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9일 일요일

스타과학자와 햇병아리의 미담, 다윈과 월리스

비글 호 항해를 통해 다양한 자료를 수집한 다윈은 진화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오랜 숙고의 결과였는지 탈고는 계속 지연되었다. 그러던 다윈을 급하게 움직이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월리스의 논문이었다. 진화론의 공동 저자로 인정받는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는 다윈보다 한참 연배가 낮았다. 다윈보다 14살이 어렸던 젊은 월리스에게 다윈은 우상이었다.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 다윈과 독자적으로 진화를 연구하던 당시, 그는 무명 탐험가에 불과했다.


 


다윈과 월리스의 첫 만남은 1858년의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만남이 늘 그렇듯, 월리스가 다윈을 알게 된 사건이었지 다윈이 월리스를 알게 된 사건은 아니었다. 월리스는 다윈의 비글 호 항해기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25세이던 1858년, 아마존으로 탐험을 떠났다. 아마존을 여행한 후에는 동남아시아를 돌아다니며 생물들을 조사했다. 월리스의 연구는 현재에도 동남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식생을 가르는 ‘월리스 선’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월리스는 독자적으로 생물의 변이를 관찰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지만 커다란 난관이 있었다. 월리스는 주류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어려운 가정 환경으로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고 배움의 열정은 도서관에서 독학으로 달랠 수 있을 뿐이었다. 자연히 주류 학계에서 그는 완벽한 무명이었다. 게다가 동남아시아 여행 중 열병을 얻어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월리스가 말레이반도에서 채집한 개구리의 스케치. 동남아시아 여행은 월리스의 이론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월리스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윈에게 보낸 것은 다윈이 49세 때의 일이었다. 월리스는 이전에도 다윈과 간혹 서신을 주고받곤 했던 터라 존경하는 멘토가 자신의 아이디어에 훌륭한 조언을 해주리라는 기대를 품고 <원형에서 무한정 이탈하는 변종의 경향에 대하여>라는 간결한 논문을 보냈다. 이 논문은 열병으로 달뜬 상태에서 사흘 동안 혼신의 노력으로 마무리한 작품이었다.
월리스의 의도와 달리 그의 논문은 다윈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이 35세의 무명 탐험가가 다윈이 20여년간 정리해서 발표만 앞둔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의 논문을 보내 온 것이다. 비록 자연선택이나 진화와 같은 용어는 없었지만 연구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


영국 과학계의 주요 인물들과 두루 친하고 그 자신이 유명 과학자였던 다윈은 마음만 먹으면 월리스의 성과를 묻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윈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월리스의 논문을 받고 다윈이 라이엘에게 쓴 편지에는 “이렇게까지 일치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설령 월리스가 1842년에 쓴 나의 초안을 보았더라도 이보다 더 훌륭한 초록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한마디로 ‘이 친구 굉장히 훌륭하다. 내가 써도 월리스만큼은 못쓸 것 같다.’는 이야기다. 


다윈의 고민을 들은 라이엘과 후커 등의 동료들은 월리스와 다윈의 연구를 런던 린네학회에서 함께 발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월리스의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다윈의 위신을 세워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월리스는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 이 결정은 어쩔 수 없이 월리스에게 사후 통보 형식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었다.


 




1837년, 다윈이 진화의 과정을 고민하면서 남긴 메모. 그는 20여년간 숙고를 거듭하며 논문 발표를 미루어왔다.


 


다윈은 결국 월리스의 편지를 받은 지 13일만에 자신과 월리스의 논문을 동시에 발표했다. 월리스는 자신의 논문이 발표된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위대한 멘토의 논문과 거의 동일하면서도 더 자세한 증거를 담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오지에 있던 월리스는 다윈의 서신을 논문 발표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받을 수 있었다. 밀림에서 생고생하던 월리스는 다윈의 결정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월리스가 어머니에게 슨 편지에는 이렇게 감상을 남겼다.”영국에서 가장 저명한 박물학자인 다윈과 후커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저에게 몹시 감하하더군요. 제가 다윈 씨에게 그 분이 집필중인 책과 같은 주제에 대한 논문을 보냈거든요.” 다윈은 종의 기원이 출간되자마자 이를 월리스에게도 보내줬다. 월리스는 단숨에 종의 기원을 되풀이해 읽고는 ‘세상에 새로운 과학을 선사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이언스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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