575, 1648)도 부부수다. 이 수들은 항상 짝수와 홀수의 짝이 되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부부수란 이름이 붙었다.


박사는 교코의 아들에게 ‘루트’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의 머리 모양이 제곱근 기호인 루트 √와 같이 평평하기 때문이다. 모든 수를 품는 제곱근의 관대함과 공평함을 닮으라는 박사의 바람이 담겨 있기도 하다. 박사는 루트가 수학 문제 푸는 것을 도와주고 수학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루트가 수학 교사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박사는 루트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고, 루트는 그런 박사에게 아버지의 정을 느낀다.


수학 이외에 박사와 루트를 매개해주는 것은 야구다. 두 사람 모두 한신 타이거스의 열혈팬인데, 물론 박사의 기억은 사고가 발생한 1975년에서 멈췄기 때문에 박사와 루트가 생각하는 팀은 다르다. 박사의 기억에 저장돼 있는 야구 선수들은 이미 은퇴한지 오래다.







소인수의 합이 같은 연속된 두 수를 루스-아론 쌍으로 부른다.


루트의 야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교코와 함께 야구장을 방문한 박사는 좌석 번호 7-14, 7-15로부터 ‘루스-아론 쌍’을 떠올린다. 전설적인 야구 선수 베이브 루스가 1935년 홈런 714개로 세운 기록을 1974년 행크 아론이 715호 홈런으로 깬 바가 있다. 그 이후 714와 715와 같이 소인수의 합이 같은 연속된 두 수에 루스-아론 쌍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각각을 소인수분해하면 714=2×3×7×17, 715=5×11×13 이고, 소인수의 합은 2+3+7+17=29=5+11+13 으로 서로 같다. (8, 9)와 (15, 16) 역시 루스-아론 쌍이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담고 시간 속에 영원을 붙잡아라


박사는 다양한 대사를 통해 수학의 순수성과 심미성에 대한 강한 신념을 드러낸다. 이는 영국의 유명한 수학자 하디(Godfrey H. Hardy, 1877~1947년)와 비슷하다. 작품 설정에서 박사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학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하디는 이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어느 수학자의 변명’이라는 저서에서 마치 수학의 정리를 증명하듯, 엄선된 용어로 수학에 대한 생각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29개의 수필로 구성된 이 책은 페이지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담겨 있는 생각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디는 수학자가 화가나 시인과 같이 패턴을 창조하는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미술 작품은 색깔과 형태를 통해, 시는 언어를 통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수학은 아이디어를 조화롭게 배열해 영속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예술이라고 보았다. 하디는 실용성에 얽매이지 않는 수학의 순수성을 강조했고, 그런 면에서 쓸모없는 수학이 더 매력적이라고 보았다. 역설적이지만, 수학이 다른 무엇을 위해 구체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때 그 자체로 더 아름답고 고결하다고 본 것이다.


사실 필자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이야기 전개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양한 수학 개념이 다소 개연성 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감상할 때는 아름다운 수의 세계에 빠진 박사의 맑은 영혼에 흠뻑 빠져 들었다. 박사의 수학에 대한 순수한 애정은 영화의 엔딩에 흐르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에 잘 표현돼 있다.



순수의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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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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