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함을 인식하지 않은 채 동물과의 친화성만을 지나치게 지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 블레즈 파스칼
영국의 주간 과학저널 ‘네이처’ 6월 26일자에는 지금으로부터 꼭 150년 전 오늘, 영국린네학회에서 발표된 논문 두 편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 에세이가 실렸다. 진화론의 서막을 알리는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와 찰스 다윈의 논문인데 당시 이런 상황이 전개된 배경이 흥미롭다.
1830년대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를 탐험한 다윈은 핀치의 부리가 먹이에 따라 다름을 관찰하고 진화론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1858년, 49세였던 다윈은 이미 영국의 저명한 학자였지만 자신의 발견을 발표하기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 6월, 그보다 15세 연하인 탐험가 월리스로부터 논문이 동봉된 편지를 받게 된다.
월리스는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를 읽고 1848년 25세의 나이에 아마존으로 탐험을 떠났고 그 뒤 동남아시아를 탐사하다 진화의 개념을 생각해했다. 월리스의 논문을 읽은 다윈은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렇게까지 서로 일치하는 경우를 이제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설령 월리스가 1842년에 쓴 나의 초안을 보았더라도 이보다 더 훌륭한 초록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에 다급해진 라이엘과 식물학자 조지프 후커는 영국린네학회에서 월리스와 다윈의 이론을 함께 소개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1858년 7월 1일 ‘종이 변종을 만들려는 경향에 대해’(월리스)와 ‘선택의 자연적인 수단을 통한 변종과 종의 영속성에 대해’(다윈)라는 제목의 논문 두 편이 발표됐다.
당시 뉴기니에서 중병을 앓고 있던 월리스는 훗날 이 얘기를 듣고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영국에서 가장 저명한 박물학자인 다윈 씨와 후커 박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저에게 몹시 감사하더군요. 제가 다윈 씨에게 그분이 현재 집필하고 있는 대작과 같은 주제에 관한 논문을 보냈었거든요.”
월리스의 논문은 그해 8월에 린네학회에서 발간하는 저널에 실렸고 몇몇 과학자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진화론의 ‘충격’은 이듬해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면서 시작됐다. 1쇄 1250부가 발간 당일 매진되면서 영국사회는 술렁였고 곧 진화론을 지칭하는 ‘다윈주의’(darwinism)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그 뒤 ‘진화론 = 다윈’이라는 인식이 굳어지면서 월리스는 점차 잊혀졌다. 사실 다윈과 월리스의 운명이 엇갈린 이유는 그 뒤 그들 삶의 방향 도 한몫했다. 다윈이 ‘인간의 유래’,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 대해’ 등 진화론을 심화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을 계속 출간한 반면 월리스는 골상학에 빠져 과학자들을 실망시켰고 셰익스피어가 실존 인물인지를 밝히는 작업에 몰두하는 등 엇박자를 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월리스는 다윈에 대해 “다윈 씨는 세상에 새로운 과학을 선사했다”며 “그의 이름은 역사상 모든 철학자들보다 위에 자리할 것이다”라고 평가했고 훗날 “나는 다윈 씨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느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사실 다윈이 아니었다면 무명의 탐험가가 쓴 논문은 빛을 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윈 역시 1860년 월리스에게 쓴 편지에서 “시간이 많았더라면 당신은 아마 나보다 훨씬 훌륭한 논문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위로하고 있다.
최근 황우석 박사와 서울대 수의대 이병천 교수 사이에 개 복제를 둘러싼 특허 논쟁이 벌어질 조짐이라고 한다. 이 교수와 연관돼 있는 복제 전문 벤처인 알앤엘바이오가 최근 개 복제 경매를 실시한다고 밝힌 미국 벤처 바이오아트 측에 특허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경고문을 보냈다는 것. 그런데 황우석 박사팀이 바이오아트의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각자 사정이 있겠지만 한 때 한솥밥을 먹으며 동료이자 스승과 제자 사이었던 두 사람이 법정에서 얼굴을 붉힐 사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착잡한 심정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에 대한 우선권을 앞에 놓고도 서로를 인정하며 함께 가는 길을 택했던 다윈과 월리스. 특히 ‘자신에게는 새로울 게 하나 없는’ 월리스의 논문을 읽고 나서 라이엘에게 쓴 편지에서 “나의 모든 독창성(originality)은 그 규모에 상관없이 무위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라며 출판을 미뤄온 자신을 한탄하면서도 월리스 논문을 출판해달라고 부탁하는 다윈의 인격에 경외심을 느낀다.
다윈은 당시 누구보다도 ‘과격한’ 주장을 펼친 과학자였지만 사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 담담한 서술 방식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때로는 일종의 ‘슬픔’마저도 느낀다. 수년 전 읽은 그의 자서전에서 발견한 구절처럼.
“이제는 단 한 줄의 시도 읽기가 어려워졌다. 최근에 셰익스피어를 읽어보려고 했지만 너무 지루해서 구토가 날 정도였다. 미술과 음악에 대한 취미도 완전히 잃어버렸다. … 내 정신은 온갖 사실을 다 모아놓은 것에서 일반 법칙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기계가 된 듯하다. …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적어도 매주 한 번은 시와 음악을 즐기는 규칙을 세울 것이다. … 이런 취향을 잃는다는 것은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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